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간단히 정리한다면, <시리아나>는 마약 대신 석유를 다룬 <트래픽>입니다.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트래픽>의 각본가인 스티븐 개건이 이 영화에서도 연출과 각본을 맡았으니 특별히 잘못된 건 아니죠. 적어도 개건이 로버트 베어의 논픽션인 <See No Evil: The True Story of a Ground Soldier in the CIA's War on Terrorism>에서 재료를 모아 영화각본을 쓸 때 가장 먼저 모델로 삼았을 작품은 <트래픽>이었을 겁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석유입니다. 출연하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중동 석유의 흐름과 연결된 사람들이죠. 미국의 손아귀 안에서 벗어나 나라의 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중동 왕자, 왕자에게 채용된 에너지 아날리스트, 그를 암살하려는 CIA 요원, 다소 수상쩍은 상황에서 합병한 두 미국의 석유 회사, 그와 관련된 변호사, 이슬람 근본주의자에게 포섭되어 자살 테러리스트가 된 평범한 청년... 영화는 이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영화 초반은 꽤 헛갈립니다. 사실 헛갈리는 건 중반이나 후반도 마찬가지죠. 눈 똑바로 뜨고 집중하지 않으면 정보들이 하나씩 날아가고 그 정보의 부재는 계속 누적되니까요.
그러나 영화의 설정과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석유예요. 인간들은 도구이며 디테일입니다. 중요한 건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정치, 경제적인 시스템과 그와 관련된 음모입니다. 관객들이 그 흐름을 온 몸으로 체험한다면 영화는 자기 일을 한 겁니다. 정보 몇 개가 누락되어도 상관 없어요.
그렇다고 이 영화가 건조하기 짝이 없는 정치 선언이냐... 일단 <시리아나>가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는 투명한 영화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밝혀야 할 것 같군요. 영화엔 분명한 정치적 메시지가 있고 모든 이야기들은 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길입니다. 하지만 건조한 영화는 아니에요. 겉보기엔 무표정하고 덤덤하지만 세상과 시스템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지요. 그리고 그 분노는 이 영화에서 힘입니다.
석유에게 주연자리를 내준 스토리 라인도 오히려 드라마에 덕이 됩니다. 아무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미로와도 같은 상황은 그 혼란 속에서 필사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실천하거나, 시스템에 굴복해 같이 타락하거나, 그 안에서 길을 찾으려 시도하거나, 포기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근사한 음영을 넣어주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 캐릭터들은 자신의 에고를 멋대로 휘두르지 않는 훌륭한 배우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어요. 조지 클루니, 알렉산더 시딕, 맷 데이먼, 크리스토퍼 플러머, 제프리 라이트... 클루니와 데이먼의 경우, 돈 걱정 하지 않고 맘에 드는 영화에 자신을 투자할 수 있는 그들의 여유가 부러울 뿐이죠. :->
제가 본 상영관에서는 관객들이 이 영화가 끝나자마자 "뭐, 이런 영화가 있어?"하며 기겁하고 나가더군요. 그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사전 지식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시리아나>가 대중적인 매력이 없는 따분한 영화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이 영화는 무척 재미있어요. 스토리는 혼란스럽고 이야기는 완벽하게 소화하기 어렵지만, 그런 혼란스러운 미로는 40년대 필름 느와르나 70년대 에스피오나지 장르의 매력이기도 했잖아요.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영화가 어떤 작품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관객들에게 <시리아나>는 정말 멋진 '오락'이 될 수 있습니다. (06/04/04)
기타등등
'시리아나'라는 제목의 의미를 알고 싶으시다면 여기로 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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