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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그룹영어토익반' 초간단 리뷰

수위아저씨
3033 13 5

movie_image (6).jpg

 

1. 남중, 남고를 나온 나는 여중, 여고와 볼 일이 많지 않았다. 이성과 대화할 기회가 적었던 그 시절 청소년들에게 '옆 학교와 만남'은 중요한 자리였다. 그 시절 옆 학교와 만남은 여러가지 형태로 이뤄졌다. '소개팅'은 없었고 단체 미팅이나 써클끼리 만나는 형태였다. 그 중 후자를 우리는 '대면식'이라고 불렀다. 두 학교의 써클 멤버가 다 모이면 대략 30여명이 됐다. 그래서 넓은 공원에서 만나 파트너를 정하고 대화하다가 마음에 들면 애프터 만남도 하는 식이었다. 1학년 때 나는 생애 첫 대면식에 나갔다. 부산 영도에 위치한 '태종대 자유랜드'라는 곳에서 지역의 유명한 여자상업고등학교 써클과 모임을 가졌다. 나름 지역에서 전통이 깊은 인문계 남자고등학교에 다녔고 당연히 실업계 고등학교는 우리보다 공부 못했던 친구들이 가는 학교라 생각했지만 그 여자상업고등학교는 취업이 잘되고 돈 잘 벌기로 유명한 학교였다. 아마도 그때 나와 파트너였던 여자아이는 지금쯤 나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2. 여자상업고등학교에 대한 당시 인식은 그랬다. 정말 노는 친구들이 가는 '문제아 집합소'가 있었고 은행이나 대기업 취업문이 열린 명문학교가 있었다. '삼진그룹영어토익반'에 등장한 '상고 출신 고졸 직원'들은 모두 학창시절 날고 기던 똑똑한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그 수재들이 회사에서 하는 일은 청소하고 커피타고 복사하는 등 잡일이었다. 잡일을 하던 자영(고아성)은 무려 입사 8년차 직원이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할 정도로 푸대접을 받는 '천재 직원'이었다. 당시 기업문화가 정말로 그랬는지 믿기 어려운 수준이지만 지금도 깨지지 않은 몇 군데 유리천장을 생각한다면 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삼진그룹영어토익반'은 믿기 힘든 푸대접을 받은 여직원들이 고난과 싸워가며 회사를 구하는 이야기다.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전통적이고 원초적인 이야기를 써내려갔으며 빠른 템포로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끌어내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최약체'가 주인공이어야 카타르시스가 큰 만큼 회사 내 '최약체'가 주인공이다. 굳이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3. '삼진그룹영어토익반'은 1991년 3월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이 모티브가 됐다. 당시 부산에서 살았던 나는 꽤 심각하게 피부로 와닿는 사건이었다. 무려 유재석은 데뷔전 개그콘테스트에서 소재로 사용할 정도의 사건이었다. 당시 경북 구미에 위치한 두산전자 공장에서 페놀수지 파이프가 파손돼 30톤의 페놀 원액이 낙동강 지류 옥계천으로 흘러든 사건이다. 대구시민의 신고로 당국이 조사한 결과 두산전자 공장은 1990년 10월부터 325톤을 옥계천에 무단방류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국의 조사로 대구지방환경청 공무원 7명과 두산전자 관계자 6명이 구속된 사건이다. '삼진그룹영어토익반'은 이 사건의 구체적인 데이터를 적극 활용했다(6개월, 325톤, 6명 구속 등). 그러나 3명의 고졸 직원들이 사건을 해결했다는 점과 글로벌 사모펀드의 음모 등 내용은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4. 이야기는 원초적이다. 아마도 20세기 유행했던 '최약체가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오고 싶었던 모양이다. 영화의 배경인 1995년에 충실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런데 어떤 장면(클라이맥스)에서는 연출조차 그 시절 방식을 가져온다. 한 공간에 모조리 모여서 연극하듯 대사를 주고 받고 타이밍 맞춰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해 소소한 스펙타클을 더하는 식이다. 그리고 비장한 음악이 나오고 선한 진영의 흐뭇한 미소가 나오는 연출. 최근에는 일본 드라마에서 가끔 본 것 같은 연출은 "굳이 이것까지 90년대 방식을 고집했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 엉망은 아니었지만 보면서 일순간 오그라드는 것은 참기 어렵다. 혹시나 90년대 연출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라면 신선하게 보일 수 있을까? 이건 내가 아저씨라서 그런 걸로 치자. 

