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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은 히치콕의 100회 생일입니다. 당연히 지금 제 머리 속에서는 오늘을 기념해서 그의 영화를 아무 거나 하나 골라야 한다는 의무감이 마구 올라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얼 뽑으면 좋을까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나 <사이코>, <현기증> 정도가 가장 건전한 선택이겠지요.

그런데 '히치콕'하면 제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이코>나 <북북서>가 아닌 바로 이 영화 <새>입니다. 왜일까요? 글쎄요. <새>는 히치콕의 최대 걸작은 아닙니다. 가장 모범적인 히치콕 영화도 아니고요. 작품성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도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 특수효과는 낡았고 제임스 스튜어트나 그레이스 켈리와 같은 스타도 없습니다.

그래도 자꾸 제 눈이 이 영화로 돌아가는 건 정말 어쩔 수가 없어요. 저도 모르겠군요. 전 이 영화가 그냥 좋습니다.

2.

위에서 <새>가 '히치콕의 최대 걸작은 아니다'어쩌구를 떠들어댔지만, 그건 순전히 제 선호도를 강조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합니다. <새>가 히치콕의 이류 영화라는 건 절대로 아니에요. <새>는 일급 공포 영화일 뿐만 아니라 일급 히치콕 영화이기도 합니다. 단지 <현기증>이나 <사이코>에 비해 중요성이 조금 떨어질 뿐이라는 거죠.

<새>는 환갑을 넘긴 노인네가 만든 영화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선하고 실험적입니다. 그 위에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거장의 터치가 더해졌으니 이 무게를 무시하는 건 정말 어렵습니다. 마땅히 조금 더 평가 받아야 해요. 아무래도 <사이코> 다음 작품이라는 것 때문에 손해보는 것 같아요.

3.

<새>는 히치콕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순수 음악'에 가깝습니다. 종종 히치콕은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새들을 마치 교향곡을 구성하는 음표들처럼 추상적인 어떤 것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수많은 예들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건 멜라니가 초등학교 앞에서 미치의 동생 캐시를 기다리는 동안 새가 날아드는 장면이겠지요. 이 장면의 기가 막힌 호러 효과는 순전히 '음산함'과 '위협'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만 가진 검은 덩어리들을 리듬감 있게 움직여 배치한 결과입니다.

관객들은 이 장면에 아주 쉽게 압도됩니다. 그건 바흐의 푸가처럼 철저하게 비인간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우리에게 조금도 약한 면을 보이지 않거든요. 우리는 프레디 크루거의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보고 웃을 수 있지만 이 영화의 새들한테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요소를 찾아내기엔 너무나도 단순하고 순수하니까요.

이런 순수성은 음악의 부재에 의해 더욱 강조됩니다. 이 영화에는 영화 음악이 없습니다. 대신 히치콕은 버나드 허먼을 시켜 사운드 트랙을 감수하게 했습니다. 전자적인 방식으로 증폭되고 변형된 음향은 이 영화에서 영화와 훨씬 밀착된 음악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영화 음악과는 달리 음향들은 전적으로 영화에 종속되어 있으니까요.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은 기괴할 정도로 정갈한 시청각 덩어리입니다. 종종 푸가처럼 순수해지지만 그 순수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우리의 정서를 강렬하게 자극하는 괴물 같은 덩어리 말이에요.

4.

<새>는 주인공 멜라니 다니엘즈가 애완동물 가게에서 만난 변호사 미치 브레너를 만나러 보데가 만으로 떠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브레너의 동생 선물로 두 마리의 사랑새를 사가지고요.

이 도입부는 전형적인 히치콕의 맥거핀처럼 보입니다. 이 영화의 중심 액션은 새들이 이유도 없이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것이니까요. 멜라니 다니엘즈의 연애담이야 그녀를 보데가 만으로 끌어오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겠죠...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사이코>에서 공금 횡령이라는 맥거핀은 아무런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관객들을 한 방 먹이는 술수였습니다. 그러나 <새>의 관객들은 <사이코>의 관객들보다 사전 정보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본 개념이 너무 노골적이니까요. <사이코>의 관객들과는 달리 당연히 그들은 이런 도입부가 맥거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새가 등장한 뒤에도 멜라니와 브레너의 가족들의 갈등은 계속됩니다. 그것도 무척 미묘하고 정교한 톤으로요. 소유욕이 강한 미치의 어머니 리디아는 미치에 접근하는 모든 여자들에게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스토리는 미치를 가운데에 둔 멜라니와 리디아의 갈등입니다. 멜라니가 그녀가 한번도 가져본 적 없는 '어머니'상을 리디아한테서 찾고 리디아가 멜라니를 '딸'로 받아들이면서 이 갈등은 해소되지요.

