(스포일러)소리도없이-장문리뷰입니다.
두서 없고 긴 글이지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스포일러)
.
흡사 마틴 맥도나와 코엔형제가 합심하여 쓴 시나리오를 이창동감독의 영화에서 볼법한 화풍으로 연출한 듯한 이 영화는, 떠오르는 면면이 많긴 하나 좀처럼 범주화할 수 없는 신선한 결과물이다. ‘청소’라고 지칭되는 시체처리일을 마치 진짜 청소라도 하는 냥 일상적인 태도로 이행하는 메인캐릭터, 스톡홀름신드롬의 한 전형처럼 보였지만 특유의 적응력을 바탕으로 되려 이 정서를 유괴범에게 전이시켜버린 납치된 아이. 그들이 사는 세상은 지극히도 난해하고 아이러니하며, 이러한 부조리함을 묘사하는 영화의 톤앤매너 역시 지극히도 기묘하다.
.
영화를 본 뒤 제일 먼저 해봄직한 질문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태인은 왜 말을 하지 않는(혹은 못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세상 무관심한 듯 보이는 태인의 침묵은 그 자체로 영화의 톤앤매너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깊은 회의로 인해 침묵으로 일관하기를 결심한 것인지, 아니면 선천적 질병이나 후천적 트라우마로 인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수화조차 하지 않는 그이기에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없다. 물론 영화의 초반부에 그의 침묵의 이유에 관한 창복의 대언이 있었긴 하나 그것 역시 명확한 해답이 되지는 못한다.
.
하지만 보다 영화의 핵심에 가까이 가기 위해선 질문을 다소 변형할 필요가 있다. 침묵에 관련된 태인의 전사는 관객의 궁금증을 자극하긴 하나 그 자체로 영화의 핵심이 될 수는 없다.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함구하는 영화의 설정부터가 이를 반증한다. 진정 눈여겨 봐야할 것은 바로 왜 영화는 말을 하지 않는 인물을 전면에 내새웠는가. 라는 질문이다. 다소 에둘러가는 느낌이 있지만 태인을 제외한 인물들, 즉 말을 하는 나머지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해보려 한다.
.
우리가 늘상 발화하는 언어란 사고의 전달 수단일 뿐만이 아니라 타인이 나를 판가름 할 수 있는 어떠한 기준이다. 우리는 타인의 어투, 어조, 혹은 말의 속도를 통해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머릿속에 확립한다. 예컨대 피범벅은 예사에 불과한 극악무도한 시체처리일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처리하는 창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를 선한 인물로 해석하는 까닭은 비단 그가 영화의 메인캐릭터 중 하나라서가 아니다. 그건 되려 어린 아이부터 아들 벌의 청년, 그리고 웃어른에게까지 공손하고 인자한 태도로 일관하는 그의 언어습관이 우리의 뇌리에 심은 일종의 편견에 가깝다.
.
영화는 극중 세계관의 아이러니와 부조리함을 구축하는 방법론으로 위와 같은 전략을 애용한다. 가령 태인의 집에서 탈출한 초희가 야밤에 자전거 탄 한 노인을 만나는 대목에서, 우리는 술에 취한 노인의 맹한 말투와 분위기를 통해 소아범죄에 대한 일말의 불길함을 예감한다. 허나 곧이어 노인이 정말 경찰이었다는 사실이 공개됨으로서 영화는 우리의 편견을 배반한다. 아이를 팔아넘긴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삼는 이들이 후에 태인의 집에 산채로 묻혀있는 이에게 순간의 측은함을 느껴 그녀를 도와준다는 설정역시 관객의 뇌리에 명확히 악인으로 인지된 이들을 손쉽게 단죄하기 힘들게 만든다.
.
허나 영화는 정작 극을 이끌어나가야 할 메인캐릭터의 말을 앗아간다. 심지어 간접적으로 언어를 발화할 수 있는 수단인 수화의 제스처마저도 말이다. 언어를 발화하는 이들에 대한 편견을 쌓은 뒤 이를 철저히 배신하는 예측불가의 전개를 선보이는 영화에서 말을 하지 않는 주인공이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묵직한 질문으로 이어지며 태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관객의 능동적 해석을 요구한다. 서사의 기능적인 측면에서 볼 때 태인은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그는 영화의 함의를 위해 말을 해서는 아니 되는 인물이다.
.
태인이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초희를 자전거에 태워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오는 대목에서 초희가 막간을 이용해 탈출을 시도하자 길거리에 앉아 채소를 파는 한 노인이 아이를 나무라며 태인의 편을 자처한다. 이는 노인이 태인을 악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방증하며 노인은 그 편견에 근거하여 태인의 편에 선다. 이처럼 우리역시 자신의 사고를 좀처럼 전달할 방도가 없는 인물에 대한 제 나름의 판단을 해야 한다. 선과 악이 혼재된 회색지대에 떨어져 세상만사 모든 일에 뚱한 표정으로 일관하며 창복의 지시에 의해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태인은 과연 어떠한 인물인가.
.
창복의 죽음을 영화의 2부가 시작되는 기점으로 해석해도 좋은 까닭은 그 순간부터 태인의 말을 대언해줄 이가 아예 사라져버렸기에 서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흡사 창복의 대리인처럼 움직였던 태인은 이제 모든 상황을 스스로 판단하여 움직이는 능동적 태도를 취해야한다. 태인의 몫까지 2인분의 말을 했던 창복이 사라짐과 동시에 영화의 세계관은 점차 더 모호해지며 그 세상에 놓인 태인의 복잡한 내면을 헤아려야하는 관객의 감식안은 보다 더 예민해 질 수밖에 없다.
.
