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 대 페라리 (Ford v Ferrari, 2019) (스포)
<포드 대 페라리>는 60년대 르망 레이싱의 강자 페라리를 후발 주자 포드가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다. 이는 전형적인 언더독 서사로 보인다. 또한 가장 미국적인 기업 포드의 승리를 다루며 미국의 위대함을 예찬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영화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전작 <로건>에서 트럼프 당선 이후의 미국을 근심하던 제임스 맨골드는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포드의 중역들은 오히려 주인공들을 방해하는 안타고니스트에 가깝게 묘사된다. 오히려 영화는 두 기업 간의 전쟁 속의 캐롤 셸비와 켄 마일즈, 두 남자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포드 대 페라리>라는 제목을 쓰는 것일까?
영화 속에서 대량생산과 성과주의로 대변되는 포드와 장인 정신으로 대변되는 페라리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두 주인공 캐롤과 켄이 각각 포드와 페라리와 닮아 있다는 것이다. 집단 속에서 일하는 캐롤의 모습은 집단에 의해 이뤄지는 대량 생산을 중시하는 포드를, 자동차 안에서 홀로 운전하는 드라이버 켄은 한 명이 하나의 부품을 만드는 페라리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또한 캐롤은 이기지 못하면 곧 패배한다고 하지만 켄은 퍼펙트 랩을 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점에서 역시 판매량과 우승이라는 결과를 중시하는 포드와 완벽한 자동차를 만드는 것을 중시하는 페라리를 연상하게 한다. 심지어 두 남자가 각각 미국인과 유럽인이라는 점까지도. 결국 <포드 대 페라리>라는 제목은 이 영화가 서로 너무나도 다른 두 남자, 캐롤과 켄의 이야기라는 것을 은유하는 것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레이서 시절의 캐롤을 보여주며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7000RPM 너머의 어떤 황홀한 순간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남게 된다는 내용이다. <포드 대 페라리>는 레이싱이 선사하는 활력과 매혹뿐만 아니라 동시에 레이싱이 안고 있는 위험함 또한 묘사한다. 영화 초반 캐롤은 레이싱 중 몸에 불이 붙는 사고를 겪게 된다. 비록 불이 빠르게 꺼지긴 했다만 그 때 처음 그는 레이싱을 하면서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인지 그는 심장 문제때문에 레이싱을 은퇴하게 된다. 이후 장면에서 켄 마일스도 비슷하게 차량이 폭발하는 사고를 겪는다. 차량은 불타지만 다행히 켄은 무사히 빠져나온다. 그런데 켄은 캐롤과 달리 사고 이후에도 침착하며 계속 레이싱을 해나간다. 켄은 죽음의 공포에 두려워하기 보다는 레이싱이 주는 그 황홀함에 매혹된 사람으로 보인다. 이러한 두 남자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캐롤 셸비는 현실주의자, 켄 마일즈는 이상주의자이다. 캐롤은 계속 해서 타협하고 현실에 순응하나 켄은 자신의 고집을 밀어붙이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게 정반대인 그들은 심하게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켄과 캐롤의 싸움은 그들의 우정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순간에 불과한다. 영화는 그들의 대결 구도에는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그들이 서로 존중하고 영향을 주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후반부, 켄 마일즈의 우승이 결정적인 순간에 포드의 중역들은 회사의 이미지를 위해 포드 사의 차량들이 동시에 들어오라는 부당한 요구를 한다. 누구보다 그에 대해 반대할 것으로 보이던 켄은 그러나 퍼펙트 랩을 달성한 후 마지막 순간에 속도를 줄이며 포드 사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결코 어떠한 패배감이나 굴욕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속도를 낮추는 그의 행동, 자동차의 유려한 움직임은 숭고함을 자아낸다. 자신만 알던 고집불통 켄이 자신과 함께 한 캐롤과 그 크루들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트랙을 달린 레이서들, 그리고 어찌 되었건 자신이 레이스를 할 수 있게 지원과 기회를 준 포드 사에 대해 존중을 표하고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정말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 밖에도 가족을 위해 레이싱을 포기하려고 한다던가 처음에는 고지식한 규정에 싫증내던 켄이 이후에는 브레이크를 교체하는 것이 규정에 맞는 것인지 걱정한다는 점, 부당한 요구에 캐롤이 굴복하여 자신이 불합리하게 경기를 나가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캐롤을 함부로 나무라지 않고 존중해준다는 점에서 그는 단순한 고집불통이 아닌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사람으로 보인다. 이러한 켄의 성격은 엔초 페라리라는 남자와 무척 닮아있다. 그런지 몰라도 우승을 억울하게 도둑맞은 후에 묵묵히 시선을 교환하는 켄과 엔초 페라리에게서 서로에 대한 존중이 느껴진다.
