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은 기본적으로 힘의 쾌락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평범하고 소극적인 한 소년이 초능력을 얻게 된 뒤 체험하게 된 엄청난 즐거움 말이에요. 물론 영화 중반을 넘어서면 그도 그런 힘을 가진 자의 의무와 그 부작용에 대해 알게 되지만, 사실 관객들에게 그것들은 의무적인 사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파이더맨 2>에서 우리의 주인공 피터 파커에게 그것들은 더 이상 사족이 아닙니다. 초반의 짜릿한 흥분이 지나자 스파이더맨의 능력은 더 이상 그에게 처음만큼의 즐거움은 주지 못합니다. 이제 그를 따라다니는 것은 과로로 인한 피로감과 엉망이 된 사생활, 거의 재앙에 가까운 경제 상태입니다. 드디어 시리즈가 본류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죠. 원작 <스파이더맨> 자체가 이런 이야기였으니 말이에요.
영화의 스케일은 커졌습니다. 일단 1.85대 1의 화면 비율이 2.35:1로 늘어난 것부터 눈에 들어오는군요. 스파이더맨이 겪는 모험도 훨씬 스케일이 커졌고요. 하지만 이게 꼭 스펙터클의 시원스러움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찔아찔한 수직 추락의 곡예를 선보였던 전편과는 달리, 이 영화의 액션은 보다 기술적으로 세련된 수평 이동입니다. 다시 말해, 액션의 흥분이 어느 정도 사라진 대신 노련하고 일상화된 기교가 늘어난 것이죠.
초자연적인 액션보다 더 비중이 큰 건 일상의 드라마입니다. 일상이라는 표현을 달기엔 참 드라마틱하지만요. 피터와 메리 제인의 연애담은 멜로드라마틱한 극단을 오가고, 피터의 존재 위기는 햄릿과 맞먹는 내적 갈등을 수반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들은 피터가 가면을 벗고 있을 때 일어납니다.
<스파이더맨 2>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이런 이야기를 놀랄만큼 진솔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원작 자체가 그런 이야기이긴 합니다. 출신부터가 무척 평범한 젊은이인 피터 파커는, 외계인 수퍼맨이나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은 거부인 브루스 웨인과는 달리 우리가 훨씬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여전히 이 이야기는 미친 과학자 악당을 상대로 하는 스판덱스 옷을 입은 초능력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진솔함은 여전히 놀라울 수밖에 없어요.
이유는 이 영화의 복고성에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스파이더맨>이 태어난 60년대엔 이 현실적인 수퍼 히어로는 최첨단의 쿨한 주인공이었습니다. 하지만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스파이더맨의 쿨함은 보다 친숙한 정겨움으로 바뀌었지요. 이 영화의 피터 파커는 끊임없이 불평을 중얼거리기는 하지만 선과 악의 문제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냉소주의자 따위는 아닙니다. 그는 자기 힘이 닿는만큼 옳은 일을 하고 싶어하고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옆집 소녀를 일편단심으로 사랑하는 선량하고 단순한 인물입니다. 거의 노먼 로크웰적이기까지 해요.
영화는 그 복고적인 선량함을 충실하게 살리고 있습니다. 아마 이 예스러움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최종 각본이 앨빈 서전트라는 노련한 고참에 의해 커버되고 있기 때문이겠죠. 컴퓨터 그래픽으로 범벅이 된 화면에도 불구하고 <스파이더맨 2>는 클래식 할리우드 시절에 만들어진 고전적인 드라마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도식적이 될 수도 있는 이 구식 드라마는 관객들의 현실과 교묘하게 연결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뉴욕이라는 도시를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도 그들 중 하나겠지요. 도시 건설자의 몽정과도 같은 고담시와는 달리 뉴욕은 관객들이 무대의 구체적인 번지수까지 잡아낼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한 현실 세계입니다. 그리고 스파이더맨은 법을 초월한 거대한 존재가 아니라 그 세계의 작지만 자랑스러운 구성원인 한 사람의 뉴요커죠. <스파이더맨 2>는 수퍼 히어로와 일반 시민들의 밀접한 유대감을 잡아내는 보기 드문 재주를 부리기까지 합니다.
이런 친숙한 일상성은 주인공 수퍼 히어로뿐만 아니라 악당인 닥터 옥토푸스에도 해당됩니다. 전편의 악당 노먼 오스본도 불쾌한 사고로 악당이 된 평범한 남자였지만, 이 영화의 오토 옥타비우스 박사는 그보다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평생의 목표로 삼았던 프로젝트를 통째로 날려버린 이 남자의 고민은 등에 문어발을 단 미치광이 악당으로 변신한 뒤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전체적으로 <스파이더맨 2>는 기만적일 정도로 수월하고 소박해보이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특별히 새로운 시도나 해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원작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어울리는 배우들을 동원해 성실히 찍은 영화지요. 가끔 튀어나오는 레이미 특유의 장난스러운 유머도 이런 평온한 결합 속에 유기적으로 녹아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여전히 튑니다. 언젠가부터 이 영화를 특징짓는 소박한 미덕이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의 영역에서도 드문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아이러니컬한 소리지만, <스파이더맨 2>가 이처럼 쿨한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건 일부러 쿨함을 내세우지 않는 소박함 때문인 듯 합니다. (04/07/05)
기타등등
전편엔 격투기 진행자로 나왔던 브루스 캠벨이 이번엔 극장 직원으로 나옵니다. 같은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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