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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온기

수위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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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족이 행복할거라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고 그 사연은 생각보다 복잡할테니까요. 아버지도 처음 살아본 시간일테고 저도 처음 살아본 시간입니다. 그래서 원망스런 감정들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시간만 하염없이 흘러갔습니다. 

 

이제와서 그 모든 감정들이 무슨 소용일까 싶습니다. 원망은 화해하지 못한 채 산화돼버렸고 이젠 아버지를 볼 수 없게 됐습니다. 화해하지 못했음은 제 남은 인생의 깊은 후회로 남겠지요. 감정이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흔적을 남겼다면 이토록 후회되진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해결하지 못한 잔재는 쓰디쓴 흔적으로 남아 제 남은 삶에 자국으로 남겠군요. 그 후회가 업보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평생 후회하며 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 몇 년 동안, 제가 아버지께 가진 감정은 원망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요양병원에서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뵙고, 이제 정말 시간이 다 됐다는 걸 느꼈을 때 아버지와 지난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돌이켜보니 꽤 따뜻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 명절 대목을 앞두고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저녁으로 버섯전골을 먹었던 날, 찬 바깥에 오래 머물렀던 제 볼은 전골국물의 온기가 닿자 따끔거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건네준 소주 한 잔은 하루를 온전히 잘 보냈음에 대한 포상과 같았습니다. 더 어릴 적에는 볼링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덕에 처음으로 볼링을 쳐봤습니다. 손목을 쓸 줄 몰라 힘으로 볼링을 쳤던 덕에 어깨와 팔이 욱씬거렸습니다. 그럼에도 운동에 젬병인 나조차 그럭저럭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있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등산도 좋아하셔서 꽤 많은 국립공원을 다녔습니다. 습하고 시원한 산의 공기와 나무 사이의 상쾌함이 그토록 귀한 것인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아버지와도 꽤 추억이 많았네요. 

 

어른이 되고 차게 식어버린 관계는 그 추억마저 묻어버렸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식어버린 관계는 그보다 더 차갑게 변해버린 아버지의 시신을 마주하자 산화돼버렸네요. 그 순간에도 아무것도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시체'라는 것 앞에 꽤 담담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주검은 그것이 시신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병상에 계시던 그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건강했던 아버지의 모습과는 너무 멀게 느껴져,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그저 멍한 상태로 돌아서고 나서야 가슴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렸습니다. 그제서야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를 화장했습니다. 아버지가 재로 돌아가는 한 시간은 무엇도 실감나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한 주, 저는 그렇게 멍해있었나 봅니다. 재로 돌아간 아버지가 유골함에 담겼습니다. 그 유골함을 두 손에 안았을 때, 따뜻함이 느껴졌습니다. 막 다 타버린 아버지의 재에서 나는 식지 않은 열기는 마치 아버지가 내는 마지막 온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전날 내렸던 폭설이 햇살에 녹듯, 온기는 조금의 추위조차 녹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덕에 볼링의 재미를 알았고 산의 소중함, 노동의 맛을 알았습니다. 생의 마지막에서 내던 그 온기는 후회와 원망을 태워버리기 충분했습니다. 아버지 덕에 수목장으로 향하는 길이 따뜻했습니다. 

 

작은 나무 밑에 아버지를 묻고 돌아오는 순간에도 여전히 멍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실감나지 않는 공허함을 깨닫는 동안, 탈상(脫喪)을 위해 다시 수목장을 다녀온 순간에도 멍했고 하루 종일 졸음만 쏟아졌습니다. 몇 번 더 잠들고 깨어나면 저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깊은 잠 속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묻어두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생을 살다가 그 곳으로 향할 때 아버지께서 못다한 꾸중 마저 다 듣겠습니다. 그때까지 그 곳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형님들과 편히 쉬세요. 

 

-----------------------------------------------------------------------------------------------------

 

지난주 월요일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상 치르고 하루 종일 잠만 자다가 뭐라도 써야할 것 같아서 글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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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제 얘기를 보는 줄 알았네요..... 심지어 볼링과 등산 이야기까지.... 저는 이 또한 매우 싫어했지만.....

영화 사도를 보면서 정말 많이 울었었죠.... 저와 제 아버지의 이야기여서......

하지만 그랬음에도 지금도 마지막 숨을 쉬던 그 순간을 함께 못한게 넘 죄송하네요.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01:25
21.01.17.
profile image

젊었을 때는 부모님의 죽음이 먼 이야기였는데...장례식 수고하셨고...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02:56
21.01.17.
profile image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재로 변하셨지만 아버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을 수위아저씨님 품에 안겨 행복하셨을 겁니다.

큰 일 치르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ㅠ

07:34
21.01.17.
청피망
관리자가 삭제한 댓글입니다.
08:42
21.01.17.
profile image

가족의 형태는 모두 다 다르고 심지어 구성원이 같아도 시간에 따라 달라지죠. 그러면서도 사람 사는 세상 크게 다르지 않다고 어느정도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아버지 생전 때 관계가 저도 굉장히 험악했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죽음' 앞에서 '원망'도 사라진다고 합니다. 백두대간 다 뛰어다니시던 분이 오롯이 정신을 가지고 눈동자외에는 육신에 갖혀 누워 보낸 세월을 생각하면 너무 가여워서 이 세상에 없는지 꽤 됐는데도 혼자있으면 여전히 눈물을 훔치게됩니다.

처음 사신 인생이라고 쓰셨지만 늘 글에서 묻어나오는 내공은 단단해서 이 모든 감정들을 잘 갈무리 하실거라 생각합니다. 아버님도 그걸 알고 눈을 감으셨을겁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09:42
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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