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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하라, 그리고 창조하라!

<에반게리온: 서(序)>는 시작일 뿐이다. 두 번째 작품의 제목이 <에반게리온: 파(破)>라는 정보를 얻은 에반게리온의 팬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을 사실이다. 서(序)는 시작이고 파(破)는 파괴다. 그러나 안노 히데아키가 이 정도로 철저하게 오리지널을 파괴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에반게리온: 파>는 파괴다. 오리지널을 산산조각낸 뒤 생각지도 못한 떡밥들로 재봉합하는 열혈의 드라마다. 당신이 지금까지 <에반게리온>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는 소리다. 안노 히데아키는 공든 모래성을 깨부수고 새로운 성을 쌓았다.

<에반게리온: 서>는 완벽하게 새로운 시작은 아니었다. 스토리는 오리지널 TV 시리즈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주요 캐릭터의 성격도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니었다. 재패니메이션의 기술적 극대치를 보여주는 액션장면을 제외한다면 <에반게리온: 서>는 후속편을 위한 서두에 불과했다. 팬들은 같은 콘텐츠를 사골처럼 우려먹는다는 의미에서 <에반게리온>을 ‘사골게리온’이라고 불러왔다. <에반게리온: 서>도 어떤 면에서는 사골을 고아먹는 안노 히데아키와 가이낙스의 야욕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반게리온: 서>의 진정한 가치는 <에반게리온: 파>의 예고편이었다. 짧은 예고편은 새로운 캐릭터, 새로운 에반게리온, 새로운 사도로 가득했다. 안노 히데아키는 선언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서>는 <파>의 변화를 알린 예고편

eva3.jpg안노 히데아키의 10년 전 말을 다시 상기해보자. “훌륭하게 끝낸다는 것 자체가 싫습니다. 어렸을 때 프라모델을 완성한 뒤 불로 모조리 태워버리는 일이 가끔 있었습니다. 훌륭한 완성이라는 것 자체가 싫었습니다.” 안노 히데아키의 파괴본능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TV시리즈의 최종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참 진행되던 스토리는 갑자기 멈춰버리고 모든 것이 정신병원에 누워 있는 이카리 신지의 망상인 듯 끝나버렸다.

생각해보면 TV시리즈 자체가 망상에 가까웠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일본 특유의 거대 로봇물과 열혈 청춘물을 비틀고 꼬아낸 작품이었다. 주인공 소년은 오로지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로봇에 오르고, 주인공들이 속한 조직 네르프는 지구를 위해 싸우는 건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으며, (여전히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인류보완계획과 제레 등 수많은 떡밥들이 곳곳에 들어차 관객을 괴롭혔다.

팬들은 TV시리즈 최종회에서 안노 히데아키의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안노는 기대를 배신하며 팬들을 조롱했다. 열도가 분노로 끓어올랐다. 안노 히데아키는 ‘정 원한다면 엔딩을 보여주지’라는 듯 TV시리즈가 끝난 지 2년이 지난 1997년에 두 편의 극장판을 내놓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데스 & 리버스>와 <신세기 에반게리온: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다. 엔딩은 있었다. 모두가 원하던 엔딩은 여전히 아니었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마지막에 홀연히 깨어난 아스카는 극장을 메운 관객을 향하듯 말했다. “기분 나빠.”

이야기, 세부 설정, 캐릭터 성격까지 모두 바꿔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났다. 90년대 중, 후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보며 자기파괴적인 사춘기 소년 신지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던 감독과 팬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성장했다. 그리고 안노 히데아키는 총감독이라는 이름으로 <에반게리온: 서>를 내놓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사토는 주인공 이카리 신지를 향해 외쳤다. “다시 한 번 일본의 모든 에너지와 우리의 바람, 인류의 미래, 살아남은 모든 생물의 생명을, 너에게 맡길게.” 열혈로 불타오르는 미사토의 대사는 앞으로의 <에반게리온>이 결코 10여 년 전과 같을 순 없다는 단언이었다. <에반게리온: 파>는 <에반게리온: 서>가 슬그머니 보여준 변화의 조짐을 온몸으로 부르짖는 영화다. 안노 히데아키와 제작진은 아예 작정을 한 모양이다. 이야기와 세부 설정은 완전히 달라졌고, 캐릭터의 성격도 변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파괴를 향해 달려간다.

