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날씨의 아이' 간단 리뷰
1. 몇 년 전부터 강하게 느끼는 가치관: "기성세대의 질서가 실패했다고 판단된다면 새 시대에는 이를 과감하게 단절하고 새로운 질서를 정립해야 한다". 한마디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실패한 구시대의 질서는 과감하게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사회주의적 정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이 '무정부주의적 정서'가 아닌가 생각한다. 새로운 시대에는 이념적 대립조차 '구시대의 질서'여야 하기 때문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날씨의 아이'를 보고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나의 이런 가치관으로 이 영화를 봐도 되냐는 것이다. '날씨의 아이'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기성세대와 단절하는 일본의 10대'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 가치관으로 영화를 보기에 주저한 이유는, '날씨의 아이'는 지나치게 상업적이었기 때문이다. 내 가치관과 함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신카이 마코토, 이번에도 바짝 땡기려고 작정했구만"이라는 것이다. '날씨의 아이'가 주는 시청각적 오르가즘은 전작인 '너의 이름은'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이다.
2 이 경우 괜한 정치적 해석은 소위 '뻘짓'이 될 수 있다. '토르:천둥의 신'을 보고 팍스아메리카나를 이야기했던 지난날의 '뻘짓'을 반성하며 상업영화의 정치적 해석을 지향하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날씨의 아이'는 너무 강렬하고 노골적으로 정치적 해석을 유도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가진 가치관과 일본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결합돼 나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 이면에는 일본의 보수세력이 알아서 물에 잠겨 익사하길 바라는 한국인의 정서도 있다. 때문에 나는 '날씨의 아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데 주저하지 않기로 했다.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덕후 오르가즘적 연출'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3. '날씨의 아이'가 노골적인 부분은 후반부에서 드러난다. 비가 오고 구름 위에 뭐가 있고 하늘을 나는 용, 무녀 등의 이야기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보여줬던 친환경적 가치관을 떠올린다. 중반까지만 해도 이 이야기는 '천공의 성 라퓨타'나 '원령공주'을 바탕에 깔아둔 '너의 이름은'인 줄 알았다. 그러다 히나(모리 나나)가 하늘로 올라가고 맑아진 도쿄를 보여주는 장면은 마치 쓰나미가 닥친 다음날 아침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런 도쿄를 꽤 성실하게 묘사한다. 폭우가 쏟아진 다음날의 도쿄지만 여기서 쓰나미를 연상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쓰나미는 지진이 잦은 일본에서 꽤 익숙한 자연재해다. 지진은 언제고 일본을 몰락시킬 수 있는 위협이다. 그리고 실제로 동일본대지진은 일본의 한 구석을 무너지게 했다. '쓰나미'에서 '동일본대지진'을 연상시키게 하는 것이 억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기엔 물에 잠긴 도쿄를 너무 성실하게 보여준다.
4. 그렇다면 쓰나미(=폭우) 이후 맑은 날의 도쿄를 맞이하고 그 가운데서 도시를 복구할 수 있게 된 배경을 살펴보자. 거기에는 10대 소녀 히나가 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이 나라는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어린 소녀를 희생시킨 것이다. 호다카(다이고 코타로)는 사라진 히나를 찾기 위해 도망치고 달린다. 이제는 기성세대가 된 내 입장에서 "어린 녀석이 참 애절하네"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전작인 '너의 이름은'과 비교해봐도 이 어린 녀석은 지나치게 애절하다. 그들의 애절함은 '어른들(기성세대)은 모르는 세계'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들의 질서가 있고 그것을 온전히 정립하기 위해서는 기성세대의 질서에 저항해야 한다. 호다카가 히나를 구하기 위해 달리는 여정과 어른들의 방해는 온전히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이다.
5. 그 저항의 결과로 얻게 된 것은 물에 잠긴 도쿄다. 호다카가 만난 어느 할머니의 대사가 사실인지 모르겠다. 도쿄는 원래 바다였다는 이야기. 그 도시가 정말 산업화의 상징과 같은 도시라면, 도쿄가 물에 잠기는 것은 이제 온전히 기성세대와 단절했음을 의미한다. 도쿄는 물에 잠기고 지도는 새로 씌여질 것이다. 새로운 지도가 씌여지는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은 호다카와 히나같은 아이들이다. 나는 신카이 마코토가 이 모든 것을 의도했는지 궁금하다. 그가 정말로 "일본의 기성세대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모두 물에 잠겨버려라"는 생각으로 쓴 이야기라면 모든 기성세대가 물에 잠긴 다음 신카이 마코토 본인도 바다로 뛰어들어야 할 것 같다. 그 역시 기성세대이며 '날씨의 아이'라는 이 작품은 기성세대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6. 그 근거로 나는 '날씨의 아이'에서 구시대로 대표되는 두 인물이 있다. 어딘가 '카우보이 비밥'의 스파이크를 닮은 스가(오구리 슌)와 제목도 기억 안 나는 옛날 만화 주인공의 헤어스타일을 한 타카이 형사(카지 유우키)다. 이들은 무엇보다 외모가 옛날 만화다. 특히 타카이의 괴상한 머리스타일은 "나 옛날만화다"라고 티내는 듯 하다. 그들을 온전히 구시대로 묘사하고 호다카와 히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이 만화 역시 버블시대 어디쯤의 일본 애니메이션과 단절하겠다는 의지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요즘 일본 애니메이션은 확실히 재미가 없다. "몰락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다. 신카이 마코토는 차마 그 꼴을 볼 수 없어서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진 모양이다. 그래서 구시대적 그림체의 인물은 구시대적 행동을 한다. 아마 그들 모두 제국주의의 상징들과 함께 바다 속에 쳐박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7. '날씨의 아이'를 다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신카이 마코토가 이번에도 바짝 땡길 생각을 했구나"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 영화는 작정하고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영화다. 특히 '너의 이름은'을 재밌게 본 팬들에게는 오르가즘을 안겨줄 만큼 자극적이고 화려하다. 그야말로 상업영화와 자본주의의 질서를 따르겠다는 의지다. 이것은 이 영화가 기성세대의 상업적 질서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새시대의 일본이지만 영화 자체는 구시대 일본영화의 방법을 따르는 아이러니를 범한다. "구시대의 방법을 탈피했다면 이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을까?"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 물음에 공감은 하지만 혁신을 넘어 혁명적인 메시지를 담고서 구시대의 화법을 택한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8. 결론: '날씨의 아이'는 신카이 마코토가 잘 하는 거 다 끌어모아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영화다. 유쾌하게 보고 명쾌하게 정리된다. 그런데 극장문을 나설 때 이 이야기와 메시지가 깊게 오랫동안 새겨질지 모르겠다. 극장문을 나서면서도 히나가 춤을 추다가 쌀을 씹어뱉어서 술을 담근건지 미츠하가 하늘로 솟구쳤는지, 호다카가 카페를 간 건지 타키가 가출을 한 건지 모르겠다. 많은 관객들이 느낀 '동어반복'은 이 영화의 최대 핸디캡이다(미츠하랑 타키도 나오지 않았던가).
추신) 그 와중에 깨알같이 등장하는 '성진국 변태 정체성'은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 장면들 역시 구시대적 방법의 대표적인 예시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조금 변태같아야 장사가 되는 모양이다. 한 몇 십년은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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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고집한 설정이었나 보네요.
추신 내용 정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