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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거성 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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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 감독과 함께 60년대 이후 홍콩 무협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며 아시아 최고의 스타로 군림한 왕우. 그는 드물게 스타 배우 그 이상의 것을 성취했고, 여전히 홍콩 영화계의 숨은 실력자로 알려져 있다. 부천영화제 왕우 특별전으로 내한한 그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 왕우가 걸어온 감독과 배우로서의 열정적인 삶, 당시 홍콩 영화계의 상황과 변화 그리고 무협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전설의 외팔이가 돌아왔다

1960∼70년대 아시아를 사로잡았던 홍콩 배우 왕우를 만나다

천황거성(天皇巨星). 왕우를 향한 홍콩인들의 진심어린 존경과 선망이 담긴 말이다. 모두가 그를 천황거성으로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은 계절이 바뀌는 자연의 섭리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인 까닭이다. 왕우는 단순히 일세를 풍미한 무협영화 스타라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분명 그 이상을 뛰어넘었고, 그로 인해 존경의 마음까지 이끌어낸 매우 특별한 배우였다.

왕우는 올해 63살로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든 나이다. 하지만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났을 때 ‘왕년의 액션 스타’라는 섣부른 생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그는 계속되는 일정으로 피로를 느낀다고 했지만, 질문이 시작되면서 대배우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리고 까다롭고 무서운 인물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는 3시간을 함께하면서(약속된 시간을 초과하면서 식사까지 하고 가라는 얘기에 생각도 못한 영광을 누렸다) 봄눈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알려진 것과 달리 유머가 풍부했고,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비상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1967)에서 연기한 외팔이 검객을 현실에서 그대로 만나는 듯 여전히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왕우는 변함없이 건재했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영화계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력자로 알려져 있고, 그 어떤 홍콩 스타들도 왕우의 말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전성기 시절에도 군계일학의 존재였듯이, 지금도 걸출한 후배 영화인들의 존경과 두려움을 한몸에 받는 패왕으로 군림한다.

쇼브러더스와 장철의 페르소나

불세출의 무협 스타 왕우는 1943년 3월18일 중국 장쑤성 출생으로, 본명은 왕정권(王正權)이다. 소년 시절에는 상하이에서 생활했고, 9살부터 무술 수련을 했다. 17살이 되던 해 홍콩으로 건너와 뛰어난 수영 선수로 활약했지만, 수구 경기에서 빚어진 싸움으로 그는 추방된다. 하지만 그 일은 전화위복의 결과를 낳는다. 어린 시절부터 배우의 꿈을 가지진 않았지만, 그의 끓어오르는 혈기와 변화의 기로에 서 있던 홍콩 영화계가 그를 운명처럼 배우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왕우는 위기에 처했던 베이징어 영화를 검극, 쿵후영화로 기사회생시킨 쇼브러더스와 1963년 처음 인연을 맺으면서, 같은 해 새로운 무협영화 스타일을 꿈꾸던 장철 감독의 <호협섬구>에 발탁되어 영화계에 데뷔하고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로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다. 외팔이라는 무사로서의 치명적인 약점을 극복하고 대협으로 성장하는 모습에 아시아의 젊은 관객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전율을 느꼈던 것이다. 또한 이 영화는 호금전의 <대취협>으로 시작된 ‘구파검극영화’의 거센 흐름의 물줄기를, ‘신파검극영화’로의 이행이라는 당시 홍콩 영화계의 시류 변화와 맞아떨어지면서 새로운 무협영화를 주도해나갔다.

감독으로서의 왕우

계속되는 성공에 왕우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지만, 그를 뛰어난 액션 배우로만 기억하고 평가한다면 그에게 큰 결례를 범하는 것이다. 왕우의 진면목은 스크린 밖에서 시작된다. 그는 늘 새로운 시도에 갈증을 느꼈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며 후배 액션 배우들과 차별화를 꾀했다. 또한 1인 독재 체제의 성격을 띤 쇼브러더스 체재에 당당히 맛선 배짱 좋은 배우로서도 유명하다. <용호의 결투>(1969)로 직접 감독까지 하겠다고 나선 것은, 당시 다른 배우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행동이다. 이에 대해 왕우는 “절친했던 장철 감독마저 나를 만류하며 배우로 그냥 남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을 정도라고 한다.


