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스토리, 헝가리에서 온 유사 누아르
마틴 스콜세지가 아리 애스터의 유전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사용한 단어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연출자의 지배권, 화면 구성의 정밀성, 화면 구성 안에서의 움직임과 화면에서 일어나는 일정한 속도와의 조화로움, 그리고 사운드.
영화에서 카메라와 렌즈를 다루는 테크닉이 아무리 좋더라도 이러한 요소가 어우러져 하나로 모이지 않으면 영화는 스토리텔링과 관계없이 단순 이미지만 나열되는 시각 자료 보여주기 잔재주에 그치고 맙니다. 시각 자료 끌어모아 한데 붙이기에 모든 정신이 가 있을 뿐, 이미지를 영상을 넘어 영화로 구현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지점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잭 스나이더처럼 되는 것입니다.
흔히 스타일은 잘못 받아들여지거나 심각한 오해를 받는 단어입니다. 잭 스나이더가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허울을 전시하는 데 그친다면 2000년대 들어 영화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업영화 감독으로 노선을 변경하는 결정을 한 스콜세지가 스타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감독과 가깝다 할 수 있습니다. 근작 아이리쉬맨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영화 말미에 어두움이 화면에 내리깔리며 문 틈으로 보이는 프랭크 쉬어런의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카메라 움직임입니다. 그건 택시 드라이버에서 스콜세지 자신이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고 고백하였던 텅 빈 공중전화를 지켜보는 시점과 밖으로 나서는 트래비스 비클을 잡은 뒷모습과 그대로 포개집니다. 40여 년 전 로버트 드 니로와 함께 했던 장면의 재탕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장면 전체는 오늘날 스콜세지가 새긴 인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전에 본 것과 동일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젊은 시절의 자신을 상기시키는구나, 결국 스콜세지는 같은 영화를 찍었군, 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바로 스타일의 정의입니다. 40년 전의 나와 지금 나는 어찌 되었든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헝가리 영화 부다페스트 스토리를 보면 이제 고전이 된 선배 미국영화들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고전 미국 필름누아르에 경배를 보내는 한편, 필름누아르가 성행하던 시기의 한복판인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여 우리도 전쟁 직후 헝가리를 배경으로 누아르의 표현 방식을 빌어 작품 하나 만들어 보면 어떨까라는 제작진의 발상과 야심이 보이는 한 편입니다. 누아르의 공식을 어느 정도 따르고 있으면서도 영화에서 부유하고 헤엄치며 이동하는 카메라는 결코 거슬리지 않으며 정밀하고 성실하게 이야기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테크닉이 이야기의 전개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점과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은 각본과 연출이 양면에서 영화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기도 합니다. 이 때 영화의 스타일은 단순 시각 표현을 하기 위한 효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와 접목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누아르를 지향하고 따르면서도 실패하는 영화는 많았습니다. 필름누아르라는 속성을 잘 알지 못하는데 건드렸거나 알았더라도 시도가 잘 살지 않으면 금세 밑천이 드러나기에 공력이 없으면 본전도 찾지 못하는 특유의 표현 방식 때문이었습니다. 각본을 쓴 쾨블리 노르베르트는 헝가리에서 아주 유명한 작가라고 하던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기를 일삼은 남자, 생사가 불분명한 남편을 뒤로 하고 아들과 함께 사냥을 하며 살아가는 여인, 무언가를 숨긴 채 태연하게 행동하는 남편이라는 인물을 만들면서 이들에게 정량 만큼의 대사와 상황을 부여하여 삼자 긴장 구도와 경쟁이 영화 중반부터 극을 알아서 굴려가도록 이끌었습니다.
연출자 사스 아틸라가 영화 촬영을 36일 만에 끝냈다고 해서 놀라움을 주었는데 오랜 기간 영화 만들기를 두고 고민하면서 세월을 보냈음을 짐작하게 하는 일화입니다. 장편영화를 여태 두 편 만들었고 나이가 쉰에 가까운 것을 보니 앞으로 작업하는 영화들도 기다려 볼 만하겠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자신들의 배역에 녹아들어 있는데 특히 여성 연기자 비카 케레케스와 그의 남편으로 나오는 몰나르 레벤테가 기존 인물에 연기자의 성격을 덧입히는 회화처럼 연기를 합니다. 무대 출신으로 활동하신 분들이고 한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 식 연기/제어를 벗어난 과장된 독립영화 식 연기가 아닌 인물이 가진 본래의 생명력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연기, 배역과 연기자가 순도를 유지하며 하나의 지향점을 향하여 나아가는 연기로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부다페스트 스토리의 원제는 작은 이야기라는 뜻인데 영어제목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과장된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들여온 배급사에서도 제목 선정에 고심을 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역시나 알토미디어에서 수입과 배급을 거친 보석 같은 영화로, 올해만 하더라도 브라 이야기와 전망 좋은 방이 상영관에 걸린 데 이어 이번 부다페스트 스토리와 하워즈 엔드도 개봉이 예정 되어 있습니다. 영화에서 움직임이란 무엇일까,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난 누아르라는 표현법을 현 시대 헝가리의 제작진이 차용하여 전후 시대 상황과 접목한 드라마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분, 그리고 영화에 막 관심을 두신 분들에게 권합니다. 부다페스트 스토리는 범위가 넓은 의미의 스타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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