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반드시 관람하시길 추천하는)리뷰(줄거리 정도의 스포)
그 영화는 걸작이 아닙니다. 시대를 풍미한 작품이거나 인기를 끈 작품도 아닙니다. 그런데 무시로 생각이 나서 재생해보게 되는 영화가 있습니다. 최민수 주연의 [남자이야기], 엘리자베스 슈의 [야행], 패트릭 스웨이지 [로드하우스] 같은. 제니퍼 코넬리의 발레와 로버트 드니로의 웃음 장면 때문에 챙겨보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도 있네요. 물론 백 번 이상을 재생해 본 영화도 상당합니다. 최근으로 보자면 [인피니티 워]나 [엔드게임]이 해당하겠습니다. 반면 찾고 싶어도 찾지 못하는 영화도 생겨납니다. 제목도 모르는, 뇌하수체를 먹던 녹색괴물이라는 아주 조악했던 3류 크리쳐물, 91년(92년?) [나이프]라는 이름으로 비디오 발매되었던 영화 역시 그렇습니다.
떠올려 보면 어떤 영화는 딱 한 장면이 각인 되어서 그 장면을 보기 위해 다시 보기도 하고, 영화 전체가 너무 감격적이거나 즐거워서 무시로 즐기기도 합니다. 또 영화를 함께 보았던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남았거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에 대한 향수로 영화를 기억하게도 됩니다.
[백투더퓨처]를 볼 때 개봉일 첫 상영을 사수하기 위해 친구들끼리 단체로 보려고 줄 섰던 일이나, [아비정전]이 액션 영화인 줄 알고 들어갔다 환불해 달라는 싸움이 난 것 같은 상황은 영화를 기억하는 다른 방법이 되기도 하니까요.
영화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참 신기합니다. 특히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영화 이외에 다른 기억도 함께 잔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기억과 결부한 영화에서, 오늘 말하려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도무지 이 장면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특유의 이정재 테마와 함께 보이던!
배우 이정재, 극 중 레이의 등장입니다. 그야말로 소름이 돋는 압도적인 배우의 캐릭터 각인을 보여준 장면이었습니다. (공개된 스틸 컷으로 찾다 보니. 딱 이 장면은 아닙니다만) 마치 스크린을 뚫을 듯한 눈빛으로 악인의 카리스마를 보여준 이정재의 모습은 압권이었습니다. 그 장면 이후, 이정재가 나타날 때마다 기대감이 생겨났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일주일 가까운 시간동안, 이정재의 눈빛이 떠나지 않더군요. 얼마나 강렬하게 저를 휘어잡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분명 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 영화를 N차 하게 될 거라는 예감에도 젖어듭니다.
앞서 같은 의미로 말씀드린 걸 재탕하자면, 영화란 참 신기합니다. 그 영화가 걸작이 아니어도, 반드시 기억하게 되는 영화가 생겨나기 마련인 때문입니다. 아마도 저는, 평생을 이정재의 눈빛으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기억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묘하게 이정재와 황정민 배우가 함께 분했던 영화 [신세계]를 이정재 배우보다는 황정민 배우의 대사 "드루와!"로 기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왕 썼으니 이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 대한 썰을 좀 풀겠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하나만 짚자면.
이 영화 홍보문구 '하드보일드'라는 단어는 이 분야 평론과 창작을 겸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틀렸습니다. 즉 무분별하게 잘못 사용하는 일례에 동참한 단어일 뿐입니다. 하드보일드는, 반드시 결과에서 탐정 또는 이에 준하는 캐릭터가, 가장 직관적인 단어로, 권선징악을 행하는 결과가 따라야 합니다. 하드보일드는 결론에 이르러 탐정의 해결만 있을 뿐 불관여하게 되는 클래식(또는 퍼즐식) 미스터리에 반발해 미국에서 탄생한 서부권 문학의 한 사조였습니다. 즉 탐정 손으로 악인을 처단한다, 라는 결과 즉 관여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방식을 쓰던 그것은 하드보일드 허용치가 되었습니다. 더티 해리 시리즈에서 법에 처단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해리가 매그넘을 쥐고 악인을 죽여버리는 방식이 바로 하드보일드의 정신입니다.
이렇게 썼습니다만 이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현대적 소설 문법에서 보자면, "쫓고 쫓기는" "스릴러에 가장 부합하는" 또는 "스릴러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작품입니다. 즉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취한, 스릴러입니다.
줄거리 정도에서만 이야기를 써보기 위해 포탈사이트에 기재된 줄거리를 가져와 봅니다.
