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을 쫓는 아이'와 마크 포스터의 작품 세계
류상욱

다양한 주제를 다뤄온 마크 포스터 감독
아프가니스탄 소년들의 우정을 이야기하다
요즘 한국 신문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싱가포르 신문에 실린 극장광고에는 상영작 리스트와 함께 시간표도 같이 실린다. 물론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도 있지만, 나는 신문에서 시간표까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좋다. 지난주부터 <연을 쫓는 아이>(Kite Runner)가 상영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제야 극장에 가서 이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를 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감독이 마크 포스터이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할리 베리가 나온 <몬스터 볼>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다소 건조한 느낌을 내게 주었는데, 섹시하지 않게 나온 할리 베리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재미있게 본 영화였다. 나는 케이트 윈슬렛과 조니 뎁의 팬이기 때문에 이 영화를 더 좋게 보았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에서는 영화의 ‘이야기’가 신선했다. 한 남자가 있는데 그는 소설 속의 캐릭터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소설 속의 캐릭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도 자신의 캐릭터가 실제로 살아 있다는 것을 역시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만나기까지 한다. 자신이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만들어진 캐릭터라는 것을 알게 되는 작품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창작된 인물과 창작자가 만나는 것까지 보여주는 작품은 이제까지는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이 영화는 창작자의 고뇌를 담고 있다. 소설가나 영화감독은 무수히 자신들이 창조해낸 인물들을 죽인다. 그래야 내러티브를 끝낼 수 있으니까. 또 필연적으로 주인공이 죽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작품성을 위해서 캐릭터는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다. 엠마 톰슨이 연기하는 <스트레인저 댄 픽션>의 소설가는 그 허구적 ‘살인’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인상적인 것은, 창조된 캐릭터가 자신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작품을 위해서 자신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 영화는 그래서 창작행위에 대한 성찰을 하고 있다. 과연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우리가 만들어낸다면, 어디까지 그것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창작의 윤리라는 것이 허구의 캐릭터에게도 해당되는 것일까? 정말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다루어온 마크 포스터는 원작 소설의 각색에 나선다. 칼레드 호세이니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나는 영화에 원작이 있는 경우 두 텍스트를 꼼꼼히 비교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두 텍스트가 어떻게 창조적으로 대화하고 있는가에 대한 탐구이어야 할 것이다. 때로 소설의 팬들은 영화가 원작을 훼손했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오히려 영화가 형편없다면, 원작의 가치는 새롭게 조명될 수도 있다. <연을 쫓는 아이>는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고, 싱가포르의 서점에서 페이퍼백으로 나온 원작을 발견했지만, 나는 아직 원작을 읽지 못했다. 3월에 한국에서 이 영화가 개봉이 되는 것 같은데, 누군가 원작과 영화를 비교하는 평론을 쓴다면 고마울 것 같다.
영화는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실 한국인들은 지난 해 인질사건을 계기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았는데, <람보 3>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은, 이 영화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매우 보편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두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두 소년 아미르와 하산 사이에는 계급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들은 서로를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 둘을 주인과 하인의 아들들로 생각할 뿐이다. 이 계급적 차이와 더불어 아프가니스탄 사회를 짓누르는 민족적 분쟁의 요소, 그리고 러시아의 침공이라는 사건이 두 소년을 비극으로 몰고 간다. 이러한 상황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숱한 나라들이 겪었고 겪고 있는 비극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결국 영화는 어떻게 하는 것이 ‘용기 있는’ 행위인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
특수한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보편적인 이야기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서 부자의 아들로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던 아미르는 소련의 침공으로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한다. 작가가 된 그는 아버지의 친구의 연락을 받고 파키스탄으로 오게 되고, 하산의 아들을 찾기 위해 다시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간다. 아미르는 고아원에 간다. 고아원에는 전쟁의 피해로 팔과 다리가 잘려진 아이들이 수없이 많다. 고아원 책임자는 탈레반 군인들에게 여자아이들을 팔고 있다고 고백한다. 아미르가 그 행위를 비난하자 그렇게 받은 돈으로 다른 아이들을 먹일 식량을 구하고 있다고 강변한다. 그에게 아미르는 조국에서 도망쳐 미제국주의의 품속에서 살고 있는 배신자에 불과한 존재이다. 아미르는 자신과 관계가 있는 한 아이만을 구하러 왔다. 그렇다면 배고픔과 질병 그리고 장애로 고생하는 수많은 아이들은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아미르로서는 그 아이를 구하는 것으로 지난날의 비겁함을 벗어던지려 한다.
사실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한 아이를 구해 미국으로 데려오고 당당히 주변 사람들에게 그 아이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물론 누구도 아미르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카불이 아닌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 아프간 인들은 행복할까? 최소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불륜을 저질렀다고 축구장에 끌려와 돌에 맞아 죽지는 않는다(그러나 대학 강의실에 있다가 총에 맞아 죽을 수는 있다).

마크 포스터는 원작에 기대어 매우 서사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연싸움을 하는 장면들은 그 자체로 장대하다. 현지에서 캐스팅했을 아이들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들이 떠오른다.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소련이 침공한 시기와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의 풍경은 매우 사실적이다. 마크 포스터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보편적인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이 말은 이 영화가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 아미르는 자신의 선택으로 미국에 간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되고 하산에 대한 죄책감으로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아미르를 통해 우리는 늦었더라도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용기가 필요할 때를 외면하지 않는 것, 이것은 진정 힘든 일이지만 이 영화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삶의 가치라고 할 수 있겠다.
류상욱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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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말 안 적었는데.. 삭제한건 아니죠?그럼 미워요-.ㅜ
암튼.. 없어졌으니 다시..꿋꿋하게 ^^;
제이드님 댓글처럼 정말 뜻밖입니다
이런 영화를 마느는 사람이 007을 연출한다는점이..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3월에 개봉을 한다니 꼭 봐야겠어요..
저희쪽에서 지우는 일은 없습니다.
간혹 티스토리 버그로 그런 일들이 종종
있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애써 댓글 달아주셨는데
불편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아,그리고 저도 마크 포스터 감독의
007신작 기대 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