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5 출시기념) 내 인생의 게임 두편 (장문주의)
(게임인 저니,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 그리고 영화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 ‘안드레이 루블료프’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를 전공하고 있고 아주 오래 전부터 음악에 귀를 열어왔지만 가장 마음깊이 끌렸던 예술은 결국 게임이 아닌가 싶습니다. 작고하신 로저 이버트는 생전에 새로운 세대의 문화인 게임에 대해 그 가치를 인정하지만 굳이 예술일 필요는 없는 분야라 말씀 하셨습니다. 10대 시절 영화가 존재하는 그 모든 예술 중 가장 우위라 굳게 믿고 있던 저에게 그런 로저 이버트의 말은 해석 없이 그저 받아들여야하는 하나의 종교 혹은 성경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그의 인생관을 존경하기도 했고 실제 삶에 영향도 많이 받았으니 말이죠.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그의 말을 받아 대답해 볼 수 있다면 그 말은 틀렸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로 어제 제 블로그에도 이와 관련된 글을 썼지만 로저 이버트의 말은 현대 관객의 의식의 변화가 고려되지 않은 어쩌면 이젠 조금은 흘러가 버린 세대의 오판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 게임이 미래의 영화가 될 거라 확신합니다. 그건 게임이 가장 우위의 예술이라서가 아닙니다. 영화를 선별하는 주인으로 주객전도된 현대의 관객들은 영화를 자신들이 선별해야 하는 하나의 노예로서 영화를 바라보고 평가합니다. 주인은 노예를 부리고 게임은 주인에 의해 플레이 됩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영화는 관객의 의식변화에 따라 조종되는 영화로 변화하거나 감상하는 게임으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 영화의 미래에 관한 생각을 적은 제 블로그 링크 입니다. - https://rkdeodnjs699.blog.me/222093540495
이틀 전 ps5가 발표되고 이제 또 하나의 세대가 저무는 계절이 된 것 같습니다. 저에게 새로운 게임 하드웨어는 말하자면 텔레비전에 대항한 영화의 70mm필름과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대가 변화하면 관객들은 언제나 새로운 스펙터클을 원하기 마련이니까요. 새로운 스펙터클이 더 나은 작품을 의미하진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기술적 발전 단계의 최전선에 놓인 게임이라는 그 확장성 면에서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사설이 길었습니다. 어제 블로그에 미래의 영화에 관한 생각을 적던 중 불현 듯 제가 인생의 영화와 음악은 숱하게 정리해 왔지만 막상 가장 마음 깊이 좋아하던 예술인 게임을 정리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경험과 정리의 기록을 익무분들과 공유하고자 글을 씁니다.
1. Journey (2012)
좋은 게임의 정의란 무엇일까요? 저는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이지만 주변 동기들에게 좋은 영화가 무엇일까 물을 때면 항상 서로 다른 답변이 들려오곤 합니다. 앙드레 바쟁에 의해 작가주의가 주목 받은 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질문의 답은 누구도 모르는 겁니다. 하물며 발전과 변화의 시간을 고려하였을 때 이제 겨우 30년 정도가 지난 예술인 게임에 대해 훌륭한 게임이 무엇이냐 묻게 되었을 때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좋다고 ‘착각’한 무언가를 입으로 뱉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좋은 것과 훌륭한 것에는 기준이 없습니다. 하물며 게임에는 아직 누벨바그의 시대조차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저니’를 최고의 게임으로 뽑은 것에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게임은 느리고 짧으며 단순합니다. ‘저니’는 현대 트렌드의 정 반대에 서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다시 물을 수 있을 겁니다. 느린게 지루하다면 그건 오히려 빠른 것 에 자극받아 무감각해진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짧은 게 단점이라면 이렇게 반론할 수 있을 겁니다. 작품에는 저마다의 경험이 요구하는 심리적 시간이 존재합니다. 저니에겐 단지 그 필요시간이 두 시간이었을 뿐입니다.
‘저니’에서 이야기는 단지 존재하지만 이해할 수 없거나 혹은 그 이해 자체를 강요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우리가 가장 당황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이해해야 할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게임에서 우린 무엇을 해야 할지, 지금 눈 앞에 놓인 작품을 진행해야할 심리적 동기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게임의 한계가 아닌 선택 이었을 겁니다. 우린 저니를 플레이 하며 그저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래 그 다음에는 무언가 있겠지, 언젠간 설명해 주겠지 하며 그저 빛을 뿜어내는 산을 향해 걸어갈 뿐입니다.
