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 뮤지컬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뮤지컬 영화도 별로 없고요. 아직도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뮤지컬 영화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고 그것도 어떤 극장에서 음악 부분을 모두 잘라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들립니다.
하지만 취향이 국민성과 연결되어 영원히 고정되라는 법은 없고, 지난 몇 년 동안 무대 뮤지컬 팬들도 꽤 늘었습니다. 한동안 주춤했던 이 장르의 느릿느릿한 부활에 우리 영화쟁이들이라고 가세하지 말라는 법은 없죠. 이미 <다세포 소녀>가 뮤지컬 장르를 소극적으로 실험했고 <구미호 가족>이 본격적인 첫 뮤지컬 영화로 개봉될 예정이고 완성되긴 더 먼저 완성된 <삼거리 극장>이 그 뒤를 이을 예정입니다. 그 이전에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2006년은 본격적인 한국 뮤지컬 영화 장르의 원년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구미호 가족>은 본격적인 뮤지컬입니다. 뮤지컬 넘버가 여덟 개나 되지요. 그냥 분위기만 내고 말았던 <다세포 소녀>와는 달리 이 춤과 노래 장면들에는 꽤 공이 들어가 있습니다. 뮤지컬의 비현실적인 세계를 노숙자들과 철거촌과 같은 먼지투성이 리얼리즘과 섞는 데도 상당히 노력하고 있고요. 특별히 귀에 들어오는 곡은 없지만 그래도 배우들 역시 자기 역할을 했습니다. 가사전달이 잘 안 되긴 하지만 노래와 춤은 캐릭터와 잘 들어맞고 특별히 모자라는 부분도 없어요. 이 정도면 중간 정도는 됩니다.
뮤지컬을 따라가는 다른 요소들 역시 괜찮습니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구미호 가족의 서커스 천막은 여러 면에서 매력적인 공간입니다. 배우들의 캐스팅은 거의 이상적이고 이들은 모두 열심입니다. 변신 장면의 몰핑 효과가 좀 아쉽긴 하지만 전체적인 특수 효과도 나쁘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 장점들은 치명적인 암초 두 개에 걸려 넘어집니다. 각본과 연출이죠.
<구미호 가족>의 각본이 가진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아, 전 이 이야기를 너무나도 자주 했습니다. 법칙으로 만들어 FAQ 게시판에 걸어도 되겠어요. 그래도 다시 듣길 원하신다면 반복하죠. 하이 컨셉 드라마의 각본은 가장 쓰기 어려운 부류입니다. 다들 컨셉만 믿고 아무 것도 안 하기 때문이지요. <구미호 가족>이 꼭 그 꼴입니다. 30분을 아슬아슬하게 채울 만한 아이디어를 믿고 정말 아무 것도 안 해요.
우선 설정부터 엉망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천 살이 되는 날 밤 인간이 되기 위해 간을 사냥하는 구미호들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들이 모두 같은 날 천 살이 될 수 있지요? 이들의 나이는 모두 다르단 말이에요. 그게 개기월식과 관련있다면 정확한 천 살이라는 나이는 별 의미가 없을 텐데 역시 여기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마찬가지. 날고 기는 구미호들이 정작 위기일발의 상황에 빠졌을 때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도대체 뭐랍니까? 그리고 자기네들이 구미호라는 걸 알고 있는 사기꾼 기동을 그렇게 돌아다니게 내버려 둔 이유는 또 뭐래요? 아무리 구미호 몰카를 찍고 싶고 첫째 딸에게 반했다고 해도 기동은 왜 마지막 날에도 도망을 안 가는 거랍니까?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구미호들은 아무나 납치해서 간을 먹을 생각을 안 하는 거랍니까? 영화를 보다보면 정말 온갖 질문들이 다 나옵니다. "뮤지컬 코미디니까 적당히 해도 되겠지"라는 생각은 여기서 안 먹혀요. 아무리 이 장르가 사실성을 적당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드라마와 설정의 논리는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 문제들이 충분히 해결될 수 있고 그러는 동안 이야기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동이 달아나지 않는 이유는 첫째 딸에 대한 그의 감정을 충분히 깊이 드러내면 설득력을 얻습니다. 구미호들의 능력을 분명히 정의하고 거기에 맞는 액션을 계산해서 짜넣는다면 이야기도 훨씬 박진감 넘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정말 아무 것도 안 해요. 충분히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뮤지컬 넘버들도 그냥 따로 놀고요.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마땅한 연쇄살인범 이야기나 막내 딸의 미스터리도 잘 활용된 편이 아니고요.
연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둘입니다. 코미디의 활용 방식과 페이스 문제지요.
일단 영화는 '엽기 코미디'를 의도하고 있는데, 그게 잘 먹히지 않습니다. 이런 블랙 코미디에 필수적인 시치미 뚝 뗀 느낌이 부족하거든요. 영화는 농담의 엽기성을 서툴게 강조하는데, 그게 잘 안 먹힙니다. 형사가 토막난 여자의 손을 가지고 얼굴을 긁는 장면을 보세요. 뭔가 자극적인 농담을 시도한 모양인데 영화 속에서는 전혀 먹히지 않습니다. 일단 행동의 설득력이 부족하고 소재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기 때문이지요. 영화의 코미디는 전체적으로 그냥 흉내처럼 보이고 과장과 뻥이 제대로 통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페이스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아마 2시간 20분이나 되면서도 구렁이와 같은 완벽한 페이스와 리듬을 과시했던 <타짜> 다음에 본 영화여서 더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이 영화는 불필요하게 느려터졌습니다. 몇몇 이유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뻔해요. 예를 들어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 의견을 제시하면 반드시 되묻는 버릇이 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식이죠. "돈을 벌자고요!" "돈을 벌자고?" "저 형사가 당신들을 의심하고 있어요!" "저 사람이 우리들을 의심한다고?" 이 시간만 잡아먹는 쓸데없는 대사들을 잘라내도 30분은 건집니다. 그 빈 자리에 다른 이야기를 넣어 영화를 더 설득력 있고 재미있게 만들 수 있지요.
<구미호 가족>이 주는 인상은 괴상합니다. 모두가 열심히 정성들여 만든 티가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과는 게을러빠져 보이는 거죠. 이 책임을 도대체 누구한테 돌려야 하는 건지. 그래도 전 배우들에게는 관대하고 싶어요. (06/09/21)
기타등등
이 영화의 구미호들은 꼬리가 하나더군요. 그런데도 구미호라고 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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