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 관람평 - 공간으로의 영적 초대
어제 관람했습니다.
영화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어서 오히려 예고편만으로 더 끌렸던 작품입니다. 주연인 존 조(우리에겐 <스타트랙> 리부트 시리즈로 유명하죠)의 진중한 연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원어민인 우리가 보기에 존 조의 한국어 억양이 튄다고 느낄 수도 있으나 영화가 진행되면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또 젊은 배우 헤일리 루 리차드슨을 새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에 깊이 사로잡혔고 설명하기 힘든 눈물을 훔쳤습니다.
아래는 관람평 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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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주’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공기처럼 의식하지 않는 주거 공간, 건축물.
현대인들은 과잉일 정도로 수많은 건물의 틈바구니 속에 살아갑니다.
저는 건축이 인간에게 주는 힘을 믿습니다.
환경이 사람을 바꿀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에 관여하고 심지어 영혼을 잠식한다고 말이죠.
이 영화를 서사로써 접근한다면 그 빈약함에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콜럼버스>는 언어적 서사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영화”라고.
다시 말해 언어와의 작별을 고하고 있습니다.
‘번역’일을 하던 진(존 조)과 수많은 활자로 가득한 ‘도서관’에서 일하는 케이시(헤일리 루 리차드슨)
그들은 추상적 언어의 세계에서 손에 잡히는 물성적 세계로 들어서고 있는 겁니다.
영화는 이들과 함께, 관객들도 3차원의 공간속에 들어와 잠시 머물러주길 청하고 있습니다.
<콜럼버스>는 인구 5만도 안 되는 인디애나주의 소도시이지만
모더니즘 건축의 메카로도 유명합니다.
영화에선 이 기념비적 건물들을 순례하러 끊임없이 관광객들이 방문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최초’들을 잉태한 이곳은 건축의 ‘신대륙’이라 불러도 무방할 겁니다.
진에게 <콜럼버스>는 낯설고 이질적인 아버지의 땅이며
상처 끝에 건축학에 눈을 뜬 케이시에게 이 고향은 새로운 도시입니다.
낯선 곳에서의 이방인의 만남이라는 테마는
링클레이터의 <비포>시리즈를 떠올리게 합니다.
짐 자무시의 <패터슨>이 연상될 수도 있을 겁니다.
두 영화의 무대가 되는 소도시들은 실제 존재하는 지명이자 각각의 영화 제목입니다.
그리고 이 두 도시는 주인공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기도 합니다. 방식은 차이가 있지만.
그런데 왜 하필 ‘모더니즘’인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도 흥미롭습니다.
문예사조로서의 모더니즘은 도시 문명에 따른 인간성 상실에 대한 문제의식에 기반 했습니다.
모더니즘 영화는 반리얼리즘의 입장에서 연속적 서사를 파괴하고 복잡한 인물의 내면에 집중합니다.
건축에서의 모더니즘은 순수로의 회귀를 지향합니다. 무장식, 단출한 재료, 간결한 디자인.
그리고 카메라는 영화 내내 거의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 정갈한 건축물들을 담아내는 균형적, 대칭적인 구도.
주인공들의 안정되지 못하고 엉켜있는 삶과 이 단정한 모더니즘 양식들은 확연하게 대비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잠시 멈춰 세워 환기하게 합니다.
<콜럼버스> 속 건물들은 인간의 관계를 단절하고
느닷없는 타임머신이자 환기의 공간인 동시에
창조자의 독창성과 시대의 사상을 품으며
끝내 언어조차 도달 할 수 없는 영적 에너지를 창출하는 공간으로 승화됩니다.
하늘에 떠 있는 듯이 보이는 두 벽돌담장의 착시는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인간세상에서 홀연히 천상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듯합니다.
이 같은 의도는 감독의 출신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감독인 코고나다는 한국계 비디오 에세이스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영화 데뷔작마저 마치 명상적인 에세이처럼 찍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건축, 그 자체입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길을 거닐고, 담배를 피워도
카메라 속 인물의 자리는 끊임없이 주변입니다.
언제나 중앙에서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건물이죠. (또는 조경)
그렇기에 이 영화는 비율은 시네마스코프가 아니라
비스타 비전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 비율 선택은 최선입니다.
제목 <콜럼버스>는 중의적이며 의미심장합니다.
소도시의 이름이지만 주제적으로도 적절합니다.
익숙했던 공간들을 주인공들은 새롭게 인지하며 탐험할 것이고
마침내 그들 인생의 신대륙으로의 항해를 다시 시작할 겁니다.
늦여름밤의 꿈과 같은 영화입니다.
육신을 잠시 의탁해 묵상에 잠기고 나면
우리 또한 그들처럼 영적으로 고양되어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물성적 존재가 영성적 존재로 탈바꿈할 때 찾아오는 낯선 감각.
저는 <콜럼버스>만큼 건축과 공간을 탁월하게 영화 속에 끌어들인 사례를
근래에 본 적이 없습니다.
★★★★
글 자체가 매우 단정하시네요. 저는 이미지와는 별개로 구성상 줄거리가 넘 아쉽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