<용호의 결투>(1969)_##]이 일을 계기로 그는 배우들이 감독을 겸하는 길까지 열어놓았다. 왕우가 걸어온 배우와 감독으로서의 길은 무협영화의 역사나 다름없다. 왕우는 자신이 이룬 성공에 대해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라고 겸손을 표했지만, 그건 단순히 운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타고난 재능과 남다른 노력, 그리고 새로운 시도를 향한 굽힐 줄 모르는 의지가 더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을 갖추었기에 그는 천황거성(天皇巨星)으로 불렸을 것이다.

“젊은 관객들이 날 알아보니 신기하다”

여러 운동에 능하다고 알고 있다.

아홉살부터 5년간 무술 수련을 했다. 내가 연마한 것은 중국 대륙의 북방권이었고, 무술 수련의 특별한 동기는 없었던 것 같다. 그저 그 나이 또래 대부분의 사내아이들처럼 강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었고, 아무래도 싸움이 많은 나이이니 확실히 배워보자는 생각을 했었다. 그 뒤에는 수영을 하게 되었는데, 홍콩 대표로 3관왕을 차지한 경력도 있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건강만큼은 자부를 한다.

장철 감독의 <호협섬구>로 영화계 데뷔했는데, 당시 홍콩 영화계로서는 이례적인 일인 것 같다.

그렇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홍콩 배우들이 거의 대부분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서 성공을 하는데 나는 그들 가운데 운이 대단히 좋은 편이었다. <호협섬구> 오디션을 열었는데, 3명의 배우를 뽑는 데 3천명이 넘게 몰려왔고, 그중 한명으로 발탁됐다. 첫 데뷔작으로 비중있는 역을 맡았으니 운이 좋았다고 할밖에.

<호협섬구>로 장철 감독과 처음 작업을 했고, 이를 두고 운명의 만남이라고들 한다.

장철 감독은 대단히 박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특히 중국 문학에 많은 지식이 있었지만, 무술쪽으로는 조예가 없었다. 초기에는 여성들이 나오는 영화를 주로 찍었고, 이후 무협영화로 눈을 돌리면서 자신이 모자란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무술 배우들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첫 만남이 있은 뒤 굉장히 친해졌지만, 영화를 같이 하지 않으면서 관계가 조금은 소원해진 것 같다. 그의 스타일은 대단히 남성적이며 거친 액션을 추구했는데, 그 점이 나와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호협섬구>를 시작으로, 적지 않은 영화를 그와 함께했다.

첫 주연작인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의 히트로 홍콩 영화계의 스타가 됐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는 ‘구파검극영화’에서 ‘신파검극영화’로 넘어가는 당시 홍콩 영화계의 시류 변화와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 성공의 한 요인인 것 같다. 관객이 영화에 매료된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가 나오기 전까지는 중국 윤리 사상이 녹아 있는 영화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이전의 무협영화들은 사실적인 액션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는 그와는 다른 변화를 시도한 작품이었다. 그 점이 영화 성공의 큰 이유라고 생각하는데, 그 무엇보다 현실적인 액션을 만들고자 노력을 기울였고 그것이 관객에게 주효했던 것 같다.

영화 개봉 당시 극장에서 관객과 함께 영화를 보았는데 그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다. 이전에는 극장에서 그런 예가 없었다. 주인공이 고난을 겪고 우여곡절 끝에 통쾌한 복수를 한다는 것이 당시 관객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것 같다.

외팔이 캐릭터가 가쓰 신타로 주연의 <자토이치>의 영향이라는 얘기가 많다.

