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결혼이야기' 간단 리뷰
1. 이게 한국영화의 트렌드인지 세계 멜로영화의 트렌드인지 모르겠지만, 21세기 들어 소위 '정통 멜로'라고 하는 것은 사라진 모양새다. 썩 반응이 좋았던 멜로영화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20세기나 21세기 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2019년 현재에 비하면 다소 불편한 것들이 많은 시대인 셈이다. 연애라는 것은 오래 기다리고 공을 들여야 얻어내는 것이며 그것을 유지하는데도 많은 정성을 쏟아야 한다. 편리하고 빨라진 디지털 시대와는 맞지 않는 것들이 '연애' 그 자체다. 그래서 사랑이야기는 대체로 20세기를 배경으로 하거나 현재에 그 시절의 감성을 담아내려 노력한다.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에는 사라들이 사랑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현대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하다 헤어지고 아파한다.
2. 아날로그 시대에는 서투른 감정들을 덮어두기 좋았다. 조금 불편한 소통수단과 거리가 있었고 정성을 쏟아야 했기 때문에 진심을 포장해서 전하기 편리하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서는 모든 것이 빠르고 솔직하다. 감정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되고 그것을 통해 사람을 판단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할까? 연애를 시작하고 끝냄은 단지 "좋다"와 "싫다"로 나눌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그런 복잡한 감정들이 오래 묵혀져 있었다. 복잡한 감정은 곪아지다 "널 좋아하지만 이젠 끝내야겠어"라는 20세기 이별멘트를 낳았다. 노아 바움백의 '결혼이야기'에는 디지털 기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디지털 시대의 연애담이라고 규정지을 근거는 거의 없다(SF영화는 아니라는 의미). 이것은 세기를 아우르며 통할 수 있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에 대한 드라마'지만 이 이야기에는 디지털 시대가 읽힌다.
3. '결혼이야기'를 본다면 이것이 '사랑이야기'라는 것부터 의심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니콜(스칼렛 요한슨)과 찰리(아담 드라이버)가 이혼하는 과정을 아주 섬세하게 담아낸다. 영화를 보다 보면 "미국의 이혼 절차가 이렇구나"라고 알게 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제목이 '이혼이야기'가 아니라 '결혼이야기'인 점은 주목할만하다. 이것은 끝나는 과정이지만 다시 시작하는 것과 같다. 사람의 마음이라는게 끝내다가도 싹튼다. 애시당초 제목에서부터 '복잡한 사람마음'을 그대로 담겠다고 선언한 것처럼 보인다. 소위 이런 전개라면 이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했는지 깨닫는 식의 이야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내내 두 사람의 마음이 혼란스러움을 보여준다. 그들은 망각하고 오해하다 갈등하고 싸운다.
4. 나는 이것을 '디지털 시대의 사랑'이라고 정의내렸다. 정확히는 '디지털 시대의 멜로영화'라고 봐야 맞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는 감정을 묵혀두지 않고 곧장 토해낸다. 그럴만한 환경이 조성돼있기 때문이다. 물론 니콜과 찰리가 폭발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영영 묻어두거나 다른 형태로 감정을 오해해 잘못 전달되는 것에 비하면 두 사람의 감정은 꽤나 솔직하게 발현됐다. SNS는 일상을 포장해주지만 감정은 더 드러나게 한다. 쉽게 말해 '상대방에 대해 몰라도 될 것들'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모르는 사람 사이에도 감정을 주고 받도록 하는데 조금이라도 가까운 사람(극단 주변인, 변호사, 가족)은 어떻고, 더 가까운 부부 사이는 어떨까? '결혼이야기'에서는 소위 말하는 '수근거림'이나 '상대방에 대해 마구잡이로 말하기'에 집중한다. 그게 사실상 SNS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콜과 찰리, 두 사람의 상황은 아날로그에 가깝다. 뉴욕과 L.A를 오가며 벌어지는 이혼이야기와 그 흔한 페이스타임 없이 얼굴 보고 싸우는 것은 이 시대에 남은 마지막 아날로그였으리라. 결혼생활 내내 겪었던 불만에 대해 울분을 토하듯 쏟아붓지만 정작 다른 감정은 쉽게 말하지 못한다. 두 사람이 고장난 대문을 닫으며 서로 바라볼 때의 애틋함은 이혼이 진행되는 동안 꽤 오래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영화는 기어이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 결말은 영화를 본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제도에서 일어난 미국 사람의 이혼이야기지만 바다 건너 한국 사람들에게도 공감할 여지가 많다.
