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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리키] 간략후기

jimmani
2740 8 21

'블루칼라의 시인'이라 불리는 영국의 거장 감독 켄 로치의 신작 <미안해요, 리키>를 프리미어로 미리 보았습니다.
실직자의 이야기를 그렸던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이어 한창 일하는 중인 노동자 계층 가족의 고충을
리얼리즘적 시선으로 들여다 보는 이 영화는 전작에 이어 부조리한 사회를 향한 분노와
그 사회 안에서 희생당하는 작은 개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를 화나게 하고 눈물짓게 합니다.
마치 지금도 영국 어딘가에서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가족의 일상은
곧 한국의 여느 가족들 모습과도 다르지 않아서, 그 호소력은 대륙을 넘어 우리 가슴에도 짙게 남습니다.
 
건설 회사에서 실직한 후 안해 본 일 없이 직장은 전전해 온 4인 가족의 가장 리키(크리스 허친)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개인가맹주'로 취급되는 택배 기사로 취직합니다.
택배 회사 직원은 '당신은 피고용인이 아닌 개인가맹주다, 고용되는 게 아니라 합류하는 거다'라고 강조하는데,
여기서 리키가 기대한 건 '회사의 안정된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내 노동력과 시간을 운용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으니 회사는 보장하고 책임지는 것 없이 실적에 대한 강요만 보여줄 뿐이고,
'내가 원하면 언제든 일할 수 있다'는 표현은 '회사가 원하면 언제라도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곡해됩니다.
회사가 그렇게 강조하던 '개인가맹주'라는 개념은 당신의 자율권을 보장해 주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난처한 일이 생기면 당신이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임을 알게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20여년 간 호흡을 맞춰 온 켄 로치 감독과 폴 래버티 작가는 영국 어느 택배 회사의 실제 운영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온 것만 같은 디테일한 배경 묘사, 영국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얼굴을 한
낯선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실제 상황이라고 해도 믿을 리키네 가족의 이야기로 관객을 데려다 놓습니다.
 
택배라는 일이 신속 정확한 배송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리키도 이를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고객이 원하는 시간에 정확하게 배송해야 하는 유형의 배송을 다닐 땐 숨이 달아나도록 뛰기도 하고,
업계에서 '총'이라 부르는 택배 등록 및 추적 장비는 차량 밖에 나와 있는 시간이 2분을 넘어가면 알람을 울립니다.
리키는 많은 돈을 벌어서 더 좋은 아빠가 되려고 이 일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리키가 신속 정확 배송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순간 정작 자신의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따뜻했던 아빠로서 그의 얼굴에는 예민함에서 비롯된 요동치는 감정들이 자리잡게 되었고,
토끼처럼 예쁘게 커주기만을 바랐던 아이들은 웃음을 잃은 채 과거의 아빠, 과거의 가족을 갈망하게 되었고,
단란하게 앉아 웃음꽃 피는 저녁식사를 나누던 가족은 흩어져 저마다의 고통 속에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다운 삶을 살아보자고 시작한 일이 오히려 그들에게서 사람다운 삶을 빼앗아가는 풍경은,
노동과 계급이란 개념이 생긴 이래 어디에나 존재해 왔던 것이라 보는 누구라도 아픈 마음을 감출 수 없게 됩니다.
 
힘든 건 비단 리키 뿐만이 아닙니다. 사회복지사로 만나는 환자들 한명한명 진심으로 다가가 일해 왔건만
그 진심 때문에 오히려 일도 가정도 놓칠 수 없는 난처한 상황이 되어 숨죽여 눈물짓는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
지금을 만끽하고 싶지만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안간힘 쓰는 부모가 원망스러운 아들 셉(리스 스톤),
화목했던 예전의 가족으로 돌아가고 싶어 엇나가는 가족들을 바로잡으려 애쓰는 딸 라이자(케이티 프록터)까지
가족 구성원 저마다가 자기만의 힘겨운 생을 어렵게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이들이 꿈꾸는 이 모든 것들을 놓아버린다는 게 몹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사람이라면 능히 짐작할테지만,
인간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사회는 이러한 꿈들 중 무언가는 포기해야 한다고 종용합니다.
비정상적인 노동 시스템으로 인해 가족이 내몰리고 신음하게 되어 일을 쉬는 와중에도,
회사는 그가 괜찮은가 묻기 이전에 그가 떠안게 될 벌점과 빚, 회사가 떠안게 될 손해를 먼저 추궁합니다.
흔히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소시오패스'라고 일컫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사회 자체가 소시오패스처럼 되고 맙니다.
 
