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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강추 귀로 (1967) 이만희 감독의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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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깊은 인상을 받은 작품이었다. 이만희 감독의 걸작 중 걸작이라고 하는데, 맞는 말인 것 같다.

전체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영화다. 도덕적 문제를 붙잡고 깊이 고뇌하는 한도 끝도 없이 어둡고 무거운 영화다. 

그렇다고 멜로물을 가장한 윤리 영화냐 하면 그건 아니다. 불륜을 저지르며 갈등하는 유부녀의 심리를 아주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게 그려낸

훌륭한 멜로영화기도 하다.

여기에다가 신선하고도 투명한 분위기, 화려하고 세련된 카메라, 쉬크한 감각을 더하면 바로 이 영화 귀로가 된다. 

이것은 머리로 생각해서 계산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감독의 천재적인 감각이 있어야 한다. 

 

이만희 감독이 여기선 아주 훌륭한 각본을 만났다. 육이오 때 전방에서 싸우다가 반신불수 성불구가 된 소설가와 그 아내가 주인공이다. 

소설가는 아직도 전쟁 속에서 산다. "나는 보았다. 두 다리를 잃은 병사가 달려가는 것을. 모가지가 없는 병사가 걸어가는 것을. 나는 그들 앞에서 앞장서서 달려갔다." 멋지지 않은가? 소설가는 아직도 그들 앞에서 달려가고 있다. 전쟁이 끝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는 성불구이고 그의 아내 문정숙은 아내라기보다 간호사 역할을 하며 살아왔다. 문정숙은 지성적이고 용감한 소설가의 내면에 반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할수록 더 괴롭다. 쇼윈도우 부부라면 남남처럼 살 텐데 서로 사랑하니 말이다. 문정숙은 남편이 쓴 소설을 신문사에 배달하러 서울에 가는데 거기서 젊은 신문기자 강욱을 만나게 된다. 

 

화면이 정말 멋지다. 보통 화면과 다르게 사선의 구도가 많이 쓰인다. 서울역 계단을 내려오는데도 일부러 계단을 수평선이 아니라 사선으로 기우뚱하게 해서 불안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 영화 화면은 이 시기 다른 영화들에서 보이는 것이 비해 훨씬 더 복잡하다. 

가령 예를 들면 신문기자 강욱이 서울역 계단을 올라온다. 다른 영화같았으면 강욱을 화면 중앙에 크게 배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사람이 바글거리는) 서울역 계단을 포괄적으로 보여주고 그 한귀퉁이에서 강욱이 올라오는 것을 조그맣게 보여준다. 문정숙도 강욱도 화면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들은 조그만 주변인물일 뿐이다. 이 쉬크함, 세련됨이 바로 이 영화의 스타일이다. 

 

문정숙의 심리 변화가 아주 섬세하게 보여진다. 남편을 생각해 강욱과의 사랑을 단념하려다가, 다시 강욱에게 마음이 쏠리고, 남편과 갈등 때문에 괴로워하고, 강욱과의 관계를 끊으려 애쓰고 등등 아주 섬세하게 그녀의 심리 변화를 보여주는데, 굉장히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다. 각본을 아마 경험자가 썼나 보다. 설득력이 있어도 너무 설득력이 있다. 

 

명대사가 많이 나오는데, 

 

문정숙이 "기차를 옆에서 보면 쌩쌩 달려서 저도 막 타고 싶죠. 하지만 기차에 타면 지루해요. 단조롭게 정해진 철로만 달리거든요." 이 말은 문정숙의 불륜의 미래를 암시한다. 

 

남편인 소설가가 아내 문정숙이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알게 된다. 주변사람이 아내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이혼해주라고 권유하자, 소설가는

"희생을 하는 쪽보다 희생을 받는 쪽이 얼마나 괴로운지 모를 거다. 나는 이미 나를 위해 무얼 할 능력도 아내를 위해 무얼 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다."