태국에서 충격적인 납치사건이 발생하고 마지막 청부살인 미션을 끝낸 암살자 인남(황정민)은 그것이 자신과 관계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인남은 곧바로 태국으로 향하고, 조력자 유이(박정민)를 만나 사건을 쫓기 시작한다.
한편, 자신의 형제가 인남에게 암살당한 것을 알게 된 레이(이정재).
무자비한 복수를 계획한 레이는 인남을 추격하기 위해 태국으로 향하는데...
생계형 악인인 청부살인업자 인남 역에 황정민 배우입니다. "마지막 청부살인 미션"을 끝낸 인남은 자신을 도우는 사람을 통해 태국의 납치사건에 대해 인지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인남은 태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레이는 악당입니다. 그리고 인남이 마지막 청부살인 미션, 으로 죽인 사람이 바로 레이의 형입니다. 레이는 형을 암살한 인남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쫓기 시작합니다.
인남은 납치사건을 좇는 반면 레이는 인남을 좇습니다. 여기서 스릴러의 대공식 하나가 자연스레 생겨납니다.
쫓고 쫓기다!
추리소설이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밝혀가는 이야기"인 반면 스릴러는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쫓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추리소설은 단적으로 말해 소실점이 생겨납니다. 즉 가운데 모이는 먼 점, 그게 사건의 해결이 되는 반면 해결이 되고나서는 사건이 풀어져 버리기에 사건을 푼 탐정만 남고 오히려 사건이 뒤로 밀려나버립니다. 이와 달리 스릴러는 미래에 벌어질, 즉 아직은 벌어지지 않은 사건 또는 인물이 축이 되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형태라 결론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주인공이 처단을 당해버리기도 하고, 사건을 열어놓고 끝내버리기도 하죠. 그런 탓에 스릴러는 쫓고 쫓는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스릴"을 극대화하는 데 노력합니다. "스릴"이라는 감정을 내세운 탓에 스릴러가 현대의 거의 모든 "범죄"관련 이야기를 대표하는 장르 대전제가 된 것도 그래서입니다.
이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바로 이정재가 맡은 레이에게 극의 "스릴"이 맡겨집니다.
왜냐!
바로 레이가 쫓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상으로 볼 때 더욱 확연해집니다. 레이의 추적에 따라, 영화는 소강하기도 하며 들끓기도 하고 결론이 맺어져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남과 레이가 맞딱뜨리는 순간이 감정이 폭발하거나 스릴이 폭발하는 순간이 됩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히려 단순하게 볼수록 재미가 폭발하는 영화입니다. 복잡하게 이게 이래서 어떻고 저게 저래서 어떠하다고 분석하거나 개연성을 따지고 이게 그렇고 저게 그래 하며 늘어놓다 보면 이 영화가 온전하게 가지고 있는 날 것의 재미를 놓치고 맙니다.
레이!
이정재 역할은 가장 원초적인 스릴러 캐릭터인 동시에 쫓는 역할에 본분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위용은 지금껏 한국영화에서 단 한 번도 나타난 적 없는 캐릭터입니다.(시시콜콜 쓰고 싶습니다만) 불필요한 과거 인서트나, 플래시백으로 시퀀스를 먹는 우도 범하지 않습니다. 그의 눈빛이, 거대한 스크린에 걸리는 순간, 스크린을 찢어놓을 기세입니다.
그냥 직진 캐릭터 레이!
반면 황정민이 맡은 인남은 삶이 피곤한 청부업자입니다. 그가 쫓기는 이유, 또는 감정이입을 위해 그에게 할당한 최소한의 플래시백과 인서트는 그래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 쫓기는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악인에게 감정을 이입해 그를 응원하는 사람은, 도덕을 배운 사람인 이상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즉 안타고니스트의 반대편에서 프로타고니스트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한 인물이죠.
관객에게는 그가 살인을 저질러도 눈살을 찌푸리기보다 그럴 수 있어, 라는 감정의 순응이 필요하거든요. 태국의 납치사건은 분명 인남이 살인청부업자임에도 프로타고니스트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죠.
쫓고 쫓기는.
이 둘 사이에서 완연한 장면 전환과 감정 전환을 이뤄낸 조력자 유이는, 영화를 풍부하게 만들고 긴장을 이완하는 멋진 역할을 해냅니다. 나중에 영화를 보고 나면 다른 것 잊고 유이만 기억하시는 분도 계실지 몰라요. 이건 보통 범죄소설에서 나타나는 사건의 타자화 현상 때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유이를 연기한 박정민 배우님은, 향후 충무로를 씹어먹을 배우라는 사실을 이번 영화에서도 확실히 보여주었답니다.
