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프로그램 유감 2
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는다. 2016년(아마도 '프로듀스' 시즌1이 끝났을 즈음)에도 글을 적었지만 경쟁에 내던져져 상품으로 소비되는 어린 소녀들을 보는 것이 영 불편했다. 우리 사회는 학교라는 경쟁사회에서 벗어나 대학입시와 취직까지 경쟁해야 하고 그렇게 들어간 직장 내에서도 실적으로 경쟁해야 한다. 온전히 자신만의 노력을 통해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닌 남을 의식하고 책임감에 짓눌러 버리는 사회가 참 가혹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이런 경쟁사회에서 기름을 붓는 격이다.
이런 이유 말고도 오디션 프로그램이 싫은 이유는 몇 가지 더 댈 수 있다.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에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방송의 의무일테지만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볼 채널인 엠넷은 '아이돌'이라는 비전 밖에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유독 '돈이 되는 것'에는 우루루 몰려서 하려는 경향이 있다(IMF의 트라우마인가). 특히 아이돌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직업이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어른이라면 '아이돌'이라는 직업에 대해 아이들을 제대로 선택할 수 있도록 보여줘야 한다. 엠넷의 콘텐츠들은 '학생들 상대로 사기치는 어른'을 연상시킨다.
어쨌든 방송에 출연한 연습생들은 꿈을 꿨고 꿈을 위해 노력을 했다. 그렇다면 오디션 프로그램은 꿈을 위한 노력을 보여주는 장이었을까? 거기에는 많은 PPL이 붙고 광고가 붙는다. 기획사와 계약관계도 있고 돈도 오간다. 방송은 아이들의 꿈을 팔아서 돈을 챙긴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만드는 어른은 이미 파렴치한 존재다. 그런데 여기에 '투표 조작'이라는 대국민 사기극까지 벌였다. 정말로 그들에게 이 아이들의 맑은 꿈은 그저 돈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방송가에서 '조작'은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소위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고 나오는 것들 중 상당수는 사실상 '조작'이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은 기획된 코스를 방문해야 하고 미팅 프로그램은 이미 정해진 짝을 두고 연기를 한다. 우리가 TV를 통해 바라보는 시선 넘어에는 수많은 카메라와 스탭들이 있다. 그 와중에 '리얼'을 찾는다? 숙련된 방송인이 아니고서야 힘들 일이다. '프로듀스'의 투표를 조작한 안 PD는 여기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마비됐을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 '재미'를 위해 무리수를 두고 조작을 한다. 그 명분은 오직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게 재밌냐?"라는 질문을 하기 전에 한가지 정의내릴 것이 있다. '방송을 만든다'는 일은 얼마나 대단한 일일까? 한 두시간 재미를 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 국가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직결됐을 정도로 중요한 일일까? 나는 지역 방송국에서 FD로 일한 적도 있었고 외주 프로그램 작가로 일한 적도 있다. 남들보다 방송가에 조금 가까이 있었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방송을 만드는 일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완성도를 위해 한 주 펑크내더라도 대체할 외주 프로그램만 수십개다. 안방에서 TV로 볼 때는 대단해보였던 프로그램은 영업사원이 한 주 판매해야 하는 제품 할당량과 같다. 오늘이 지나면 다음 것이 찾아오는 무의미한 것들이다.
그럼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드라마는 연출팀 젊은이들을 하루 23시간 노동시키고 예능 프로그램은 온갖 윤리와 도덕, 법을 무시한다. 방송 프로그램은 젊은이의 건강이나 법질서보다 우위에 있을까?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이 말하는 '시청자'에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연출팀 아르바이트생도 들어가고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눈물 흘리는 연습생도 들어간다. '시청자를 위한다'는 그들의 태도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절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작자들이 열과 성을 다해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유는 '광고주'를 위한 것이다. 프로그램이 한 주 펑크나서 나가지 못하는 광고는 방송국의 책임이고 이는 손실로 이어진다. '프로듀스'를 만든 안 PD는 왜 조작을 했는가? ①재미를 줘야 한다 ②그래야 광고주를 만족시킬 수 있다 ③광고주가 만족하면 회사의 수익으로 이어진다 ④그래야 PD의 주머니도 두둑해진다(인센티브).
방송은 철저한 자본의 시장이다. PD들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상처받는 연습생이나 혹사 당하는 아르바이트생은 고려하지 않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나는 부디 방송국 PD들이 윤리의식을 가지길 바란다. 광고주와 그들이 주는 돈이 사람 목숨보다 절대적인 것인가. 그것을 위해서라면 남에게 상처를 줘도 되는 것인가. 답은 이미 나와있으니 고민해보길 바란다.
여기에 더해, 부디 앞으로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수능이 끝난 날, 한 아이가 아파트에서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거의 매년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떤 책임있는 어른도 여기에 경각심을 갖지 않는 듯 하다. 수능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은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린다. 때문에 점수가 잘못 나오면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좌절을 느낀다. 우리 사회는 학교와 TV에서 "경쟁에서 살아남아라"라고 주입시킨다. 경쟁에서 패배한다고 세상이 무너지진 않는다. 삶은 패자에게도 살아갈 권리와 기회를 준다, 그래야만 한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승자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패자는 울면서 무대 뒷편으로 사라진다. 그 참혹한 대비를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보여준 것은 정말 못할 짓이다. 그런 '아동학대'에 대한 경각심은 반드시 필요하다.
"안 PD가 '프로듀스' 전 시즌을 조작했다"고 나온 뉴스와 "수능 당일, 수험생이 아파트에서 투신해 숨졌다"라는 뉴스 헤드라인이 함께 보이는 지점은 아이들에게 유난히 가혹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책임있는 어른들은 반드시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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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공감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랍시고 중학생 애들 세워놓고 투표시키고, 슈스케 때처럼 방송 분량 편집은 제멋대로 할거면서 '국민 프로듀서'라는 타이틀을 홍보하는게 좀 불편했었는데 제가 느낀 위화감을 글로 멋지게 풀어내셨네요.
오래전 우리가 다 겪었다며 되돌아보고 너네도 헤쳐 나올 수 있다고 충고하고 싶지만 타임머신으로 그 시대로 다시 돌아간다면 고교시절로는 군대보다도 더 가기 싫은 그 어떤 곳인듯하네요.
아무튼 아이들의 꿈으로 장난 치는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보여줬으면 하는 바램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