6. 니콜과 찰리는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까? 두 사람의 이혼은 터프한 변호사들 덕분에 꽤 진흙탕 싸움을 벌였고 엄청난 소송비용과 알량한 승리만 챙긴 채 마무리됐다. 소송비용 없이 정리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아담은 니콜의 집에서 사라진 자신의 사진을 봐도 아무런 감정이 없다. UCLA의 교수직을 맡게 돼 니콜이 있는 L.A로 오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는 찰리의 모습은 어쩐지 어색하다. 그것을 축하해주는 니콜의 표정도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 두 사람이 싸우게 된 발단은 뉴욕에서 사느냐, L.A에서 사느냐의 문제였다. 모든 것이 정리된 두 사람은 친한 친구처럼 가깝고 편안해졌다. '극한직업'의 닭집 사장님이 감탄하는 "아메리칸 스타일"이 이런 것인가 싶다. 아무 감정도 남지 않아 쿨해진 것인가 싶다가도 찰리의 신발끈을 묶어주는 니콜의 모습은 어딘가 애잔하다. 이 영화의 마지막 씬에는 두 사람의 현재 감정에 대한 몇 가지 근거들이 등장한다. 그 근거는 두 사람이 완전히 식었다는 것과, 여전히 사랑한다는 근거 모두다. 그렇게 모든 것을 까발렸지만 여전히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른다.
7. '결혼이야기'는 첫 장면부터 남자와 여자의 다름을 인정한다. 니콜과 찰리는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레이션을 통해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보여준다. 두 사람이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 장면에서는 대칭을 보여주지만 니콜은 앉아있고 찰리는 서있다. 당연한 소리지만 부부는 서로 다른 사람이다. 마음이 맞아 결혼했더라도 엄밀히 말해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부부생활은 다른 사람이 맞춰가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다름을 이해하면서 살아가는 과정이리라. '결혼이야기'는 그 다름을 이해하는 과정이 무려 이혼소송 중에 벌어진다. 우리나라의 어느 드라마 카피처럼, 이 영화는 헤어지고 시작하는 결혼생활을 다루고 있다.
8. 결론: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기 어렵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시대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겠지만 기술이 반영된 탓도 있다. 현대 기술의 발달은 감정을 좀 더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묵혀두다 소멸시키거나 영영 전달하지 못할 감정은 없다. 어떤 형태로건 우리의 감정은 더 솔직하게 상대방에게 전달될 수 있게 됐다. 다만 그만큼 사람들의 수근거림과 오해를 감수해야 하고 함께한 시간이 통째로 재평가되는 굴욕도 맛봐야 한다. 내가 '결혼이야기'를 디지털 시대의 멜로영화라고 느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유난히 수근거림이 많다. 그리고 솔직하게 다 까발렸을때 찾아오는 혼란스러움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감정은 간단한 수식과 달라서 뚜껑을 열어보면 이게 뭔지 도통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니콜과 찰리가 이전과 다른 좋은 감정이 남아있다고 믿는다. 오래 지속되는 관계는 법적으로 엮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묵은 것이 없을 때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이야기'는 관계 속에서 갖는 사람의 감정에 대해 가장 솔직하게 늘어놓는 고백과 같다. 그건 알려고 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것이다.
추신) 감히 말하건데 이 영화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인생연기를 펼친다. 그리고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도 기가 막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앙상블도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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