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지진새' 초간단 리뷰
1. 낯선 문화를 표현하는 것은 아무리 공을 들이고 신경을 써도 어색하기 마련이다.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경북 포항은 10m는 족히 돼 보이는 야자수가 자라고 있고 광활한 해안이 형성된 화산지대다. 시골의 사람들은 막걸리에 뱀 피를 섞어 마시고 괴상한 한국말을 쓴다. 미행당한 남자는 '요태까쥐 날 뮈횅한고야?"라며 혀를 굴린다. 이것이 다 이상해보이는 이유는 내가 한국사람이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한국영화에서 묘사되는 미국인은 실제 미국사람이 봐도 어색할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 속 미국인은 가죽바지에 가죽재킷, 대충 성조기 모양의 두건을 쓰고 라이방 선글라스를 걸친, 히피 폭주족에 가까웠다. 어느 나라건 낯선 문화에 대해서는 편견이 생기고 다르게 바라보기 마련이다. 당장 우리는 휴전선 넘어 옆나라에 강동원, 김수현, 정우성 같은 청년들이 군사훈련을 받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2. 영화 '지진새'는 이같은 낯선 문화에 대해 접근한다. 1989년 일본 도쿄에 머무는 이방인 루시(알리시아 비칸데르)를 중심으로 그녀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삼각관계, 의심에 초점을 맞춘다. 이 영화를 두고 '낯선 문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 영화가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서양인의 선입견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의미로 해석 될 수 있다. 미리 강조하자면 이 글은 그런 의미의 글이 아니다. 오히려 '지진새'는 스스로 낯선 문화권에 떨어진 이방인의 이야기임을 인정하고 있다. 영화는 온전히 루시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그녀는 오래전 일본으로 건너왔고 스스로 일본인이 다 된 것처럼 믿는다. 그러나 영화 내내 벌어지는 사건들은 루시에게 여전히 일본이 낯설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녀가 테이지(고바야시 나오키)와 사랑에 빠지지만 여전히 그를 잘 모르는 것처럼 이 나라와 사람들은 여전히 낯설다.
3. 테이지는 루시의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하는 인물이다. 사랑에 빠지면 그 순간 온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루시는 테이지와 더 가까워지고 그의 과거를 알아가면서 점점 그를 익숙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다 실종된 친구 릴리(라일리 코프)와 테이지가 가까워지면서 다시 그들 모두가 낯설어진다. 가깝다고 믿는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이 낯설어지는 순간 루시의 세계 모두가 낯선 세계가 된다. 이제 루시는 이 세계의 실체와 자기 자신까지 의심하게 된다. 이러한 이해는 "왜 이 이야기는 일본을 배경으로 이방인과 일본인의 관계를 다뤘을까"라는 가장 큰 궁금증을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 주인공의 주변 모든 것이 낯설어져야 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1989년의 일본에 사는 이방인 루시가 필요했다.
4. 이것은 영화 초반에 루시가 번역하는 영화에서도 알 수 있다. 그녀가 VCR을 보면서 번역하는 영화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89년작 '블랙레인'이다. 미국인 형사 닉(마이클 더글라스)이 일본인 형사 마츠모토(다카쿠라 켄)와 공조해 야쿠자를 소탕하는 이야기로 낯선 문화에 떨어진 닉이 겪는 사건들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블랙레인'은 이방인(미국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일본에 대해 낯선 문자와 네온사인으로 도배된 이국적인 풍경으로 묘사하면서 당시 미국 관객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일본의 경제는 버블 이전인 1980년대까지 꽤 풍요로웠다. 그래서 당시 미국인들은 일본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 관심은 마이클 크라이튼의 '떠오르는 태양'이나 '리틀 도쿄' 등의 영화로 등장하기도 했다(당시 미국 대중문화는 일본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이는 현재의 중국을 묘사하는 헐리우드 영화들과 유사하다).
5. '지진새'의 원작소설 역시 작가 수잔나 존스가 1988년부터 나고야와 도쿄에 거주하면서 집필한 소설이다. 당연히 작가의 자전적 경험과 일본에 대한 인상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것은 '블랙레인'의 닉과도 통했을 것이며 닉은 자연스럽게 루시로 이어졌다('블랙레인'은 일본에서 특히 큰 흥행을 거뒀다). 이 영화의 핵심은 모든 것이 낯설어지는 순간의 혼돈이다. 익숙하다고 믿었던 것에는 알지 못하는 실체가 존재한다. '타인에 대한 공감'은 윤리적인 미덕이 되곤 하지만 인간은 온전히 타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실체를 정확하게 모른다. 때문에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게 되고 의심을 하게 된다. 이야기는 루시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사건의 중심은 루시가 아닐 수 있다.
6. 루시는 자의식이 강하고 약간의 개인주의도 있는 사람이다. 일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릴리를 도와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받지만 루시는 자기 시간을 뺏기는 것이 불편하다.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영화의 시선은 루시의 자의식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내내 "루시에게 낯선 세계"를 강조하지만 그 실상은 모두에게 낯선 세계인 것이다. 테이지에게도 루시는 낯설었을 것이며 릴리와 회사 동료, 그녀를 취조하는 형사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도시문명사회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낯설다. 큰 공간 안에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살고 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루시의 이야기는 1989년의 도쿄에 사는 서양인의 이야기지만 도시에서 사는 모두의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오래되고 잊혀진 시대(1989년 도쿄)의 이야기가 지금 영화로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7. '지진새'를 이야기하면서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배우를 '엑스 마키나'로 처음 만났다. 그리고 '맨 프롬 UNCLE'와 '더 셰프'(거기 나왔었다고?), '제이슨 본', '툼 레이더'로 본 게 전부다. 작은 체구(처럼 보이지만 키는 168cm인)에 깊이가 큰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녀가 제대로 연기하는 영화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특히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대니시 걸'조차 못 봤다. '지진새'는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혼자 다 해야 하는 영화다. 그녀는 내내 어두워야 하고 히스테릭해야 한다. 혼자서 영화를 이끄는 능력이 아주 훌륭하다. 무엇보다 깊이도 있고 에너지도 넘친다. '대니시 걸'이 개인적 기호에 맞는 영화는 아니지만 '지진새'를 보고 나니 '대니시 걸'이 궁금해졌다. 이 배우, 연기 정말 잘한다.
8. 결론: '지진새'는 영화/소설에 대한 소개처럼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다. 스릴러와 멜로가 공존하면서 루시의 히스테리에 관객이 빠져들게 만든다. 그래서 이 영화는 몹시 매력적이고 신선하다. 앞서 언급한 '떠오르는 태양'이나 '블랙레인', '리틀 도쿄' 등과 동시대의 이야기인 만큼 그 시절 작품들을 떠올릴 수 있지만 '지진새'는 완전 새로운 이야기다. 루시가 테이지를 만나고 느꼈던 '낯섦'처럼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그것을 느낄 것이다. 이 영화는 올해 만난 가장 신선한 이야기다.
추천인 2
댓글 0
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