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시맨' 후기 - 존재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21세기 궁극의 '시네마'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아이리시맨> 보고 왔습니다.
관람 전에는 3시간 30분이라는 어마어마한 러닝타임이 부담으로 느껴졌어요. 아무리 마틴 스콜세지라도 굳이 장편 영화에 그런 긴 시간을 쓸 필요가 있을까 싶었죠.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왜 이렇게 길어야 했는지 납득을 할 수 있었네요. 오히려 반드시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편으로 나누어서 공개를 했다면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었음을 확신하기도 했어요. <아이리시맨>은 이렇게 긴 시간동안, 과거의 빛나는 순간을 함께 했던 거장들과 다시 모여 한땀한땀 공들여 만든 장인의 영화입니다. 또한, 영화 안의 모든 요소, 심지어 러닝타임마저도 주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세심하게 조정하며 하나의 리듬으로 완성한 진정한 '시네마'입니다. 자신의 전 인생을 한 분야에 쏟아넣은 마스터가 최후의 걸작을 써내려가는 것을 목도하는 느낌이었어요. 전율과 흥분으로 가득찬 3시간 30분이었네요 :)
<아이리시맨>은 시놉시스만 보면 현재까지도 미제 사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 중 하나인 지미 호파 실종사건에 대해 다루는 것 같이 보여요. 그런데 사실 지미 호파는 영화 중반부부터 등장하고, 실상은 지미 호파를 살해했다고 자백한 프랭크 시런이라는 자의 일생을 따라가는 작품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태도는 이 흥미로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당시 '대통령 다음으로 가장 유명했던' 인물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충격적인 스캔들마저 단지 과거 한 시절의 이야깃거리로 전락하는 모습을 천천히 보여주면서, 찬란했던 시절 모두 한 때 뿐이라는 것을 묘사하는 데에 집중합니다. 또한, 영화는 등장하는 대부분의 캐릭터가 어떻게 죽었는지 짤막히 자막으로 묘사하며, 한 시대를 나름의 가치를 지키면서 살아온 그 모든 인생이 시간이 지나서 보면 한낱 먼지와 같이 허무하게 느껴지도록 합니다. 그야말로 커리어의 끝자락에 선 노년의 거장만이 건넬 수 있는, 인생에 대한 깊은 고찰이 담겨있는 작품입니다. 한창 <택시 드라이버> 등으로 주가를 띄우고 있던 그 찬란했던 70년대를 이젠 '과거'라는 시선으로 반추하며, 수십년이 흐른 현재에 이런 작품을 내놓을 수 있는 그의 뚝심이 다시 한번 놀랍습니다.
이 영화의 정수는 마틴 스콜세지가 참으로 오랜만에 그의 페르소나 중 하나인 로버트 드니로뿐만 아니라, 70년대~80년대를 주름잡던 배우인 알 파치노, 조 페시, 하비 케이틀과 뭉쳤다는 것입니다. 마치 노장은 결코 죽지 않고 다시 불타오를 수 있음을 세상에 천명하는 듯, 긴 시간 동안 차근차근 만들어진 그들의 아우라는 러닝타임 내내 관객을 압도합니다. 굳이 대놓고 드러내지 않아도 눈빛 하나로 감정을 표현하는 연륜의 연기를 보면, 왜 이 배우들이 지금까지도 명백히 '전설'로 남아있는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습니다. 타이틀롤을 맡은 로버트 드니로는, 21세기 들어 다소 아쉬웠던 커리어에 아주 중요한 변곡점을 찍습니다. 설사 무자비한 폭력이 필요하다 해도 신뢰의 가치를 지키며 삶을 지탱해 온 인물의 일생에 따라오는 복합적인 감정을 놀랍도록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그 가치를 저버려야 할 상황에 왔을 때의 미세한 떨림을 표현하는 연기에 그저 감탄할 수 밖에 없었네요. 알 파치노 역시 '좋은 영화'에 출연한지 꽤 오래되었는데 이 영화로 전설적인 경력의 후반부에 중요한 작품을 하나 남기는 데에 성공합니다. 알 파치노 개인도 정말 물 만난 고기를 만난 듯 파워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개인적으로 올해의 남우조연 연기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대부>의 냉철한 카리스마와 <히트>의 뜨거운 열정이 만난 듯하여, 실제 지미 호파와는 얼마나 닮았는지 차치하더라도 정말 배우와 잘 어울리는 연기였습니다. 영화계에서 은퇴했던 조 페시 역시 이 영화로 아주 잠깐 돌아왔는데, 왜 스콜세지와 드니로가 삼고초려 끝에 페시를 데려와야 했는지 너무나도 설득력 있는 연기로 보여주었습니다. 항상 <나홀로 집에>의 바보 같은 도둑으로 기억되었던 조 페시이지만, 이젠 그 씁쓸한 표정으로 자기가 잡고 있던 시대를 놓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될 것 같네요. 등장하지 않는 떄에도 계속 생각나게 하는 명품 연기였습니다.
비단 연기 뿐만 아니라 영화를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가 걸작입니다. 전작에 이어 함께한 로드리고 프리에토의 촬영은 6~70년대의 뜨거운 공기, 그리고 세월이 지나며 그 모든 것이 희미해진 공허함을 화면 안에 담아내는 데에 성공합니다. 테이크를 길게 가져가면서도 긴장감을 주는 스콜세지의 연출이 프리에토의 놀라운 촬영과 만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스콜세지와 오랜 파트너십을 맺어온 로비 로버트슨의 음악도 좋았습니다. 특히 타악기와 현악기가 짙게 깔리며 부조화스러운 조화를 이루는 메인 테마는 정말 환상적이었네요. 3시간 30분이라는 야심작을 하나의 감정선으로 묶어서 풀어낸 스티븐 자일리언의 각본도 어마어마했구요. 이런 명품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어서 너무나도 행복했네요. 올해 최고의 영화적 체험이었습니다. <아이리시맨>이야말로, 영화팬들이 존재 자체에 대해 감사해야할 21세기 궁극의 '시네마'가 아닐까 싶네요. 조만간 2회차 하러 가야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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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안봤는데 인생영화라고 하시는 분들이 종종 보이네요..글 잘읽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인생무상 허무함 씁쓸함을 느꼈는데 누구나 결국엔 죽을 날이 올거고 하니 정말 악하게 살면 안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것도 대단한 감독님이시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을 경험하고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낼 수 있는 영화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요즘 아무래도 좀 침체기를 겪던 알 파치노가 [원어할]에도 나오고 [아이리시맨]에 출연하며 점점 위상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길고 거대한 산맥을 마주한 느낌이었습니다.
역시 재밌는 영화는 시간이 문제가 안되는구나 싶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