누군가는 이 게임의 끝에서 그저 허탈해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게임은 정말 끝까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컷씬과 관념적 대사에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전달되던 고전적 스토리텔링은 이 작품에선 거의 무효합니다. 우린 이 게임의 끝에서 무엇을 느껴야 할까요? 그러한 질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질 때쯤 이 게임은 다시 우리를 여행이 시작된 지점으로 다시 되돌려 놓습니다. 정확히는 모든 여정을 거친 우리는 순례자에서 인도자가 되어 태초의 순간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한 편의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그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료프’였습니다. 그 작품에서 성화 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숱한 전쟁과 강간의 참상을 목격하며 고귀한 하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도달한 어느 곳에서 그는 울리지 않는 종을 기어이 울린 아이의 기적을 목격합니다. 루블료프는 기적을 목도한 뒤 자신이 지나온 순례의 길을 되돌아봅니다. 그 과정이 고통이었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빛을 하사하실 것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저에겐 ‘저니’가 하나의 순례의 길처럼 다가왔습니다. ‘저니’가 도달하는 곳은 빛의 산맥 혹은 천국입니다. 우리가 그 곳에 들어설 수 있는 자격은 모든 역경의 여정을 거쳐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건 우리가 도달해야 할 곳에 도달하기 까지 견뎌낸 시간과 지나온 곳에 남겨진 발자국 일 것입니다. 이 게임의 가장 인상적인 시각 스타일이 모래에 남겨진 흔적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저니’는 심리적 실제적 시간을 동일화한 디제시스 시간 구조 안에서 플레이어를 순례자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 게임의 끝에서 우리가 도달한 곳은 아마도 지금까지 그 어떤 작품에서도 경험한 적 없는 혹은 경험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또 하나의 천국 입니다. 천국은 목적이 아닌 언젠가 도달해야 할 곳입니다. 우린 천상에 올라가기 위해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순례자에 불과합니다. 그건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2. THE LAST OF US PART II (2020)
라스트 오브 어스는 결국 행복이 거세된 구원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행복과 구원은 언뜻 동의어처럼 들리지만 사실 구원은 희생의 개념을 포함합니다. 운명론적인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손에 십자가가 박힐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벌하기 위해 손을 씻었습니다. 이는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조엘과 엘리의 상황과 유사합니다. 단지 그들은 신의 자식이 아닌 그저 고통 받는 세계에 놓인 한명의 인간들이었을 뿐입니다.
‘죄’ 라는 건 눈앞에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문명사회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합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고 타인을 경계해야 할 아포칼립스의 무대에서 ‘죄’는 ‘분노’로 치환됩니다. 분노가 불러 오는 건 복수입니다. 그리고 조엘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하나의 필연으로 생각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집은 언제라도 떠날 것처럼 단정하고 소박합니다) 반면 엘리는 과거 자신의 친구를 잃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녀는 친구의 덧 없는 소멸을 보며 의미 있는 죽음을 갈구해 왔지만 동시에 어딘가에 소속되고 버려지고 싶어 하지 않는 모순된 욕구를 가진 복합적인 인간입니다. 엘리는 플래시백 에서조차 홀로 떠돌며 조엘을 밀쳐내지만 역설적으로 그녀의 집은 과거의 기억과 추억으로 혼재되어 있습니다. 엘리는 떠나고 싶었던 게 아닙니다. 의미 있는 죽음을 앗아간 조엘이 싫었던 것도 아니겠죠. 엘리는 단지 무척 외로운 존재였을 뿐입니다.
이 작품이 비극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엘리가 본인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왔고 애비의 아픔을 알고 있음에도 손을 씻었으며 스스로의 진실과 내면의 진심을 바라보았을땐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엘리는 성장했습니다. ‘죄’가 사라진 세계에서 ‘분노’라는 건 상대가 아닌 나 자신을 황폐하게 하는 질병이라는 것도 애비와의 마지막 싸움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엘리는 조엘이 남긴 기타조차 제대로 잡지 못합니다. 성장의 흔적처럼 엘리의 손가락은 성장통이 되어 성인이 되기 전 엘리의 깨달음을 평생 기억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애비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레브와 함께 도망친 애비가 시간이 흘러 엘리가 자신을 구원했던 용서의 의미를 알게 되는 날이 온다면 애비는 어린 날 본인이 저지른 섣부른 과업의 고통에 몸부림 칠 것입니다. 단지 그날이 빨리 찾아오고 어서 지나가 그들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제가 ‘라스트 오브어스 파트2’를 플레이하며 가장 선명하게 상기된 영화는 다름 아닌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 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아들 데인 드한은 은행 강도 였던 아버지 의 삶을 불현 듯 따라가게 됩니다. 관객들은 이미 아버지 라이언 고슬링의 삶의 단면을 바라보았기에 아들이 어떤 길을 갈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비극을 목도하고도 영화의 마지막, 데인 드한이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길을 다시 따른다고 해도 이 운명론 적 세계에서 우리가 손댈 수 있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없고 비극이 예정된 삶도 결국 또 하나의 삶일 뿐이니까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의 가장 고통스러운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이 작품은 게임이지만 우리의 플레이는 이야기에 하등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이건 예정 된 비극이며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성장한 엘리는 이 세계에서 끊임 없이 살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가 그랬듯 우린 떠나가는 엘리를 보며 그녀를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게 비극이라도 삶은 결국 이어져야 하는 것이니 말이죠.