 

구도의 사용도 기가 막힌데, 문정숙이 신문사로 오기 위해 서울역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에서는 사선으로 기울어진 계단을 보여주는데, 

강욱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올라가는 서울역 계단은 수평으로 안정적으로 바뀌어있다. 절묘하다. 구도를 미묘하게 사용해서 등장인물의 심리를 표현한다. 

 

소설가도 문정숙도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 인물들 같다. 도덕적 문제에 직면해서 괴로워하고 갈등하는 무거운 심해 속 심해어같은 인물들이다. 

이 영화에 불륜의 짜릿함, 아련함, 스릴같은 것은 없다. 문정숙이 강욱을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소설가 남편도 알게 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 까발리고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도덕적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갈등하고 괴로워한다. 

 

아마 당시 사람들은 화면이 너무 복잡하다고 느꼈을 지 모른다. 우리가 영화 아바타를 보고 느꼈던 것처럼. 오늘날 내가 봐도 세련된 감각과 이미지, 구도의 섬세한 사용, 화면 자체의 드라마성이 느껴지니까. 배우가 드라마를 안보여줘도, 화면 그 자체가 풍부한 드라마를 보여준다. 

 

탈진한 문정숙이 강욱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강욱은 몇시 기차를 타고 떠나자고 한다. 문정숙은 "빨리 가고 싶어요. 떠나요. 다음 열차는 싫어요."하고 침대 위에 쓰러진다. 강욱은 문정숙이 수화기를 안 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 부산으로 갑시다. 제주도로 갑시다." 하며 대책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있다.

직업도 버리고 남의 아내를 데리고 제주도로 가서 어쩌자는 건가? 애초부터 강욱은 그정도 인물이었고, 문정숙과 강욱의 관계는 처음부터 dead end 였던 것이다. 그렇게 사려깊은 멜로영화 주인공처럼 보였던 강욱이 사실은 이런 인물이었다니. 그럼 지금까지 멜로장면들은 다 뭔가? 이만희 감독은 일부러 맨마지막에 와서야 이런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문정숙은 수화기를 놓았기에 강욱의 이런 뜬구름 잡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관객들만 안다. 문정숙이 지금 이 정도 되는 인물과 사랑의 도피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다고 남편에게 남자니 소설가 남편은 큰 충격을 받고 반 폐인이 된 상태다. 

 

문정숙은 탈진하여 침대에 쓰러져 "어서 가요. 다음 열차는 싫어요." 말만 깨진 레코드판처럼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다.

 

굉장히 세련된 결말이다. 문정숙이 사랑의 도피를 하는 장면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남편에게 남는 장면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갈등하는 장면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말이다. 

 

신파조와 감정을 싹 걷어낸 쉬크함. 그러나 그 결과는 건조한 영화가 아니라 아주 감성적이고 신선한 멜로영화다. 

 

그냥 쉬크하고 투명하기만 하면 모르겠는데, 거기 토스토예프스키같은 무거움과 깊이있음이 함께 갖춰졌으니 놀라울 뿐이다. 걸작 중의 걸작이라는 말이 딱이다.  

 

P.S. 가령 신문가지 강욱을 만나기 전 신문사에 원고를 주고 돌아오던 문정숙이 잠시 배회하는 장면이다. 나무도 그렇고 성당도 그렇고 아주 높은 수직선이다. 

여기서 수직의 이미지는 뭘까? 문정숙의 막막한 표정과 함께 어우러져 어떤 의미를 던지는 것 같다. 반신불수인 남편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힘겨운 윤리적 의무를 이야기하는 건가? 윤동주 시처럼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영화가 이런 장면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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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 영화를 보니 만추라는 이만희 감독의 멜로영화 걸작이 또 아쉬워진다. 이 영화 수준만 되어도 이만희 감독 영화들 중 걸작이고 아마 우리나라 영화사 멜로영화의 다섯손가락에 꼽히는 걸작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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