여기서 눈여겨 볼 지점은 영화가 창복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창복의 죽음을 그저 서사의 변곡점 정도로 치부하지 않는다. 영화의 초반부부터 창복은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태인에게 설파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극중 그의 수중에 들어오게 된 것은 남의 아이와 남의 돈이다. 쫓는 인물 없이 오로지 쫓기는 인물만으로 연출된 창복의 최후장면은 연출적으로도 훌륭하지만 자신의 선한 가치관, 혹은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도 어떻게든 아이러니가 배태될 수밖에 없는 극중 세계관의 부조리함을 더욱 공고히 한다는 측면에서 의미적으로 더욱 가치가있는 장면이다.
.
창복의 죽음 이후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사실상 <소리도없이>는 태인과 창복의 이야기가 아니라 태인과 초희의 이야기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쉽게 선악을 판가름하기 힘든 세상에 놓인 약자들이 저마다의 꾀를 내어 부조리에 대응하는 것을 묵묵히 응시하는 영화는, 어쩌면 농촌을 배경으로 각색한 현대판 별주부전처럼 보이기도 한다.(초희가 토끼가면을 쓰고 등장한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니리다.) 태인이 본격적으로 주체성을 띠게 되는 영화의 후반부는 서로의 선의와 악의, 그리고 최선의 결과를 위한 악행이 뒤섞인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다.
.
태인의 집을 탈출한 초희는 한 늙은 경찰의 선의를 악의로 오인한 채 달아난다. 초희의 오해는 결국 젊은 경찰을 태인의 집으로 초대하게 된 불필요한 경위가 됐으며, 태인은 초희와 동생을 위한다는 선의를 기반으로 경찰을 살해하는 악행을 저지른다.(물론 결국 미수에 그쳤지만.) 선악의 아이러니한 릴레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태인이 초희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그 순수한 선행은 되려 본인의 동생을 무방비한 상태에 놓이게 해 유괴를 당할 빌미를 마련한 꼴이 된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독한 상황에서 동아줄이 되는 건 악인의 난데없는 선행과 태인이 사전에 저질렀던 악행이다. 태인의 동생을 납치하려는 이들이 순간의 연민으로 인해 마당에 묻혀있던 경찰을 도와주고 이로 인해 유괴가 불발되는 순간, 이 한바탕의 소동극은 선의의 것도 악의의 것도 아닌 정체불명의 무엇이 되며 보는 이에게 헛헛한 웃음만을 남긴다.
.
최선의 결과는 아니겠지만 나름대로 희극의 형식으로 극이 종결되는가 싶던 찰나에 영화의 각본은 다시금 관객의 기대에 엇나가는 전개를 선보인다. 초희가 태인의 손을 뿌리치며 그를 유괴범이라 단죄하는 설정은 영화의 서사를 한층 더 복잡하게 변모시킨다. 한 번 이를 역으로 적용해보자. 초희는 태인과의 작별이 아쉬워 좀처럼 그의 손을 놓지 않으려 애쓰며 마침내 만나게 된 교사에게 태인을 착한 오빠로 소개한다. 만약 이런 식의 전개를 취했다면 영화는 스톡홀름신드롬, 내면의 구원 따위의 해묵은 키워드로 묶이게 되며 이전의 개성 있는 전개가 무색하게도 금세 밋밋해져버렸을 것이다.
.
허나 마지막 초희의 결단은 우리로 하여금 영화 전체를 다시 되짚어 보게 만든다. 이전까지 초희가 태인네 가족에게 보였던 호의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선행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생존을 부지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을지도 모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초희는 태인의 집에 완전히 마음을 붙이는가 싶을 때면 언제나 남몰래 탈출을 도모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유괴되었단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초희는 항상 우리의 기대 이상으로 명민했다. 결국 마지막 초희의 행동은 더 이상 계산된 선행을 할 필요 없는 이가 마침내 드러낸 본심이었을까.
.
분명 초희의 마지막 결단은 태인과 관객인 우리에게 배신 아닌 배신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희를 탓할 명분은 없다. 초희는 엄연한 유괴의 피해자고 태인은 어찌됐든 가해자의 자리에 서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의 초희가 괘씸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영화의 아이러니가 짜임새 있게 구성돼있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다. 중요한건 태인의 내면이다. 이 아이러니의 뻘밭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최선의 행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에 처참히 배신당하였기 때문이다.
.
분명 집으로 돌아가면 태인은 마당에서 깨어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 눈에 선하다. 허나 영화는 다소 생뚱맞은 지점에서 이야기를 종결시킨다. 집이 아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이야기를 종결시킨 영화의 선택은 이 이야기의 핵심이 있는 곳을 가늠케 한다. 창복이 다리를 절게 된 이유 및 태인의 침묵을 설명하지 않는 영화는 인물의 역사에 무관심 하다. 그저 그 순간에 인물이 처한 내면을 응시하는데 전력을 다할 뿐이다. 결국 체포될 태인이 받을 형량 및 그 이후의 상황역시 영화의 주된 관심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는 법의 심판을 받기 이전에 스스로의 양심에 근거한 심판을 받아야 하며 더 나아가 스크린 밖의 관객의 재량에 근거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허나 그 어느 것 하나 선악이란 잣대로 규제할 수 없는 이 영화의 세계 속에서 태인을 쉽사리 판단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태인의 마지막 얼굴은 <버닝>에서 종수의 마지막 얼굴만큼이나 위태로워 보이며 그 위태로움은 우리를 하릴없이 사색에 젖게 한다.
추천인 23
댓글 10
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영화가 맘에 들어서 이런 저런 리뷰를 살펴보고 있는데
왠만한 전문가의 그것 보다 좋게 읽었습니다. 감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