<자토이치>의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는 사실무근이다. 외팔이 캐릭터는 전적으로 나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출연한 영화 주인공들의 스타일이 모두 다른데, 그 부분에서 나는 많은 고민을 하고 연기에 임한다. 다른 영화를 보고 그걸 흉내내곤 하지 않는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의 오리지널 각본은 나랑 절친한 사이인 예광(무협소설 평론가로도 유명하다)이 썼고, 거기에 장철 감독이 많은 변화를 준 것이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의 무술감독을 맡은 유가량과의 작업은 어땠나.

그 당시엔 유가량과 당가가 무술 지도로 가장 유명했다. 두분 다 무술에 관해서는 대단한 실력자였고 영화를 할 당시에는 한팀이었지만, 이후에는 독립적으로 활동을 했다. 당가는 지금도 꾸준히 활동을 하고 있지만, 유가량은 건강이 좋지 못해 지금은 무술 지도가 힘들다. 나와 유가량은 매우 가까운 사이인데, 유가량은 특히 병장기를 다루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가량의 아버지가 황비홍의 실제 제자였기 때문에,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금연자> 등의 잇단 성공으로 홍콩인들이 존경과 동경의 마음을 담아 ‘천황거성’이라 불렀다고 알고 있다. 당시 어느 정도의 인기를 누렸는지 기억에 남는 일화를 들려달라.

내 자신의 인기를 증명할 증거는 지금은 없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스타가 된 뒤에 일어난 잊지 못할 사건이 하나 있었다. 나는 배우가 된 뒤에도 싸움을 굉장히 많이 했는데, 한번은 타이에 갔을 때 일어난 일이다. 일행과 술을 마시고 있는데 한 양아치가 만취한 채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나를 즉시 알아보고는 가까이 와서는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었는데, 그 행동이 나를 격분케 했다. 그가 만약 여성이었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만, 그건 충분히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이어서 그의 팔을 거칠게 쳐내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급기야 그가 총을 꺼내서 나를 겨누었고, 그 총을 제압하고 계속 싸움을 했다. 그 일로 한 달 동안 출국을 못하게 되었지만, 결국 라오스를 통해서 배를 타고 몰래 빠져나왔다. 결국 타이에서는 내게 수배령을 내렸고, 덕분에 몇 년간 그곳에 갈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하다. (웃음)

기존의 검극영화를 벗어난 본격 쿵후영화인 <용호의 결투>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감독까지 겸했는데, 당시 배우가 감독을 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맨 처음 장철 감독에게 <용호의 결투>에 대해서 의논했었는데, 그 역시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서 내게 그렇게 하는 건 좋지 않다라고 말을 했다. 그냥 지금의 배우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이 어떻겠냐고 충고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나는 많은 시간을 고민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구상하고 스스로 감독을 맡았다.

영화는 기대 이상 성공했고, 그 이후로 홍콩에서 배우들이 감독을 하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용호의 결투>는 한국의 남한산성에서 촬영했었는데, 당시 내가 본 한국의 모습과 지금을 비교하면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때는 쌀밥을 먹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고, 온통 벌판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많이 놀랐다.

직접 감독까지 한 <용호의 결투>도 엄청난 성공을 했지만, 당시 쇼브러더스 체제에서 꿈을 펼치기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을 것 같다. 여러 가지 불화로 레이몬드 초와 쇼브러더스를 떠나게 되었는데 어떤 일들이 있었나.

