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전 박철수가 <301, 302>를 만들 때만 해도 이 계획은 무척 수상쩍어 보였습니다. <물 위를 걷는 여자>나 <안개기둥>과 같은 영화를 만든 남자가 엽기적인 블랙 코미디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그랬지요. 이건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다는 것보다는 길이 꽉 막힌 중견 감독이 살려고 의식적으로 우회로를 파는 것 같았습니다. 솔직해 보이지가 않았지요.
게다가 당시 마케팅부에서 내민 '컬트 영화' 어쩌구의 표방도 무척 진실치 못해보였습니다. 하긴 그 때만 해도 다들 '컬트'라는 게 뭔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조금 별나기만 해도 그 말을 사방에 툭툭 갖다 붙였지요. 요새 사람들이 '업그레이드'니 '사이버'니 하는 말들이 뭔가 대단하고 '쿨'한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온갖 것들에 갖다붙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상당한 성공이었습니다. 상업적 성과는 그냥 그랬지만 비평적 성과는 상당했습니다. 게다가 해외 배급의 성과는 대단했습니다. 그 후로 5년이나 지났지만, 미국에서 정식 루트를 통해 제대로 배급된 한국 영화는 아직까지도 <301, 302>뿐입니다. 아직까지 그 동네에서 비디오로 구할 수 있는 한국 영화도 <301, 302>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뿐이고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가장 큰 성과는 박철수라는 영화 감독의 스타일을 고정했다는 것일 겁니다. 그 뒤로 그는 <학생부군신위>니, <산부인과>니 하는 영화를 통해 그 때 고정된 스타일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으니까요.
그 때문일까요? 다시 본 <301, 302>는 예전처럼 위선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전에는 '정말 튀어 보려고 작정했구나'라고 생각했던 장면들도 요새는 꽤 진실되게 보여요.
본론으로 들어가죠. <301, 302>는 장정일의 시 <요리사와 단식가>를 각색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 크레딧에는 이 정보가 완전히 빠져 있지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장정일이 돈을 챙기기나 했는지도 모르겠고요. 아시는 분들은 나중에 알려주시길.
다들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그래도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거식증에 걸린 작가 윤희가 살고 있는 새희망 바이오 아파트 (맞아요, 당시엔 '바이오'란 말도 유행이었어요) 모동 302호 맞은 편 301호에 이혼녀 송희가 이사옵니다. 요리에 집착하는 성격인 송희는 이웃집 윤희에게 자기가 만든 음식을 억지로 먹이려 하지만 윤희는 그 음식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토해내지요. 이 정신나간 짓을 하는 두 여자들에게는 모두 각자 사연이 있었으니...
이런 식으로 나가는 영화입니다. 기본 스토리는 <요리사와 단식가>에서 그대로 따오고 남은 상영시간은 그들의 동기를 '설명'하면서 채우고 있죠.
솔직히 말해 이서군의 각색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일부는 제 취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시다시피 전 플래시 백을 남발하는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잖아요)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전 이 영화가 충분히 부지런해지지 못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이 영화에는 정말로 중요한 부분이 상당히 가볍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그건 301과 302의 관계지요. 영화는 장정일의 2페이지밖에 안되는 짧은 시에 나온 이야기를 모두 써먹자 그냥 거기서 멈추어 서 버립니다. 대신 영화의 3분의 1을 들여 그들이 왜 그런 꼴이 되었는지 '설명'하지요.
물론 이들의 동기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나친 설명은 강연이나 설교가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중반과 후반 부분을 설명에 할애하는 통에 영화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직설적이 되어 버립니다. 육체와 성에 대한 일종의 페미니즘 강연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주제와 재료는 이 설명을 통해 제공되지만, 이들이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지는 않습니다. 두 주인공의 관계와 역학 관계가 가장 중요시 되는 그 순간에 딱 멈추어 선 뒤, 설익은 재료들을 그냥 관객 앞에 던져 버리거든요. 두 배우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평면적인 캐릭터들로 남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게다가 종종 이상할 정도로 어색한 문어체로 뻗어버리는 대사는 배우들의 연기까지 막아버립니다.
그렇다면 박철수의 연출은 어떠냐... 글쎄요. 영화는 그의 연출력보다는 파격적인 아이디어에 더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이디어가 너무 분명해서 영화의 스타일까지 미리 정해진 것이죠. 어두컴컴하고 폐소공포증을 일으키는 한국식 아파트, 맛있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구역질을 일으키는 수많은 음식들과 같은 것 말이죠.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관객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영화의 디테일은 약합니다. 재료는 흥미롭지만 이 흥미로운 재료를 충분히 구체화시키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 영화 뒤로 이어지는 박철수식 다른 영화들은 <301, 302>만큼 흥미롭지는 않지만, 적어도 스타일은 훨씬 발전해 있습니다. <301, 302> 때는 아직 테크닉과 스타일을 모색 중이었나 봐요. 자극적인 기본 아이디어들을 모두 떨구어내면 이 영화는 밋밋하기 짝이 없으니 말입니다.
배우들은? 방은진과 황신혜 모두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특히 방은진은 훌륭해요. 캐릭터가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것은 배우들 탓은 아니죠.
그러나 이 영화의 최대 공로자는 아무래도 원작자인 장정일 같습니다. <301, 302>가 97분의 폐소공포증과 거식증 환자의 악몽을 통해 보여준 이야기는 원작인 2페이지 짜리 간결한 이야기를 결코 넘어서지 못하거든요. (00/03/26)
기타등등
진짜 거식증 환자들은 황신혜처럼 건강해보이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해골처럼 살을 빼라고 요구하는 건 못할 짓일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같은 배우들은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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