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은 은근슬쩍 정신분열증적인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21세기의 스타일로 업데이트한 <추적자>입니다. 원주민 마법사에게 납치된 백인 소녀를 구출하려는 모험담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클래식 할리우드 시대처럼 단도직입적으로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영화의 시대 배경은 1880년대 중반의 뉴 멕시코입니다. 이미 원주민과 백인간의 전쟁은 백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고 전기나 축음기와 같은 에디슨의 발명품들이 새로운 문명시대를 알리던 때죠.
주인공 매기 길크슨은 딸 둘과 함께 살고 있는 목장주입니다. 어느 정도 의학지식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을 치료해주며 돈을 받기도 하고요. 그러던 어느 날 매기와 아이들에게 가족을 버리고 아파치족이 된 아버지 사무엘이 찾아옵니다. 매기는 그런 아버지를 매몰차게 내쫓지만 백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원주민 마법사가 일꾼들을 죽이고 큰 딸 릴리를 납치하자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없어요.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설정은 정치적 공정성을 의도하는 영화에 그렇게까지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이 이야기가 먹히려면 원주민 악당이 철저하게 사악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과연 그게 쉬운 일일까요? 아무리 정치와 역사에 무신경한 현대 관객들도 4,50년대 관객들처럼 쉽게 '사악한 인디언'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는 못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교육을 받은 거죠.
그래서 영화는 몇가지 변명을 하려 합니다. 영화는 일단 악당인 원주민 마법사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지 역사적 이유를 설명합니다. 다음에 영화는 문화적으로 거의 아파치가 다 된 아버지와 원주민에게 극단적인 편견을 품고 있는 딸의 대립과 화해의 이야기를 넣습니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균형잡기'를 시도합니다. 악당 중에 백인들을 몇 명 넣고 피해자와 착한 주인공들인 원주민 캐릭터들을 몇 명 넣어 주인공 편을 들게 하는 거죠.
첫번째 변명은 잘 썼다면 먹힐 수도 있었을 겁니다. 두번째 변명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다른 영화에 더 잘 먹혔을 거고요. 마지막 변명은 영화를 망쳐놓습니다. 괜히 쓸데없이 균형을 잡는 통에 서스펜스는 약화되고 드라마는 이리저리 퉁퉁 튀거든요. 결정적으로 영화의 진정성이 심하게 떨어집니다. 변명은 진담같지 않고 변명에 치중하다보니 액션도 성의가 없어지는 거죠.
아쉬운 일입니다. 만약 괜한 변명 따위는 잊고 이 소재를 단도직입적으로 다루었다면 이 영화는 당시 미국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급조된 화해로 장식된 지금의 버전은 오히려 당시 역사의 처참함을 외면할 뿐이에요.
영화는 훌륭한 호러물이 될 수 있는 기회도 놓쳤습니다. 스타일면에서 이 영화는 아직도 그럴싸한 장면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기가 살해당한 목장 식구들을 발견하는 장면을 보세요. 분위기 죽이지 않습니까? 정치적 공정성과 흥행영화의 안전성에 신경쓰지 않는다면 원주민 마법사는 정말 무서운 악당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실종>은 여전히 능숙한 감독이 훌륭한 배우들과 스탭들을 끌고 만든 잘 빠진 할리우드 영화입니다. 하지만 너무 예의를 차리고 너무 조심하는 통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작품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결국 이것도 할리우드식 실패가 아닌가 싶습니다. (04/03/03)
기타등등
케이트 블란쳇과 에반 레이첼 우드가 모녀로 나온다니, 이건 정말 환상의 캐스팅이었죠. 유감스럽게도 두 사람이 같이 나오는 장면들은 몇 안된답니다. 내용상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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