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브스 아웃' 초간단 리뷰
1. 정부가 미디어를 활용해 대중을 속이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먼저 제한된 정보만 공급해 대중을 선동하는 방법이 있고 필요 이상의 과도한 정보를 공급해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방법이 있다. 둘 중 어느 방법이 더 효과적인지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갈라질 수 있지만 내 경우에는 후자가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정보가 제한돼있다면 사람들은 정보의 통제를 의식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알고자 하는 욕망'은 본능에 가깝기 때문에 정보의 차단은 저항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이와 반대로 과도한 정보를 준다면 사람들은 그 정도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게 된다. 모든 정보가 의미를 가진 것처럼 다가올 수 있고 그 안에서 이해와 해석은 난해해지기 마련이다.
2. '추리영화의 공식'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한 해에 '비뚤어진 집'과 '나이브스 아웃'을 만나고 나니 그것의 공식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정보의 과다'에 있다. '비뚤어진 집'은 대부호 애리스터드의 사망 사건이 발생하고 소피아(스테파니 마티니)와 친분이 있는 탐정 찰스(맥스 아이언스)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집을 방문한다. 이 집의 식구들은 기이하게 뒤틀려있고 서로 간에 불화가 있다. 이 뒤틀림은 등장 캐릭터 모두를 용의선상에 올려놓도록 만든다. "모두가 범인일 수 있다"는 전제는 한 사람을 범인으로 특정하기 어렵도록 방해한다. 이것은 대단히 고전적인 방식이다. 재작년 개봉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살인'도 "모두가 범인일 수 있다"는 전제를 깔아두고 범인 찾기에 나선다.
3. '나이브스 아웃' 역시 이런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베스트셀러 작가 할란(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죽음 후 경찰과 탐정 블랑(다니엘 크레이그)이 가족들을 인터뷰할 때 모두가 범인인 것처럼 의심스럽게 군다. 그런데 '나이브스 아웃'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플래시백으로 관객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이 정보는 가족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근거로 영화 속 형사들과 블랑은 알지 못하는 내용이다. 심지어 영화 중반도 되기 전에 관객에게 사건의 전말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역시 이 정보는 블랑이나 형사들은 알지 못한다(짐작은 할 수 있을지도). 즉 이 사건에서 관객들은 형사나 탐정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이야기를 쫓아가게 된다.
4. 당연히 관객은 "범인은 저 사람인데 어떻게 뒤집을 셈이지?"라며 이야기를 쫓아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범인을 공개해도 뒤가 궁금한 추리극이 돼버린 셈이다. 그리고 범인을 공개해놓고서도 반전을 만든다. 이것은 고전 추리극보다 더 진화한 형태이며 관객을 직접적으로 이야기에 개입시켜 재미를 준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도 추리를 진행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가진 정보가 이 이야기의 전부인가?"라는 의심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할란의 대사에서도 등장한다.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어. 진실의 일부만 이야기하면 돼". 이 대사는 '나이브스 아웃'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이기도 하다. 물론 이같은 방식이 완전히 새롭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고전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 재주는 높이 살 만 하다.
5. '나이브스 아웃'은 거창하게 시작하지만 실상은 꽤 아기자기한 편이다. 특히 헐리우드 영화에서 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권선징악' 메시지가 등장해 '고전의 향기'를 배가시킨다. 게다가 이 영화는 거창한 것을 하려는 욕심이 없다. 스케일을 키울 생각도 없고(집의 스케일이 제일 크다) '오리엔트 특급살인'처럼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먼 거리에서 찍어서 거창한 느낌을 줄 생각도 없다. 장소 이동도 최소화 해 이야기의 확장성을 막는다. 철저하게 폐쇄공간 안에서 아기자기하게 이야기를 채우는데 집중하고 있다. 이것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배우들의 이름값도 중요했다.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인물로 이야기를 꾸릴 수록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중요하다. 대체로 만족스러웠지만 캐릭터와 안 어울리는 배우가 하나 있었다(스포일러라 말하진 않겠다). 뒤늦게 생각해보면 그 안어울림 또한 의도된 것이 아닌가 싶다.
6. 결론: 더 거창하게 '이민자를 향한 미국의 위선'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위선'이 아니라 대놓고 억압하는 시대에서는 부적절해보였다. 정치적으로 건드리면 피할 수 있는 영화는 몇 개 없다. '나이브스 아웃'도 그게 가능하겠지만 하진 않겠다. 관객에게 게임을 거는 방식은 마음에 들어서 그 이야기만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나이브스 아웃'은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체험'하게 만드는 영화다.
추신) 이 영화에는 '오늘의 스타'(다니엘 크레이그, 크리스 에반스)와 '내일의 스타'(제이든 리버허, 아나 디 아르마스), '어제의 스타'(돈 존슨, 제이미 리 커티스, 크리스토퍼 플러머) 등 세대별로 잘 나갔던(잘 나갈) 배우들이 등장한다. 이 구성, 대단히 황홀하다.
추천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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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 캐릭터 비중이 주연급으로 높을 줄 몰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