보통 이런 인간 관계와 호러 액션은 따로 놀기 마련인데, 에반 헌터의 각본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상호 보완적이지요. 인간적 갈등은 무의미한 새들의 공격으로만 끝날 수도 있는 스토리에 섬세한 모양새를 잡아주고, 적절한 부분에 삽입된 새들의 공격은 드라마의 갈등 구조를 강화시키고 적절한 전환을 부여합니다.

새의 공격을 강조하기 위해 이 모든 드라마는 조심스럽게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새>는 비평가들이 가지고 놀 장난감이 무척이나 많은 영화입니다. 팔 구석이 참 많아요. 특히 페미니즘 시각으로 보면요.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여자들이고 (사실 미치는 동기 부여용 인형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관계 역시 스테레오 타입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있어서, 보고 있노라면 할 말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멜라니와 애니의 대화에서 동성애 코드를 읽는 평론가들도 있고요.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 보면 다른 것도 나올 거예요.

물론 관객들까지 이 드라마적 요소에 의식적인 의미 부여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드라마적 요소와 호러적 요소의 적절한 결합으로 인한 긴장감을 즐기기만 하는 것도 상당한 재미입니다.

5.

이 영화에 사용된 특수 효과는 지금 보면 많이 낡아보입니다. 특히 학교에서 달아나는 아이들을 새가 공격하는 장면과 주유소 폭발 장면 직후 등장하는 하이 숏 장면은 티가 많이 납니다.

그건 이 영화의 기술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히치콕이 바랐던 영상이 당시 수준으로는 완벽하게 충족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사용된 특수 효과는 모션 컨트롤 시스템이나 디지탈 특수 효과, 애니매트로닉스 따위의 장난감 없이 찍은 것을 고려해보면 최상입니다. 심지어 스필버그와 루카스가 등장한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보다 나은 영상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이 거친 특수 효과가 종종 훌륭한 효과를 낼 때도 있습니다. 유명한 공중전화 부스 장면에 사용된 거친 효과는 화면에 강렬한 초현실주의를 부여하거든요.

6.

<새>의 결말은 중간에서 뚝 잘린 듯한 느낌을 줍니다. 특히 제가 MBC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정말 잘린 줄 알았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유니버설 로고(이 영화에 사용된 금속성의 지구본은 아마 다른 유니버설 영화엔 사용되지 않았을 겁니다)를 잘라버려서 그게 끝이 났다는 걸 확신할 수 없었거든요.

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 불길한 결말은 근사해 보여요. 폭풍 전의 고요함이라고 할까요. 영화는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으며 절대적 파국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단지 공격과 공격 사이의 휴지기를 불안하게 보여줄 뿐이지요.

만약 제작비가 더 나왔더라면 이 영화의 결말은 달라졌을 거랍니다. 히치콕은 금문교를 새들이 까맣게 채운 결말을 생각하고 있었다지요. 아마 브레너 가족과 멜라니는 샌프란시스코까지 차를 타고 갔다가 그 끔찍한 광경을 보았을 겁니다. 훨씬 종말론적인 영화가 되었겠지요?

7.

멜라니 역의 티피 헤드렌은 그레이스 켈리나 에바 마리 세인트와 같은 '진짜' 스타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좋습니다. 매우 히치콕 식으로 아름답고 연기를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아도 되는 역이었기 때문이죠. <새>의 헤드렌은 <마니> 때보다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제임스 스튜어트나 케리 그랜트의 카리스마를 로드 테일러한테서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미치의 존재 이유는 갈등 조성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더 강한 배우였다면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튀었을 겁니다.

가장 재미있는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는 리디아 역의 제시카 탠디입니다. 멜라니와 리디아의 미묘한 갈등이 그만큼 섬세하게 살아날 수 있었던 것도 탠디의 재능 때문이었지요.

애니 역의 수잔 플레셰트는 이 사람이 디즈니 가족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애니는 멜라니보다 훨씬 잘 연기된 캐릭터였어요.

어린 시절의 베로니카 카트라이트(<엑스 파일>의 카산드라, <에일리언>의 램버트)가 미치의 어린 동생으로 나옵니다. 고생문이 열린 거죠, 쯧쯧쯔... (99/08/13)

기타등등

1. 이 영화의 원작이 된 대프니 뒤 모리에의 단편 <새>는 영화와 닮은 구석이 별로 없습니다. 무대는 영국이고 주인공도 남자지요. 이유없이 새들이 공격한다는 기본 개념만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더 마음에 들어요.

2.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에반 헌터는 87분서 시리즈를 쓴 에드 맥베인, 바로 그 사람입니다.

3. 히치콕의 카메오는 도입부에 나옵니다. 애완동물 가게에서 개 두 마리를 끌고 나오는 할아버지입니다. 위의 사진을 참고하세요.

4. 수십 년 뒤에 속편이 하나 나왔습니다. 보면 손해볼 영화입니다. 감독 이름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네, 또 하나의 알란 스미시 영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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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J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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