<에반게리온: 파>의 내용을 완전히 까발리는 건 무리다. 원전을 파괴하는 쾌감 자체가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만 미약하게나마 달라진 부분들을 미리 짚어보는 건 필요하다. <에반게리온: 서>가 TV시리즈의 1화부터 6화까지를 다시 만든 것이라면 <에반게리온: 파>는 7화부터 22화까지를 바탕으로 재조립한 영화다. 당연히 많은 축약이 이루어졌다. 강산의 점액체를 분출해서 지하의 네르프 본부를 공격하던 제9사도 마타라엘이나 신지와 아스카의 합동공격으로 격퇴당하는 제7사도 이스라펠은 사라졌다. 대신 단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새로운 디자인의 사도들이 시시각각 등장한다. TV시리즈에서는 거의 마지막에나 공개되던 네르프 본부 지하의 릴리스와 나기사 카오루 캐릭터는 초반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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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변화는 새로운 캐릭터인 안경 쓴 미소녀 마키나미 마리다. 새로 등장하는 ‘에반게리온 가설 5호기’에 탑승하는 그녀는 아스카로부터 전투적인 면만을 모조리 흡수해서 만든 듯한 캐릭터다. 그녀는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에 처해서도 “하지만 재미있으니까 괜찮아”라고 소리지른다. 때문에 <에반게리온: 파>에서 아스카 캐릭터는 TV시리즈보다 역할이 많이 축소됐다(그리고 아스카의 운명 역시 TV시리즈와는 완전히 달라진다).

쓰루마키 가즈야 감독에 따르면 마리는 “목소리조차 안 나와도 된다고 할 정도로 비중이 없는 캐릭터”였다. 마리를 전면에 내세우기로 결심한 건 안노 히데아키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쓰루마키 감독에 따르면 안노 히데아키의 서비스 정신이다. “이건 제 생각인데 <에반게리온: 서>가 크게 흥행하면서 좋은 평을 듣고 (마리가 등장한) 예고편도 엄청난 호응을 받자 안노 총감독이 관객에게 좀 더 서비스하고 싶어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서비스의 구체적인 수단이 바로 마리의 비중을 높이는 거였겠죠.”

아야나미 레이라는 기념비적인 미소녀 캐릭터로 단단히 장사를 해먹었던 안노가 또다시 미소녀로 팬층을 공략하려는 심보를 부리고 있는 거다. 더욱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마리가 ‘파괴’라는 키워드의 핵심이 될 수 있는 캐릭터라는 거다. 에바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견고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캐릭터를 단순히 바꾸는 것만으로 완전한 변화를 추구하긴 힘들다. 그래서 안노 히데아키는 아예 새로운 캐릭터의 비중을 높여서 이야기를 완전히 변형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쓰루마키 가즈야 감독은 증언한다. “안노 총감독에게 마리의 캐릭터를 설명해 달라고 했더니 아주 추상적인, 테마에 관한 이야기만 하더군요. ‘마리를 등장시킴으로써 에바의 세계를 파괴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마리가 ‘파’라는 부제를 상징하는 캐릭터란 이야기는, 캐릭터의 그런 테마적 특성을 이야기에 직접 투영하라는 뜻이었기 때문에 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습니다.”

상상도 못한 정서의 변화, 바로 ‘열혈’

그런데 파괴만으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야기와 캐릭터를 파괴한다고 해도 오리지널 TV시리즈와 똑같은 정서라면 새로운 에바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에반게리온: 파>가 그저 파괴만을 향해 달리는 영화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에반게리온: 파>의 첫 번째 키워드가 ‘파괴’라면 두 번째 키워드는 (믿을 수 없게도) ‘열혈’이다. 도저히 <에반게리온>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단어는 <에반게리온: 파>의 곳곳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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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리 신지, 아야나미 레이, 아스카는 더 이상 잃어버린 사춘기와 부정/모정을 갈구하며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정신병적 캐릭터가 아니다. 신지는 아버지 겐도의 냉정함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새로운 부자관계를 만들어보려고 애쓴다. 아스카는 무조건 톱이 되려고 바득바득 소리치는 대신 신지, 레이를 비롯한 학교 친구들과 친해지려 노력한다.

더욱 놀라운 건 아야나미 레이다. 사실상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이 표정 없는 인형은 <에반게리온: 파>에서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됐다. 그는 심지어 겐도 사령관과 식사 중에 신지를 다음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싶다며 요리를 배우기까지 한다. 그리고 세 명의 소년소녀는 자신의 상처를 봉합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지구를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더 이상 신지가 에바에 안타도 되게 할 거야”라고 말하는 아야나미 레이의 모습에서 ‘열혈’의 청춘이 불타오른다. 상상도 못한 변화다.

혹시 <에반게리온: 파>의 열혈로 가득한 정서야말로 안노 히데아키가 10여 년 전 진정으로 바랐던 에바의 모습이었던 건 아닐까.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로봇 아니메의 전통적인 정서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나서 가이낙스는 두 편의 열혈 아니메를 만들어냈다. <톱을 노려라!: 건버스터>의 후속편인 <다이버스터>, 2007년에 일본 방영한 TV시리즈 <천원돌파 그렌라간>이 그들이다.