쇼브러더스와의 불화로 내가 떠났다는 것은 루머다. 당시 사장은 란란쇼였고 프로덕션 매니저로 있던 레이몬드 초가 넘버2였다. 나는 레이몬드 초와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회사를 떠날 때 자신이 영화사를 차리는 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제의를 해왔다. 나는 그와 가까웠기 때문에 그러마라고 말을 했고, 뒤에 골든하베스트에서 제작하는 영화에 무보수로 출연을 해줬다. 막 회사를 차린 입장이어서 돈도 많지 않았고, 당시 내가 받는 영화 출연료인 100만홍콩달러(10만달러)를 받지 않고 영화에 참여했었다. 불화로 회사를 떠난 게 아니었고, 직원이 스스로의 입지를 굳히다보면 자신의 회사를 차리는 건 흔한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쇼브러더스 시스템에서는 분명 여러 가지 불이익을 겪지 않았나? 회사가 안은 어떤 문제점이 레이몬드 초가 골든하베스트를 창립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느 회사나 안 좋은 부분도 있게 마련이다. 쇼브러더스는 사장인 란란쇼가 가져가는 돈이 지나치게 많았다. 나는 쇼브러더스에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었지만, 란란쇼는 그런 나에게 소홀했다. 가령 내가 1만 달러를 벌어다주었다면 그는 나에게 1천 달러 정도만 지급하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곤 했다.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절대로 안 들어주는 스타일이었다. 배우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은데, 그는 자동차를 지급하자면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를 대곤 했었다.

그런 일이 계속 이어졌는데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여배우가 너무 돈을 주지 않아 생활이 어렵게 되자, 결국 몸을 파는 극단적인 일까지 일어났다. 그녀의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내가 한 얘기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반면 골든하베스트를 창립한 레이몬드 초는 달랐다. 그는 배우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그들에게 많은 이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쇼브러더스와의 결별 뒤 대만으로 이주를 했고, 다시 홍콩 영화계로 화려하게 복귀를 했다. 복귀작이 일본 가쓰프로덕션과 골든하베스트의 합작영화인 <신 자토이치/부숴라! 중국검>인데, 중국(외팔이)과 일본을 대표하는 두 검객이 대결을 벌인다는 아이디어가 대단히 흥미롭다. 어떤 과정을 통해 제작이 이루어졌나.

<신 자토이치…>는 내가 출연료를 받지 않고 참여한 작품이다. 전적으로 레이몬드 초의 아이디어로 제작되었다. 그는 쇼브러더스에서 나오면서 골든하베스트를 알리는 데 많은 고심을 했다. 그래서 일본에서 <자토이치>가 유명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고자 했다. 외팔이와 자토이치 두 무사를 섞으면 동남아 지역에서 상당히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고, 일본 가쓰프로덕션에 문의를 하니 흔쾌하게 승낙을 했다.

결과는 레이몬드 초의 생각이 맞았다. 영화는 크게 성공했고 신생 제작사였던 골든하베스트를 알리는 데 일조했다. 다만 영화 성격상 두 나라를 배려해서 일본 개봉에서는 내가 지는 것으로, 홍콩 개봉에서는 내가 이기는 것으로 결말을 달리했다. 그건 상업적인 결정이기도 하지만, 그 나라의 자존심이기도 했으니까. 다행히 관객은 전혀 다른 결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화에 대한 이해가 높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토이치> 시리즈로 유명한 가쓰 신타로와의 공연은 어땠나.

가쓰 신타로는 사람이 아주 좋았는데, 나와 성격이 같았다. 누구에게든 지기 싫어했다. 영화 제작 결정이 나고 내가 일본으로 가게 되었을 때 가쓰프로덕션의 한 사람이 가쓰와 절대로 술을 먹지 말라고 당부를 했었다. 워낙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큰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와 난 결국 술내기를 시작했다. 승부가 나지 않자 서로 오기가 생겼고, 간장 먹기 내기로 바꾸었지만 역시 결판이 나지 않았다. 다시 고추기름 먹기 내기를 하게 되었는데, 20분 뒤 가쓰 신타로가 병원으로 실려갔다. 이 일이 신문 기사에도 실리고 해서 제작사에서 많이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말이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것은 그의 인사였다. ‘Thank you very much’를 말하는데, T발음이 잘되지 않아서 ‘Fuck you very much’로 자꾸 들려서 모두가 웃었던 일이 있다.

<신 자토이치…>는 제작 방식에서 홍콩이나 대만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다. 어떤 차이점들이 있었나.

