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오영화제 - 베터 데이즈] 간략후기
원래 마카오영화제 개막 3일차 후일담부터 올리려고 했으나 갑자기 인터넷 환경이 극악이 되는 바람에
사진 업로드에 1시간 30분을 씨름하다가 일단 포기하고 관람작 리뷰부터 먼저 올립니다.
개막 셋째 날 관람작은 한 편이었는데, 주동우(저우동위) 주연의 중국영화 <베터 데이즈>(Better Days, 중국명 '소년적니')였습니다.
증국상(데렉 창) 감독과 주동우가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이후 또 한번 함께 작업한 이 영화는
전작보다 무거운 주제와 분위기 속에서도 흡인력 있게 극을 이끌어가며 전하려는 메시지에 힘을 싣는 데 성공합니다.
사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대중영화의 틀 안에서 세련되게 그려내는 중국영화의 새로운 경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게 입시경쟁이 뜨거운 중국의 고3 수험생인 첸니엔(주동우)의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던 급우가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고, 방관하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나서서
급우의 시신을 덮어 준 첸니엔은 그 뒤로 집단 따돌림을 주도하는 무리들의 새로운 표적이 됩니다.
폭력적이고도 비열한 괴롭힘 속에 살아가던 첸니엔은 어느 날 집단 폭행을 당하던 고아 소년 샤오베이(잭슨 이)를 만나고,
첸니엔이 샤오베이를 구해 준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지며 특별한 우정을 쌓게 됩니다.
대학 입학시험을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계속되는 괴롭힘으로 힘겨워 하던 첸니엔의 부탁에 따라
샤오베이는 첸니엔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되고, 두 사람은 각자의 힘든 시기를 함께 버텨나가는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에서 빤한 남녀 관계의 클리셰마저도 아득히 초월하는 여성들의 숭고한 우정을 그렸던 감독은
이번 <베터 데이즈>에서는 '학교 내 집단 괴롭힘'이라는 사회 문제를 소재로 한층 묵직한 터치의 연출을 보여줍니다.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모범생이 자신과 전혀 다른 모습의 고아 소년과 가까워지는 이야기는 새롭지 않지만,
영화는 주인공 첸니엔이 겪는 불합리한 괴롭힘과 막막한 가정사, 그로 인해 나부끼는 심리를 섬세하게 그리는 한편
그가 정체 모를 소년인 샤오베이와 만나고 교감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뜻밖의 상황들을 통해 긴장감을 부여합니다.
견고한 드라마로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그로 인해 품는 심리를 깊이 헤아리게 했던 전작의 역량이 이번에도 잘 나타납니다.
학교 내 집단 괴롭힘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환기와 어른들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오프닝의 자막부터
영화는 예술적인 면 너머의 뚜렷한 목적성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지만, 그 목적성 또한 이런 역량 덕분에 충분히 받아들여집니다.
영화는 방관 이상으로 좀체 나아가지 않는 어른들의 소극적인 태도 속에서 스스로 '더 좋은 날'을 찾아 나가려는,
그래서 제때 교정되지 못한 채 어긋나고 어두운 길로 빠지기 일쑤인 청소년들의 실상을 쓰라리게 담습니다.
'대학교만 가면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 아이들의 다른 중요한 문제들은 등한시하는 어른들 앞에서
아이들은 그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나가 떨어지거나, 일찌감치 가능성을 포기하고 자신을 놓아버리거나,
다른 가치들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한 채 싸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를 결합한 뒤틀린 인간으로 자라나기도 합니다.
빚 때문에 어머니와 떨어진 채 닥쳐오는 시련들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첸니엔, 그런 첸니엔을 보호하려는 마음은 가상하나
그 방법이 미숙하여 뜻하지 않은 위기를 초래하기도 하는 샤오베이, 어둠을 방관하고 부조리를 용인하는 어른들로 인해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들의 목을 조여 오는 악한 이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은 성장만을 중요시하는
현대 중국의 가치관 너머로 소년소녀들의 삶에 짙게 드리운 현실의 그림자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고 굴복하기를 거부하며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자기만의 생을 개척해 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마음 아프면서 동시에 어른들에게 중대한 책임감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주동우는 이번 영화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계속되는 폭력 속에서 흔들리는 내면을 힘겹게 붙잡으려는
소녀의 모습을 역시 야무지고도 고집스럽게 해냅니다. 전작보다 더욱 힘든 연기일텐데도 소극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네요.
함께 호흡을 맞춘 샤오베이 역의 잭슨 이는 중국의 인기 아이돌 그룹 멤버인 배우 겸 가수라고 하는데요,
현직 아이돌 그룹 멤버라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만큼 거칠고 어두운, 그러나 순수한 내면을 지닌 인물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마치 시험이 인생을 결정짓는 듯 청소년들의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입시 문화와 그 속에서 청소년들이 받는 심적 고통은
당장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직면한 상황을 대입해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공감대가 형성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과 우정 사이, 애틋한 교감으로 서로만의 방식을 만들어 가며 세상에 맞서는 두 소년소녀의 이야기는
대중적인 청춘물다운 긴장감과 뭉클함을 전하는 한 편,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되는 목소리 또한 유의미하게 냅니다.
최근 국내에 선보인 중화권 청춘물과 달리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고 안타깝게 만들겠지만,
판타지에 의존하지 않고 현실과 밀접하게 호흡하는 새로운 방식으로서 국내 극장에서도 보고 싶어지는 영화였습니다.
입시위주 교육의 부작용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