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AN 2020 - 유물의 저주] 간략후기
이번 제2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첫번째 영화로 <유물의 저주>를 보았습니다.
부천 초이스 장편 부문에 초청된 이 호주산 영화는 올 1월 선댄스 영화제에서 첫 공개돼 호평을 받았는데,
하우스 호러의 형식으로 치매라는 현대 가정의 중대한 문제를 섬뜩하고도 가슴 아프게 그려내 인상적이었습니다.
할머니, 어머니, 딸 3대 역할을 맡은 3명의 배우들만이 극 내내 긴장감을 너끈히 만들어 내는 점도 좋았네요.
호주 대도시 멜버른에서 직장을 다니며 살고 있는 케이(에밀리 모티머)는 어느 날
홀로 떨어져 살고 있는 어머니 에드나(로빈 네빈)의 실종 소식을 듣습니다.
최근에도 전화 통화도 하는 등 교류는 했지만 기억을 곧잘 잃는 등 병세로 인해 걱정되던 차에
케이는 실종 소식을 듣고 바로 딸 샘(벨라 히스콧)과 함께 어머니가 살던 집으로 향합니다.
어머니가 사라진 집은 마치 흉가처럼 흔적만 남긴 채 스산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케이와 샘은 경찰과 어머니를 찾는 동시에 집안에 머물며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해 갑니다.
그러던 중 사라졌던 어머니 에드나가 딸과 손녀 앞에 돌아오는데, 수시로 이상한 모습을 보입니다.
어머니의 모습은 이를테면 치매 같은 병으로 인한 것일까요, 악령에 사로잡힘으로 인한 것일까요.
치매라는 질환은 인류가 겪는 여러 병 중에서도 다소 예외적인 취급을 받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의 질환은 환자를 돌보는 이들에게 감동하고 감사해 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헌신을 바라게 되는 반면,
치매는 환자를 돌보는 이들이 겪는 심적 상처가 너무 큰 나머지, 그 불안과 분노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물의 저주>는 호러 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심령 현상이나 폭력이 아닌 이 치매라는 질환을 공포의 중심에 놓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혔다면 퇴마사 같은 전문인력(?)을 고용해 악령을 쫓아내기라도 하면 될 일인데,
생명이 다할 때까지 당사자의 기억을 잠식하는 치매는 그런 일말의 희망마저도 용납하지 않기에 절망적입니다.
그 흔한 점프 스케어 효과 없이, 공포의 순간을 무심코 스치듯, 휙 던지듯 제시하는 영화의 연출 방식은
그렇게 요란하게 덮치지 않고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엄습하는 일상의 공포를 나타내기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단지 '치매'라는 의학적 질환에 대해서만 다루는가 하면 그렇진 않을 겁니다.
나아가 늙어감과 그에 따른 망각이 우리 삶에 불러오는 영향을 말하기도 하는 듯 했습니다.
어머니 에드나가 행방불명 되었다가 돌아온 후, 케이는 멜버른에서 온 전화에 '1~2주 더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좀 더 함께 머무른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쨌든 결과는 떠나는 것일테고,
그 이후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난 후 남겨진 그 커다린 집에 다시 홀로 남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함께였던 사람들이 멀어지고, 그리하여 홀로 남겨지고 잊혀지는 일련의 과정은
분명 우리가 살면서 심심치 않게 마주하는 삶의 쓸쓸한 단면일진대, 영화는 마치 이런 삶의 한 얼굴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비유처럼 집에서 일어나는 공포스러운 현상을 우리에게 오싹하게 제시합니다.
이 집의 역사나 이 현상의 기원 같은, 심령 호러에서 으레 봄직한 배경 설명을 일절 생략하면서도
눈앞에 벌어는 현상과 그 반응에 대해 이해하고 심지어 공감하게 되는 이유가 아마 이런 점 때문일 것입니다.
제목에 담긴 '유물'(원제 'Relic')이 가리키는 게 비단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어머니에게 남긴 큰 집뿐 아니라
홀로 남겨져 망각의 심연로 떠밀려 가는 인간이기도 한 듯해 영화는 이내 서글퍼졌습니다.
오래된 집과 그 안의 부속들이 시간 속에 부식하고 녹이 슬듯, 인간이란 존재도 세월이 지나며
녹슬어 갈 수 있는지. 영화는 슬프게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