일본은 준비 과정에서 철저하게 임한다. 토론을 하고 스케줄을 짜고 그에 맞추어서 정확하게 일을 했다. 홍콩은 사실 엉망이었다. 하지만 홍콩 입장에서 얘기를 한다면 그건 융통성이 있다는 얘기도 된다. 가령 야간 작업을 하자고 하면 홍콩의 스탭들은 오케 오케~ 하면서 넘어가는 식이지만, 일본 사람들은 돈을 더 주고 하라고 해도 안 하는 식이었다. 물론 나머지 작업을 할 때는 수당을 주고 일을 했지만, 그런 부분들이 홍콩이나 대만과는 많이 달랐다. 이건 스탭들에 대한 얘기이고, 배우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추가 작업은 다들 싫어한다. (그는 나에게 한국영화의 작업 방식은 어떤지 물었고, 홍콩이나 대만과 다르지 않다고 대답을 해주었다)

<오금강>(The New Spartan)과 <The Man from Hong Kong>에서도 해외 스타들과 작업을 했다.

<오금강>은 독일·영국 합작영화로, 미후네 도시로, 올리버 리드, 프레드 윌리엄슨 등과 공연했다. 내가 중국 검객이었고, 미후네 도시로가 사무라이, 그리고 존 웨인처럼 총잡이 캐릭터도 있었다. 영화가 완성이 되었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제작비 조달 문제가 발생하면서 중단되었다. 아마도 완성되고 공개되었다면 크게 히트를 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007 여황폐하 대작전>에서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던 조지 라젠비와도 영화를 같이 했었다.

또 다른 히트작인 <독비권왕> <독비권왕대파혈적자>도 아이디어가 번득인다. 기존의 외팔이 검객에게 변화를 주었고, <독비권왕혈적자>에서는 영화를 본 사람들 모두가 혈적자를 기억하게 된다. 그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독비권왕혈적자>(1975)_##]<독비권왕>은 검이 아닌 주먹과 발을 쓰는 캐릭터로 변형을 했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단지 연기를 할 때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검을 가지고 액션 연기를 할 때는 동작이 세밀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비교적 쉬운 편이지만, 주먹과 발을 위주로 하는 연기는 아무래도 까다로운 면이 있었다.

<독비권왕혈적자>에 나오는 독특한 무기는 청나라 때 황제에게 불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반역의 기미가 있으면 밀사를 보내서 일을 처리하게 했는데, 그들이 하는 일이 불순자들의 머리를 가져오는 것으로, 거기서 유례가 되었다. 황제가 보낸 밀사가 바로 혈적자이다. 이런 이야기를 알고 언젠가는 영화에서 사용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영화에 즉각 반영했고 관객도 좋아했다.

80년대 들어서 후배들과도 영화를 같이 했다. 성룡은 무명 시절 <풍우쌍유성>(국내 제목은 <유성검의 비밀>)에 출연을 했다.

후배 액션 배우들과 영화를 꽤 했었다. 홍금보가 감독했던 <용적심>에서는 프로듀서로 참여했었다. 직접 같이 연기를 한 작품들도 꽤 된다. <풍우쌍유성>에서 성룡과 같이 영화를 하긴 했지만, 그 당시 그는 완전 무명이었기 때문에 악역으로 출연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는 탈옥영화 <화소도>에서 작업을 했고, 홍금보와는 특히 친했기 때문에 길지는 않지만 그의 영화 <부귀열차>에도 출연을 했었다.

최근 액션영화들에 대한 생각은 어떻나.

내가 영화를 할 때는 무엇이든 몸으로 다 때웠다. 한번은 줄을 매달고 20층 높이의 빌딩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기술이 워낙 좋아져서 그런 장면들은 대부분 특수효과로 처리를 하면 그만이다. 아마 이런 차이가 아닐까? 순수한 액션과 기술 액션의 차이, 그 차이라고 생각한다.

부천영화제에서 젊은 관객과의 만남은 어떠했나.

젊은 관객이 내 영화를 보러 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들이 내가 활동하던 시대에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몇 십 년이 지난 영화를 일부러 찾아서 보고, 또 나를 알아본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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