저에게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는 안전한 걸작이었던 1편의 대척점에 서있는 용감하고 새로운 시도처럼 보였습니다. 1편의 로드무비적인 원형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주제에 대한 야심과 이야기의 규모를 확장시켜나가는 스토리텔링도 실로 감탄 스러웠으며 현존하는 최고수준의 기술적 구현은 대안 영화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했습니다. 전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가 걸작이라 확신합니다. 단지 이 작품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선 안개처럼 쌓인 작품 바깥의 분노가 걷혀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추천인 3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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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게임 모두 일반적인 게임 이상으로 도전적인 시도로 강한 충격을 준 작품이었네요. 글 잘 봤습니다.^^
라스트 제다이, 라스트 오브 어스2는 그 문제를 떼놓고 봐도 굉장히 작품적으로 아니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분노와 닐 드럭만의 갈등은 그것만 남은것 같기도 해요. "사줄 사람들을 생각도 안하고 창작의 자유 이X랄!" 이라는 게 커뮤니티 분노의 대다수니까요.
그게 아주 이기적인 논리는 아닌데, 루X웹 같은데 가면 최소한의 정치적 올바름조차도 역행하는 수준의 극단론을 펴는 작자들이 나타나기까지 하니....
링크 글 하나 남깁니다. 일본 영화 평론가 글인데. 전 이분 글에 동의해요.
2회차 중인데 왜 논란의 스토리로 만들었는지 좀 더 이해가 되더라고요.
댓글란은 보지 마세요. 좀 지저분해서...;;;
https://extmovie.com/movietalk/58047474
암튼 감사합니다.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에 대한 평가 중에는 대개 스토리 중심으로만 평가가 이루어지더군요. 게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플레이’ 요소와, 스토리가 결합하면 다른 의미나 효과가 나올 수 있음에도요. 시네마틱 게임이라고 표방하긴 하는데 라오어 2는 ‘시네마’가 아니죠. 그럼에도 게임을 평가할 때 스토리적, 영화적인 경험에 가까운 느낌만을 바탕으로 평가가 된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위의 답글 중에서 “(플레이어 포함) 모두가 스스로의 황폐함을 비추는 거울이다”라고 하셨는데, 플레이어에게 살인 외에는 별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플레이어의 행동을 상기시킨다고 그게 완전한 거울이 되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강요된 행동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황에서 플레이어에게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비추고 성찰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그건 임의로 왜곡된 거울에 가깝죠.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봅니다. <라오어 2>는 왜곡된 거울에 비친 왜곡된 상을 가지고 그게 플레이어의 본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느끼는 거예요. 게임에서 선택지가 플레이어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이렇게 작동되고 있던 겁니다.
저도 영화 비평을 공부 중에 얕은 지식으로 접한 겁니다만, 구미디어예술과 뉴미디어예술을 나누는 기준이 작품과 수용자 간에 상호작용이 있나 없나로 나누더라구요. 뉴미디어예술에서는 관람객의 능동적 참여가 작품에 필수적인 요소가 된 것이죠. 개인적인 생각으로 뉴미디어에서예술에서는 작가나 관람객 둘 중 하나가 작품세계를 독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품을 서로 공유함으로서 생기는 상호작용이 더 중요시되죠. 그래서 주로 이러한 상호작용성에 대한 VR영화나 비디오게임에 대해 매체탐구가 이루어지고 있죠. 따라서 게임의 주인이 작가인가 플레이어인가 하는 논쟁은 구미디어예술의 이론을 뉴미디어예술 논쟁에 부정교합한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논쟁에 가깝긴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