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
시계장치 오렌지가 제작 기간에 들어가던 1971년 무렵, 워너 브라더스는 스탠리 큐브릭의 차기작이 아이즈 와이드 셧이 될 것이라고 발표합니다. 그리고 28년이 지나서야 영화는 큐브릭의 유작이 되어 나타납니다.
90년대 중후반 들어 큐브릭은 당시 헐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커플이었던 탐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을 영화에 캐스팅 하여 1년 6개월 동안 촬영장에 밀어 넣었습니다. 불과 20여 년 전 일인데 이제는 보기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큐브릭은 이 영화가 자신의 가장 큰 업적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개성있는 예술가는 남들은 알 필요 없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작품에 넣어두고는 하는데 큐브릭은 그래서 아이즈 와이드 셧이 자랑스러웠나 봅니다. 뉴욕에 사는 상류층 의사가 아내의 성적 고백을 듣고 나서 방황하다가 다시 삶으로 돌아오기까지 단 며칠 사이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스테디캠 촬영과 장면이 음악과 어우러져 정속으로 굴러가는 움직임에서 보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큐브릭의 면모가 들어간 작품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박찬욱도 이 곡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 영화에 갖다 쓰기는 하지만 쇼스타코비치의 두 번째 왈츠 삽입곡은 아이즈 와이드 셧만큼 잘 어울리는 영화가 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큐브릭이 별다른 시각 장치를 더해서 붙이는 수고나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일견 꿈처럼 느껴지는 연출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 실시간으로 스며들게 알 수 있게끔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대가의 영화임을 알 수 있는 연출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치료하던 환자의 딸이 갑작스럽게 보여주는 구애, 길거리 매춘부의 유혹, 의대 시절 친구 피아니스트의 호기심을 부추기는 경험담, 의상점 주인과 딸을 둘러싼 해프닝, 그리고 비밀스러운 대저택에서 일어나는 파티까지, 이 모두가 단 몇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넓은 가장자리에서 벌어지는 사건인 것처럼 어느 순간 느껴지기에 실재하지만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은 한밤에 일어난 헛된 꿈처럼 보이는 일면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아이즈 와이드 셧의 스토리텔링인 셈입니다.
연기자들을 두고 말하자면 니콜 키드먼은 자신의 전 남편보다 표현력이 더 넓은 연기를 하기에 술에 취하거나 약에 취할 때나 이성이 조금씩 마비되어 자신의 본심이 외면으로 드러나는 연기를 할 때 효과를 발합니다. 남편에게 진지한 고백을 하는 장면인데도 반대로 고양이가 앙탈이나 교태를 부리는 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관객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면서 대비가 되는 효과가 크게 다가옵니다. 큐브릭도 이런 접근 방식을 마음에 들어하였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크루즈는 역부족이지만 큐브릭이 두 부부를 캐스팅한 이유는 명백하기 때문에 이 점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조연으로 점찍었던 하비 카이텔과 제니퍼 제이슨 리였는데 두 사람 모두 일정 문제와 감독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영화에서 하차합니다. 두 사람이 평소에 만족스럽지 않은 연기자는 아니었지만 큐브릭은 그 자리를 시드니 폴락과 마리 리처드슨으로 메웁니다. 폴락은 대부분 크루즈와 대면하는 장면에서 나오지만 크루즈보다 더 이완 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 이전에 뛰어난 영화연출자였습니다. 한국에서 영화 비평을 하는 사람들은 유독 시드니 폴락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연기는 물론이고 영화감독으로서도 자신의 성취를 남긴 분이었음을 더는 외면하거나 모른 척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스웨덴 연기자 마리 리처드슨은 몇 장면 나오지도 않지만 렌즈가 그를 잡을 때마다 화면을 말 그대로 장악하시는데 연극 무대에서 갈고 닦은 깊은 연기력이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분이 영화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장면들을 큰 화면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큐브릭에게 짙은 영향을 받았으며 훗날 자기 대표작에 큐브릭 영화에 나온 장면 하나를 그대로 가져다 쓰기도 했던 신예였습니다. 당시 촬영장을 방문해서 탐 크루즈를 만났는데 그래서 매그놀리아에 캐스팅을 할 수 있었습니다. 큐브릭이 남긴 이전작들 만큼은 아니지만 남은 이야기들이 많고 상영관에서 한 번 볼 만한 작품임은 틀림 없습니다. 니콜 키드먼이 육체를 드러낸 영화는 몇 있지만 아름다우며 뇌쇄인 자태를 이토록 잘 보여준 작품은 없었습니다. 영화가 영감을 받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원작 꿈의 노벨레도 관심 있다면 읽어 보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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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내에 영화관에서 볼 계획인데, 기대가 잔뜩입니다.
이전에 케이블로 잠시 스치듯 몇몇씬을 본게 전부이네요.
니콜 키드먼은 외모도 연기도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제가 큐브릭 영화를 보는 방법 :
나중에 터득한 방법인데, 머리를 최대한 쓰지 않고 최대한 마음으로만 봅니다.
그러면... 큐브릭 이 분이 얼마나 진실한 사람인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얼마나 깊은지가
정말로 가슴시리도록 절절하게 느껴지더라구요.
눈물이 철철 흐르고, 그러다 못해 눈을 질끈 감게 될 정도로.
이 영화가 그런 면에서 거의 최고봉이고, 예전 영화들도 전혀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언뜻 전혀 이질적인 것 같은 큐브릭과 스필버그가 서로 매우 친하기도 하고, 종종 같이 언급되는 이유가
이해가 돼요. 많은 면에서 비슷하거든요.
톰 크루즈가 큐브릭을 평가해 달라는 질문에 큐브릭은 '사랑'입니다. 라고 했었는데
이런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이율배반적인 이 영화의 제목도 그런 면과 일맥상통하고,
개인적으로 최고의 영화제목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흥미로운 글 잘 봤습니다.
나이 드니 좀 이해가 되는 영화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