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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간략후기

jimm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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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프랑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았습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이 연출하고 아델 하에넬, 노에미 멜랑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작년 칸 영화제 최초 공개 후
전세계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유수 매체들의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 단골로 들어가는 영화가 되었는데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올해 저에게도 첫번째 베스트 영화로 꼽힐 듯 합니다.
인간에 대한 신중하고 예의 있는 접근, 상대방을 바라보되 나의 존재를 끝까지 지키는 주체적인 감정,
대상이길 거부하는 여성과 대상화를 깨부수는 예술의 이야기로 한 순간도 아름답지 않은 컷이 없는 영화입니다.
 
시대가 불분명한 프랑스,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낯선 이탈리아 남자와의 결혼을 기다리고 있는
귀족 집안의 딸 엘로이즈(아델 하에넬)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가 살고 있는 외딴 섬의 저택에 당도합니다.
수녀원에 있던 엘로이즈는 거의 끌려나오다시피 맞닥뜨리게 된 낯선 남자와의 결혼이 내킬리 없습니다.
그 남자에게 보낼 당신의 초상화를 그리겠노라고 엘로이즈에게 직접 밝힌다면 협조를 받지 못할 게 자명하기에,
엘로이즈의 어머니인 백작 부인(발레리아 골리노)은 산책 친구로 접근해 그가 모르게 초상화를 그리라 합니다.
그렇게 마리안느는 엘로이즈가 모르게 그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마리안느에게서 엘로이즈로만 향하던 일방적인 시선이 점차 쌍방으로 향하게 되면서 뜻밖의 감정이 싹틉니다.
이렇듯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림 그리기라는 예술의 행위, 바라보기라는 소통의 행위를 통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생기는 평등한 교감, 어느 쪽도 대상이나 희생양이 되지 않는 사랑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영화는 먼저 미술의 한 종류로 당연히 여겨지던 '초상화'가 다소 착취적으로 쓰여진 시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때는 얼굴도 모르는 정혼자에게 나를 '이런 사람'이라고 소개하기 위해 여성의 초상화를 그려 보내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목적을 띤 초상화는 당연히 낯선 남자가 처음 봐도 바로 결혼을 결심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워야 했을 것이고,
그런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데 그 주인공인 여성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들여다 보는 건 중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안느도 처음엔 그런 과업을 안고 엘로이즈가 사는 저택에 당도했을테지만,
자신의 본디 모습을 담지 않은 그림을 거부하는 만큼 일방적 대상화 또한 거부하는 엘로이즈와의 교감 속에서
마리안느 또한 강요된 사랑의 형태, 익숙해진 예술의 형태로부터 벗어나겠노라는 깨달음을 얻어 갑니다.
상대방을 탐닉하거나 착취하거나 소비하지 않는, 마침내 존중하게 되는 '시선의 성장'을 겪게 됩니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은 그러한 깨달음과 성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귀한 의미를 얻습니다.
 
'시선'이란 때로 보내는 사람의 자의에 의해 받는 사람이 평가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권력이 되기도 합니다.
영화는 굳이 시대상을 속속들이 보여주지 않아도 그런 '시선의 권력'이 횡행했던 시대를 능히 예감케 합니다.
만나고 바라보고 소통하면서 사람의 진짜 감정, 진짜 모습을 알아가는 건 중요치 않았고
자신이 속한 가문이나 사회 같은 공동체를 지켜가거나 더 키워나가는 수단으로서 결혼을 '써 먹을' 뿐이었던,
그렇게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오가며 거의 사람이 팔려가다시피 하는 세상에서 사랑은 중요치 않았고
여인의 초상은 그의 마음에 다가가려는 관문이기보다 평가하고 자랑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던 시대.
이런 시대 속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시선을 상대방을 향한 권력에서 사랑으로 진보시킵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단지 성적 교감에 머물지 않고 같은 성을 지닌 사람들 간의 연대까지 아우르는 개념이 됩니다.
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선이 아닌, 시대에 산재해 있는 부조리와 고통을 목격하고 기억하기 위한 시선으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그리고 그들의 시중을 드는 소피(루아나 바야미)까지 여인들은 연대합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중요한 모티브로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영웅인 오르페우스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해내기 위해 오르페우스는 명계(저승)로 향하고 우여곡절 끝에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지상으로 향하지만, '지상으로 나갈 때까지 뒤돌아 보면 안된다'며 명계의 왕인 하데스가 내건
조건을 어기고 결국 뒤돌아 보고 말았고 그 결과 에우리디케가 명계로 다시 끌려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소피가 이 이야기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영화의 결말부에 이르러 이 이야기와 유사한 장면이 인물들을 둘러싸고 펼쳐지기도 합니다.
결국 영화는 오르페우스가 행했고 영화 속 여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이 '돌아보기'라는 행위를 통해
마주보지 않을 때 확인되지 않지만 영속될 수 있고 마주보는 순간 확인되지만 금방 사라지고 마는,
두 여인의 사랑이 지닌 아이러니한 진실을 이야기하려 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나를 보지 않을 때의 무의식적 행동과 표정으로 서로를 알아가며 서로가 모르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그들은,
결국 시대와 제도와 통념이 인정하지 않을 사랑이기에 확인된 순간 금방 사라질 것임을 예감할지언정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이었음을 확인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결행하게 됩니다.
이것은 '두 여인의 사랑'이라는 특별한 교감이 완성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시대와 제도와 통념에 의해서도 재단되지 않은 인간과 인간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를 대상으로 삼기를, 서로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고 사랑을 나누기에
영화 또한 두 사람의 사랑을 시청각적으로 탐닉하지 않고 무척 신중하고 절제 어린 태도로 접근합니다.
매 장면에서 두 사람의 교감은 고귀하게 다뤄지고 그래서 불편한 장면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지닌 이런 태도는 곧 두 여인이 사랑을 그리고 자아를 완성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목구비와 얼굴과 몸을 흩뿌려 놓고 짜맞추어 서로의 초상을 완성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다같이 호흡하고 움직일 때 만들어지는 오직 그 사람만의 존귀한 초상을 발견하는 것.
그래서 나에 의해 관찰되는 대상으로서의 그 사람이 아닌 '그저 그 사람'을 찾아내는 것.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보고 교류하며 그를 알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억압하는 그 모든 것을 깨뜨리고 예술을 따라 서로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두 여성이 가르쳐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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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image 2등
매번 짐마니님 글에 감탄하지만 이번 후기가 특히 인상적이네요 ㅎㅎ 시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말씀해주신 부분들 곱씹으며 영화 관람해야겠어요
15:38
20.01.18.
jimmani 작성자
2작사
감사합니다 ㅎㅎ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글도 더 잘 써지는 것 같습니다.^^
17:47
20.01.18.
jimmani 작성자
백제침류왕
부족한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17:47
20.01.18.
jimmani 작성자
용산요정호냐냐
두 번 볼 만한 영화죠.^^
17:47
20.01.18.
profile image

1770년 18세기 후반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전 시기가 시대적 배경이더라구요.:)

고급진 리뷰 잘 읽고 갑니다.

17:49
20.01.18.
jimmani 작성자
쥬쥬짱
써주신 댓글 보니 이동진 평론가 라이브톡에서 그 얘기가 나왔던 게 이제 생각 나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18:13
20.01.18.
jimmani 작성자
리하
감사합니다^^ 포스터 예쁘더라구요 ㅎㅎ
21:53
20.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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