 

5. '삼진그룹영어토익반'의 실제 모델이 두산그룹인 것을 알고 나니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낙동강 페놀 방류사건은 관련자들의 구속으로 일단락됐지만 기업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는 4월 두산전자 해당 공장의 조업재개를 허가했다. 그리고 보름만에 페놀 원액 2톤이 또 유출돼 당시 두산그룹 회장이었던 박용곤이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환경처 장관이 경질됐다. 당시 대구시민들은 두산 측에 170억100만원의 피해배상을 요청했지만 두산은 단 10억여원만 배상했다. 사실 이 이야기의 실제 사건은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것은 세 주인공 자영, 유나(이솜), 보람(박혜수)에게도 해당된다. 이 이야기가 1995년을 배경으로 한 점이 이들의 직장생활이 해피엔딩이 아닌 이유다. 왜냐하면 모두가 알다시피 이 이야기의 엔딩 이후 약 2년 뒤 아래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 

 

movie_image (7).jpg


6. 결론: IMF 당시 국내 모든 기업들이 힘들었던 만큼 두산그룹 역시 구조조정을 감행한다. 영화 속 회사의 실제 모델이었던 두산전자는 지주사의 BG(Business Group)로 속해졌다. 개별 기업이 아닌 사업부서로 축소된 만큼 조직개편과 인력감축이 이뤄졌다. 자영, 유나, 보람도 이때 구조조정 당했을 것이다. IMF의 거친 파도를 그들이 어떻게 넘었을지 궁금하다. 혹시나 '삼진그룹영어토익반' 속편을 만들 생각이라면 이 이야기가 1995년을 배경으로 한 것이 설명된다. '카타르시스'라는 측면에서는 간만에 보는 시원한 영화였다. 모든 내부고발이 이런 해피엔딩을 맞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어른이 돼버렸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이런 영화같은 일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IMF 이후를 배경으로 한 '삼진그룹영어토익반2'가 궁금하다. 

 


추신) 늘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이야기인데 두산그룹 계열사 중 가장 실적이 좋은 회사는 두산베어스다. 이 영화 덕분에 두산그룹 히스토리를 다시 찾아봤는데 두산은 '세습경영'을 하지 않는다는 점 빼고 참 경영을 못한다. IMF를 관통하긴 했지만 당시 B2C 사업을 대부분 정리하고 현재 중공업, 건설장비 등 B2B 중심으로 사업을 영위했다. 사업 간 시너지 효과를 기대했겠지만 현재는 시너지 효과로 망하는 중이다. 정부의 탈원전 기조가 회사 폭망의 책임이라고 하지만 그 이전에 사업기조를 정할 때부터 흔들거리긴 했다(건설경기 내려갈 때 건설장비회사를 인수하는 식). 그러면서 엄한 시내면세점에는 뛰어들었다가 망했다. 지금도 몇몇 사람들이 이야기하지만 OB맥주는 끝까지 지켰어야 했다. 그리고 두산전자의 논란도 마찬가지지만 최근 두산타워에서도 입주상인과 갈등이 있다. B2B 기업치고는 외부 갈등이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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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image 1등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주는 글이네요. 잘 봤습니다.
10:27
20.10.22.
profile image 3등
참 아쉬운게 우리나라가 내부고발이 좋게 된 케이스가 없지요. 미국 영화였으면 실화바탕일 스토리인데 우리나라여서 그냥 판타지일뿐... 페놀 사건이 두산전자 이야기였군요. 그것까진 몰랐던 부분이네요...
11:26
20.10.22.
profile image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내일 감상하러가는대 사회배경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네요 ^^

20:47
2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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