특히 <천원돌파 그렌라간>은 한국에 제대로 소개된 적은 없지만 <에반게리온: 파>의 변화한 분위기를 읽어내는 데 중요한 작품이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은 어린 소년이 거대한 힘을 지닌 로봇을 조종하면서 성장해간다는 전통적인 로봇 성장물이다. 이 익숙한 로봇물에 사람들이 열광한 이유는 <천원돌파 그렌라간>이 <마징가 Z> 같은 나가이 고 원작 로봇 아니메들처럼 70년대 이후 거의 사라진 열혈 로봇물의 향취를 되살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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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천원돌파 그렌라간>은 1997년 가이낙스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성취한 걸 완전히 되돌리는 작품이었다. 정신병리학적인 해체주의 로봇 아니메는 이제 시효를 다했고 지금 필요한 건 팬들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열혈 로봇 아니메라고 가이낙스 스스로 선언한 셈이었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탄생시켰던 가이낙스의 터줏대감들이 아니라 젊은 신진세력에 의해 만들어진 아니메라는 사실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가이낙스도, 안노 히데아키도, 이제는 깨달았을지 모른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시대는 끝났고 지금은 새로운 정서와 이야기가 필요한 시대라고. <천원돌파 그렌라간>처럼 열혈 로봇 아니메로서의 <에반게리온> 말이다.

곳곳에 배치된 팬 서비스용 떡밥들

물론, 벌써부터 새로운 극장판에 대해 완벽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파괴와 열혈의 드라마는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이다. 안노 히데아키와 가이낙스의 진정한 의도는 마지막 극장판이 공개되는 날 비로소 알 수 있을 거다. 게다가 의중을 알 수 없는 안노 히데아키의 떡밥은 여전하다. <에반게리온: 파>에는 에반게리온 마니아만이 눈치챌 법한 떡밥들이 한없이 이어진다. 이를테면 <에반게리온: 파>의 바다는 붉은색이다.

영화에서는 이것이 전 지구를 종말 직전으로 몰아갔던 대재앙 세컨드 임팩트의 결과라고 말한다. 문제는 TV시리즈 속 바다는 언제나 푸른색이었으며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붉은색으로 바뀌었다는 거다. 이번 극장판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그리고 다음편에서야 본격적으로 활보하게 될) 카오루의 대사, “넌 변한 게 없구나”는 이미 그가 주요 캐릭터들(특히 이카리 신지)을 알고 있었다는 말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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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새로운 에바 극장판은 TV시리즈의 재구성이 아니라 속편인 걸까. 그렇다면 극장판은 타임머신을 타고 TV시리즈의 첫 회로 돌아간 조물주(안노 히데아키)가 보여주는 평행우주의 광시곡이란 말일까. 믿거나 말거나. 새로운 <에반게리온>의 끝에 뭐가 있을지는 마지막 극장판이 개봉하는 날에나 알 수 있을 거다. 모든 것은 안노 히데아키의 머리와 가슴속에 들어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에반게리온: 파>의 두뇌를 강타하는 파괴의 쾌락과 가슴을 걷어차는 열혈의 드라마를 넋 놓고 즐기는 것뿐이다. <에반게리온>은 다시 한 번 활활 타오른다.

 에바 3대의 신도쿄시 질주 장면 압권

<에반게리온: 파>는 지금 재패니메이션 영화 미학의 최절정에 올라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기술적인 부분에서 <에반게리온: 서> 역시 기념비적이었다. 10여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술적 진보는 <에반게리온: 서>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맞먹는 스펙터클의 쾌락을 수놓았다. 특히 <에반게리온: 서>의 야시마 작전은 작화와 CG 같은 기술적인 면에서나 관객의 감정을 순식간에 끌어올리는 감정적인 면에서나 두고두고 곰씹을 만한 명장면이었다.

그런데 <에반게리온: 파>를 보고나면 야시마 작전은 그저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에반게리온: 서>가 부분적으로 CG를 도입해 전통적인 셀애니메이션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노력했다면 <에반게리온: 파>는 거의 모든 액션장면에서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어두운 공간에서 에반게리온이 형광색을 빛내며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나 기괴한 모양새로 변신하는 사도의 모습은 CG가 아니면 불가능한 부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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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마키 가즈야 감독은 배경의 움직임까지 CG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이 <에반게리온: 파>의 새로운 시도였다고 말한다. “CG 분량은 오히려 만들면서 점점 늘어났습니다. 언제나와 같이 해보고 결과가 좋으면 늘리는 방법이었죠. 에반게리온 3대가 신도쿄시를 질주하는 액션장면도 처음에는 단순히 반복 부분만 CG로 할 예정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엄청나게 양이 늘어났습니다. 그건 CG업체쪽에서 저희가 요구한 것 이상의 영상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쓰루마키 감독이 말하는 질주장면은 신지의 초호기와 레이의 영호기, 아스카의 2호기가 제7사도에 대항해서 싸우는 시퀀스다. 우주로부터 신도쿄시로 떨어져내리는 사도를 잡기 위해 세대의 에반게리온이 도시를 파괴하며 질주하는 이 시퀀스는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액션 시퀀스 중 하나로 꼽을 만하다. <에반게리온: 파>가 일본 박스오피스에서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을 완전히 짓밟은 것은 단순한 애국주의적 현상이 아니다. 안노 히데아키와 가이낙스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를 무기로 할리우드와 대항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예술가/기술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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