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미의 관심사] 간략후기
익무의 은혜에 힘입어 영화 <초미의 관심사>를 특별 상영회를 통해 보았습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오픈 시네마 부문에서 첫 공개된 남연우 감독의 이 영화는
최근 시국 상황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 분위기가 좋지 않은 '이태원'을 극의 핵심 무대로 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정대로 개봉이라는 정면 돌파를 택한 영화의 용기가 꽤 대단하게 다가왔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 영화가 이태원에서 '놀아 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태원에서 '살아 본'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릴적부터 나고 자란 이태원에서 지금은 '블루'라는 예명으로 가수 활동을 하고 있는 순덕(김은영))에게
어느날 성격이 너무 안맞아 떨어져 살던 엄마(조민수)가 갑작스럽게 들이닥칩니다.
순덕과 함께 살던 막내딸 유리가 엄마의 가겟세를 들고 튀었으니 함께 잡으러 가자는 것.
순덕은 엄마와 또 엮이는 게 싫었지만 이내 유리가 자신의 목돈까지 같이 들고 튀었다는 걸 알고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엄마와 함께 이태원을 누비며 유리를 수소문하기 시작합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시한폭탄 같은 도발지향적 캐릭터의 엄마와 그런 엄마를 수시로 통제해야만 하는
방어지향적 딸이 동행하면서 예상치 못한 상황과 사람들이 도처에 나타납니다.
영화는 '예측불허 추격전'을 지향한다지만, 극의 무게는 '추격전'보다 '예측불허'에 실려 있습니다.
엄마와 순덕이 '초미의 관심사'로 삼는 막내딸 유리의 행방은 사실 맥거핀에 가까운 느낌이고,
정작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이 이태원에서 만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입니다.
엄마와 순덕이 이태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는데'거나 '그럴 줄 몰랐는데', 둘 중 하나입니다.
순덕을 숭배하다시피 하는 이웃집 청년, 엄마와 순덕이 이태원 살 적에 어울리던 이웃,
유리가 일했다는 가게의 사장님과 직원, 유리와 얽혀 있다는 심상치 않은 청년 등
엄마와 순덕이 이태원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첫인상과 다른 속내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녀는 그렇게 저마다의 이야기를 지닌 제3자들을 연이어 만난 끝에 각자의 이야기를 지닌 서로와 마주합니다.
막내딸이 그 돈을 들고 어디로 튀었는지, 어디로 가서 뭘 했는지 밝혀내기 이전에
모녀가 발견하는 더 소중한 것은 서로가 그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사람이어왔는지 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늦깎이 성장'의 배경으로 이태원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모녀가 만나는 사람들의 면면처럼 이태원은 워낙 다양한 곳에서 모인 다양한 처지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이태원 구석구석은 이태원에 가봤다면 누구라도 알아볼 만큼 익숙한 듯 하면서도 낯섭니다.
지역, 인종, 성적 지향 등 천차만별의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형성해 온 곳인 만큼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너는 너, 나는 나'라는 태도를 몸에 익혀 왔을 것이고, 엄마와 순덕 또한 그러했겠죠.
겉으로 보기에 이런 태도는 엄마와 순덕의 관계처럼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는 듯 보였지만,
'가족'이라는 이름과 만나며 오히려 예상치 못한 효과를 낳습니다. 서로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죠.
'너는 너, 나는 나'이니 터치하지 말라는 틱틱거림은 곧 서로의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존중으로 치환됩니다.
건드리고 간섭하지 않는, 존재하고 작동하는 그대로 상대방의 삶을 바라보는 이런 태도는
이태원이라는 독특한 개성의 공동체 사회에서 감독이 발견한 새로운 신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확장되는 다양성 속에서 흩어지는 개인들을 잡아주는, 말하자면 '개인주의적 가족주의'랄까요.
티격태격하는 모녀가 서로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과정이 신선하게 다가오진 않지만,
엄마 역의 조민수 배우와 딸 순덕 역의 김은영 배우가 익숙하면서도 생생한 관계를 그려내 극을 이끕니다.
오랜만에 코미디 연기를 선보이는 조민수 배우는 걸핏하면 입에서 욕이 자동으로 나오고 손으로 뭘 쥐어뜯으려는
다혈질 엄마의 모습을 자칫 피곤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도 밉지 않고 정감가게 그려냅니다.
이런 엄마의 모습에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것은 그를 침착하게 잡아주는 순덕의 캐릭터가 있기 때문이겠죠.
가수 '치타'로 잘 알려진 김은영 배우는 연기 데뷔작인 이 영화에서 힘 빼고 담백하게 일상 연기를 보여줍니다.
차분함과 시니컬함 사이를 오가다가도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에서도 기대 이상으로 자연스럽게
연기 톤에 변화를 주는 데 성공하며, 본인의 캐릭터와도 상대역인 조민수 배우와도 조화로운 연기를 해냈습니다.
'이정복'이라는 엄연한 한국 이름을 지닌 순덕 이웃 청년 역의 테리스 브라운도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최근 시국으로 인해 이태원이라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꽤 조심스럽게 되었지만
영화 <초미의 관심사>가 그리는 이태원은 미디어나 대중이 그동안 이태원에 씌웠던,
유흥과 자본이 주는 쾌감이라는 허물을 벗기고 그 안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진짜 낯을 보여주니다.
번화가부터 산등성이를 방불케 하는 오르막길까지 얽히고 섥힌 길이 마치 핏줄인 양,
그 핏줄을 흐르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인사하고 교류하고 이해하는 모습은
화려한 파티의 공간이 아니라 그처럼 생동하는 공기가 있기에 사람들이 다시 이태원을 찾을 것임을 기대케 합니다.
+ 영화를 본 사운즈 한남 오르페오는 국내 최초의 프리미엄 사운드 시어터라고 합니다.
마치 아늑한 응접실을 연상케 하는, 이태원 언덕배기를 외경으로 둔 로비부터 매력적입니다.
30석 남짓 되는 극히 적은 수의 좌석을 폭 감싸 안는 듯한 입체적인 사운드가 인상적이었는데,
그래서 음향 연출이 잘 된 영화를 보기에 적합해 보이고 <초미의 관심사>도 노래 장면이 많아 즐기기 좋았습니다.
자원 보호를 위해 종이 티켓이 아닌 고임목 형상의 나무 티켓을 입장할 때 건네주고, 퇴장 시 반납해야 합니다.
모든 좌석에는 생수가 비치되어 있고, 현재는 좌우앞뒤를 비우는 식으로 거리두기 좌석 배치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익무 덕에 특별한 곳에서 좋은 영화 잘 보았습니다.
추천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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