이런 시대의 비극 앞에서 켄 로치 감독은 한번도 노동자의 편을 벗어난 적 없는 어른의 시선으로 호소합니다.
놓쳐서 미안한 것은 택배 배송 타이밍 이전에 점점 더 초라해져만 가는 우리의 존엄이어야 한다고,
추적해야 할 것은 내 택배의 배송 상태 이전에 그렇게 초라해져 언제 흩어질지 모를 우리의 인간다움이어야 한다고.
영화는 리키와 가족들에게 다가오는 갖은 위기 상황들로 보는 이에게 적잖은 갯수의 고구마를 먹이지만,
그 사이사이 찰나처럼 지나가는 가족들의 단란한 시간들은 작지만 선명한 광채를 뿜어내며
이 절망 속에서도 우리가 지켜야 할 사람다운 삶에 대해 뜨겁게 각성시킵니다.
 
<미안해요, 리키>의 원제인 '쏘리 위 미스드 유(Sorry We Missed You)'는 택배 배달 시 수령 고객이 부재중이면
택배사에서 남기는 메모의 글귀로 '부재중이시네요, 왔더니 안계셔서 아쉽네요' 같은 의미입니다.
어떤 날은 리키가 집주인이 부재중인 어떤 집에 택배 배송을 갔다가 집에 있는 개에 물려 옷이 망가지기도 하는데,
이 날 마침 리키의 일을 따라온 딸 라이자는 리키가 남기는 이 'Sorry We Missed You' 메모에
'아빠 속옷 새로 사주세요'라며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이 한 마디는 곧 감독이 건네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할 겁니다.
세상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또 다른 '리키'가 말리는 걸 기어코 뿌리치며 눈물 젖은 핸들을 붙잡고는
아득한 노동의 고통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대도 부디 그로부터 시선을 떼지 말아달라는,
사라지거나 놓치지 않도록 훗날 우리의 모습이 될지도 모를 그를 지켜봐 달라는 당부를 남기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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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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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침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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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후기 감사합니다!
엔딩이 계속 생각나는 영화 같습니다
22:05
19.12.15.
jimmani 작성자
얼죽아
그 표정이 참 먹먹하게 하네요.^^
22:06
19.12.15.
profile image 2등
글 잘 봤습니다. 늘 좋은 리뷰 감사드려요.^^
22:22
19.12.15.
jimmani 작성자
golgo
부족한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22:35
19.12.15.
3등
켄 로치 감독님 영화는 꼭 챙겨보는데 이번 아티스트 배지도 넘 예뻐서 개봉하면 바로 보려고 합니다. 영화 보고 난 후 천천히 읽어볼게요~~
22:23
19.12.15.
jimmani 작성자
빛나
감사합니다. 영화 무척 만족하실 겁니다.^^
22:35
19.12.15.
다가오는 주말에 보려고 기대하는 영화였는데 후기를 보니까 더욱 보고싶어지네요
22:30
19.12.15.
jimmani 작성자
안녕갑세요
놓치면 곤란할 영화일 것 같습니다.^^
22:35
19.12.15.
jimmani 작성자
백제침류왕
오... 선뜻 생각이 안나는데 어떤 장면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을까요?
22:52
19.12.15.
profile image
jimmani
악 지금 제 폰이 이상해서 ㅠ 댓글이 잘못 달렸어요.ㅠ 죄송합니다
22:54
19.12.15.
jimmani 작성자
그리움의시작
마지막 장면이 눈에 참 밟히더군요 ㅠ
23:32
19.12.15.
profile image

부산에서 봤었는데 참 좋았던 영화였습니다. 제목은 그냥 부국제처럼 <쏘리 위 미스드 유> 원제 쓰는게 훨 나은거 같은데 그부분은 좀 아쉬웠어요

23:11
19.12.15.
jimmani 작성자
미스터알렉스
원 제목도 의미하는 바가 참 큰데 이걸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쓰기도 망설여지게 되고 수입사가 고민이 많았을 듯 합니다 ㅎㅎ
23:34
19.12.15.
후기 감사드려요. 이런 좋은 영화가 한국영화에도 많이 나왔어야 하는데, 다들 장삿속 영화들이 판을 치니 아쉽네요
23:41
19.12.15.
jimmani 작성자
에헤라디비어
켄 로치 같은 영화 장인들이 우리나라에도 있다면 참 좋겠다 싶었습니다 ㅎㅎ
00:10
19.12.16.
후기 감사합니다 일정이 있어 고민했는데 봐야겠네요
04:02
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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