하나 아쉽다면, 스릴러 분야는 전체 관객을 수입으로 환산할 때 (시쳇말로)파이가 크지 않은 분야입니다. 이를 반영하듯 관객의 층도 다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릴러 분야로만 보자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매우 잘 만든 스릴러라 평가하기도 어렵습니다. 더불어 이 영화를 보면 상당히 많은 영화가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기시감 제법 됩니다.
그러나!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각인을 시키고 잔상을 남깁니다. 즉 구조적으로 또는 원안적으로 충실하다, 잘 만들었다, 라는 것과 다른 "영화만이 가진 순기능 하나를" 완벽하게 장착했습니다. 바로 배우의 멋진 연기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신세계]의 "드루와" 장면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발레하는 제니퍼 코넬리의 모습은, 영화가 플롯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이정재의 각인에 더해, 스톱모션으로 느리게 또 빠르게 춤을 추듯 시전하는 황정민과 이정재 두 배우의 액션은, 가히 역대급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 레이가 등장하는 그 압도적인 위용은, 지금껏 보았던 한국 영화에서 배우 등장 중 "갑"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영화 놓치시고 집에서 볼 수도 있겠죠. 그러면 아마도 여러분은 한국 영화 사상 가장 압도적인 등장 하나를 놓치는 걸지도 모릅니다.
대형 스크린. 완벽한 음향. 주변을 가린 검은 어둠. 많게는 사 백명 적게는 몇 십 명에게만 허락된 공간. 이 공간에서 스크린을 찢을 듯 나타나는 이정재의 압도적인 위용, 그것 하나만을 감상하기에도 충분한 영화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자려고 누우면, 이정재의 그 눈빛이 또 생각이 날지도요. 저처럼 말입니다. N차각 나와버리는!
오늘, 극장에서 보지 못하는 영화는, 그 날 그 시대 그 시간이 아니면 즐길 수 없는 인생의 한 점입니다. 그 점을 빼놓지 마시고 극장에서 관람하시기를 추천합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문득 이 분야 종사자로 바라게 됩니다. 추리스릴러 분야로 천만을 뚫는 영화가 나오면 좋겠다.
응당 코로나19 정국과 얼어붙은 경제로 인해 힘들다는 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리얼리티에만 매달려 사는 저에게 하나의 판타지가 생겨나는 것도 좋겠죠. 각종 기록을 깨는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판타지로 말입니다.
추천인 14
댓글 19
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며칠 동안 이정재 배우님 인상이 떠나지 않더라고요. 박정민 배우님 연기도요. ㅎㅎㅎㅎㅎ
전 하드보일드가 달걀 푹 삶아서 딱딱하게 만들듯이 진지하고 비정한 분위기에
폭력 섹슈얼이 가미된 장르를 칭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잘못 알고 있었나 보네요.
씬 시티, 존 윅, 퍼니셔, 영웅본색 같은 작품 스타일이면 하드보일드인 줄 알았습니다.
탐정류의 주인공이 법과 관계없이 악인을 단죄한다 이런게 꼭 들어가야하는 군요.
권선징악은 중요치 않은, 집단과 개인이 맞서는 범죄극이라면 느와르. 영웅본색. 씬 시티. 존윅. 퍼니셔. 넷 모두는 오히려 느와르에 가깝겠네요.
이 중 퍼니셔는 하드보일드로 보아도 무방하겠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레이먼드 소설 대사나 지문 상당수가 대문호의 작품에서 인용한 경우가 많은 데다 적재적소에 쓰거든요. 이것만 따로 연구하는 분도 있는 걸로 압니다. 뒤늦게 알고 보니 대사 한 줄이 셰익스피어 작품 중 한 구절이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레이...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합니다.
제가 다만악에 빠진 이유, 박정민 배우가 사랑스런 이유, 그리고 누구보다도 이정재 배우에 꽂힌 이유를 아주 선명하게 설명해주셨어요. 감사합니다.
다만악 천만의 판타지를 저도 응원합니다. 레이를 스크린에서 못 만나는 분은 진짜 후회하실거에요 ㅎㅎㅎ
다만악...이 잘 되기를 바란답니다. 레이를 스크린에서 못 보시는 분은 맞아요, 후회하실 겁니다.
주말 마무리 잘하십시오.
좋은 리뷰 감사해요 👍👍
주말 잘 쉬십시오. 무엇보다 행복하세요.
늘 익무 감사하답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주말 잘 보내십시오.
소설가님 덕분에 하나 배워갑니다.^^
확실히 영화 보고 난 뒤에 이정재 배우 캐릭터가 가장 각인이 되네요.
박정민 배우의 연기 장면들 다시 보고 싶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