캐롤도 현실과 타협하면서 어떻게든 켄의 이상을 존중해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후반 르망 레이싱에서 캐롤이 규칙에 대해 항의하는 장면은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장면과 극명히 차이난다. 또한 자신의 회사를 포기할 각오까지 하면서 어떻게든 켄을 레이싱에 출전할 수 있게 하고자 한다. 그리고 데이토나 레이싱에서의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포드 사의 지시를 어기고 속도를 올리게 하는 장면까지 보면 더 이상 레이싱을 할 수 없는 자신 대신 켄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켄과 달리 그에게는 아직 불안과 공포가 남아있는듯 하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 켄을 배신하기도 한다. 연설에서 켄 대신 헨리 포드를 거론한다던가 첫번째 르망 레이싱에서 결국 켄을 데려가지 않는다던가 마지막에 켄에게 포드 사의 명령을 굳이 전하고 선택을 그에게 맡겼다는 점에서 총 3번의 배신을 한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나레이션에서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아직 답할 준비가 안된 것 같다. 그 나레이션 또한 캐롤 셸비가 말한다는 점에서 결국 영화는 캐롤과 켄 중에서도 캐롤이 과연 변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과 이상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 같다. 이 영화가 미국 영화이며 결국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타당한 선택이라 생각된다.
캐롤이 계속 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고민한다는 것은 비행기와 자동차라는 소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영화 속에서 포드의 중역들은 전용기나 헬기 등을 타고 나타난다. 또한 헨리 포드는 캐롤에게 2차 대전 당시 폭격기를 만들던 포드 사의 공장을 자랑하기도 한다. 즉 그들은 비행기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에 반해 켄 마일스는 2차 세계대전 때도 탱크 운전수였으며 계속 해서 자동차를 타는 장면만 나온다. 그가 프랑스를 건너갈 때도 비행기를 타는 장면은 나타나지 않는다.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면서도 그의 등 뒤에는 자동차가 지나가는 장면이 그림자로 펼쳐진다는 점에서 그는 철저하게 자동차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다. 캐롤은 그에 반해 자기가 비행기의 세계에 있어야 하는지 자동차의 세계에 있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캐롤은 과거에 전투기 조종사였던 사내이다. 캐롤 아메리칸은 공항 한 가운데 위치해있어 그 곳은 자동차와 비행기가 혼재되어 있는 곳이다. 영화 속에서 캐롤만이 비행기도 운전하고 자동차도 운전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소재는 이러한 그의 고민을 물질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보인다.
이렇게 계속 주저하던 캐롤은 결국 후반부에 이르러 켄 마일즈의 죽음을 겪게 된다. 그 장면에서 초반부의 내레이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그는 켄의 죽음을 계기로 결국 어떤 결심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캐롤은 초반부의 레이싱에서 켄이 규칙에 어떻게든 순응하면서도 레이싱에 나가기 위해 트렁크를 두들겨 패던 그 렌치, 이기지 못하면 곧 지는 것이라는 캐롤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던진 그 렌치를 들고 켄의 집에 찾아가며 그의 아들과 만난다. 그는 켄의 아들에게 렌치를 건네주며 이런 말을 한다. 말이 쓸모 없어질 때도 있지만 공구는 쓸모 있다. 항상 처세에 능했으며 설득, 감언이설에 능했던 캐롤은 말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켄은 말에 영 서툰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직설적이며 입이 험하다. 대신 뛰어난 레이서인 동시에 뛰어난 메카닉이다. 자동차를 운전하기만 해도 문제점을 컴퓨터보다 더 정확히 분석해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즉 켄은 공구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말은 쓸모 없지만 공구는 쓸모 있다는 대사는 마지막으로 캐롤이 켄에게 던지는 존중의 표현이자 자신의 결심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느껴진다. 그는 더 이상 말의 세계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레이싱은 하지 못하더라도 자동차의 세계, 공구의 세계에서 세일즈맨이 아닌 메카닉으로 살겠다는 그의 의지가 마지막 그의 질주에서 나타나는 듯 하다. (실제로 엔딩에서 자막으로 캐롤 셸비는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 디자이너가 되었다는 자막이 나온다.)
마지막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포드 대 페라리>는 말이 필요 없어지는 어떠한 순간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고지식하던 헨리 포드 2세마저 어떠한 말 없이 느끼게 만드는 그 레이싱의 감흥, 퍼펙트 랩이 주는 황홀한 지경. 7000 RPM 너머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그 순간에 대한 영화인 것이다. 이는 영화 최고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레이싱 장면에서 특히 잘 구현된다. 데이토나 레이싱에서의 마지막의 그 짜릿한 역전이 주는 속도감과 쾌감. 르망 레이스에서의 마지막 켄 마일즈의 결단이 주는 숭고함과 우아함에서 우리는 말이 필요 없어지는, 그저 느끼기만 하면 되는 시네마틱한 순간과 만나게 된다. 나홍진 감독이 언급한 순수한 시네마라는 이 영화에 대한 평은 아마 이러한 감흥에서 온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포드 대 페라리>는 결국 레이싱 영화이지만 결국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살면서 이상과 현실 속에서 갈등하게 된다.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도 있고 이상에 매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이상은 매혹적이지만 위협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두 개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낸다. 현실을 존중하면서도 이상을 구현해낼 수 있다. 비록 졌어도 실패하지 않는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켄 마일즈가 우승하지 못한 것을 결코 그의 실패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변화할 수 있느냐이다. 포드 사는 비록 르망에서 우승했지만 그들의 상업적 관점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상당히 단순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는 이 순수하고 맑은 이야기, 그리고 영화적 쾌감이 극대화된 레이싱 장면을 결코 잊을 수 없다.
P.S 1) 이 영화는 레이싱 영화인 동시에 영화 제작에 대한 이야기로도 느껴진다. 기계 장치를 통해 인생이 구현된다는 점이 딱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트랙들은 일종의 필름 릴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캐롤과 그의 크루들은 감독과 그의 스탭, 켄은 배우처럼 느껴지며 심지어 자금을 지원해주지만 계속 해서 간섭하는 포드 사의 모습은 우리가 줄곧 봐오던 영화에 어떻게든 간섭하려는 제작자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는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과거 로건, 그리고 포드 대 페라리를 만들며 경험했던 것과 어느정도 비슷할 것이다.
P.S 2) 레이싱 장면은 기술적으로 어떻게 건들 부분이 없다. 카메라를 최대한 자동차에 근접하게 붙이고 사운드의 베이스음을 극대화하며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나 감각을 극대화 시킨다. 거기에 레이싱 장면에서 컷을 쌓아나가며 형성되는 리듬은 거의 완벽하다.
P.S 3) 본 글에서는 캐롤과 켄 두 남자의 이야기에 집중했지만 사실 인상적인 인물도 많았다. 포디즘의 화신처럼 느껴지는 레오 비비, 포드 사와 레이싱 팀 사이에서 어떻게든 조율을 이루려는 리 아이아코카, 그저 탐욕스런 사업가가 아닌 일종의 2세 컴플렉스를 가지면서 어떻게든 성장해내려는(그러나 결국 바뀌지 못한) 헨리 포드 2세, 그리고 켄 마일즈의 가족인 몰리와 그의 아들 등이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고집불통이며 처음에는 악역처럼 묘사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레이싱에 대한 신념이 강한 엔초 페라리이다. 우승이 확정된 순간에만 경기장에 나타나는 헨리 포드와 달리 끝까지, 페라리가 리타이어되어도 경기장을 지키며 마지막에는 켄 마일스를 진정한 승자라 인정해주는 그의 모습이 가장 인상깊다.
P.S 4) 결국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캐롤과 켄이 만들어낸 GT40이 이후에도 계속 해서 르망에서 우승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빌리 빈과 오클랜드 아슬레틱스를 다룬 <머니볼>이란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두 영화가 가장 비슷한 점은 스포츠 영화의 틀에서 사실은 인생과 변화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P.S 5) 이 영화는 원래 톰 크루즈가 캐롤 셸비 역을 맡고 <오블리비언>, <트론 레가시>를 만든 조셉 코신스키가 감독을 맡으며 브래드 피트 또한 캐스팅됐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제목은 영화 중간에서 데이토나 레이스의 결정적인 순간에서 언급되는 Go Like Hel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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