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일어난 산타 살인사건
<산타 클로스의 암살>은 독일 점령기의 비시 정부에서 제작된 최초의 프랑스 영화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성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죠. 독일 점령기의 프랑스는 영화사상 최고의 걸작들을 양산해냈으니까요. 역시 예술가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억압이 필요한 모양이에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피에르 베리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의 내용은 독일 점령기의 현실과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툭하면 눈 때문에 고립되는 산골의 작은 마을이고 거기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거의 성탄특집극처럼 따사로운 동화풍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단 한 번도 관객들이 겪고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험악한 현실로 뛰어들지 않아요.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추리물입니다. 크리스마스 미사 때 성당 소유의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가 사라지고 다음 날 아침 머리에 총을 맞은 산타 클로스의 시체가 발견됩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 산타 클로스가 매년 산타 클로스 분장을 하고 아이들을 찾아가던 지구본 제작자인 코르뉘스라고 생각하지만 분장을 벗겨보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죠. 그럼 범인은 누구일까요? 가장 미심쩍은 사람은 얼마 전에 성에 돌아온 남작입니다. 하지만 코르뉘스의 아름다운 몽상가 딸 카트린느는 벌써 남작과 사랑에 빠진 뒤였어요.
영화는 사실 추리물의 플롯을 진지하게 끌어가는 데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반대로 영화는 진부한 단서들을 무심하게 던지고 별다른 드라마없이 모든 사건들을 졸속으로 해결하면서 거기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걸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죠.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범인이 누구냐?"가 아니라 총에 맞고 하얀 눈밭에 쓰러져 있는 산타 클로스라는 초현실적인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성의 야수와 사랑에 빠진 소녀 이야기나 크리스마스 기적을 바라는 불구소년의 이야기처럼, 이 영화의 동화적 분위기를 구성하는 벽돌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영화의 이 순진무구한 이야기엔 숨은 의미가 있을까요? 피에르 베리의 소설은 분명 독일 점령기 이전에 나왔을테니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어떤 숨은 의미를 품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크리스티앙 자크가 영화의 소재를 고르고 각색하는 동안 살해당한 산타 클로스의 모습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은유를 부여한 건 거의 분명합니다. 그게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당시의 예민한 관객들은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싶었을 거고요. 막연한 비유들이 대부분 그렇듯 <산타 클로스의 암살>의 은유들도 원래의 의도와 적극적인 해석 사이에서 토끼떼처럼 불어납니다. 그 때문에 지금 이 영화의 정치적 의도가 무엇인가를 따지는 건 조금 역사 숙제 같죠.
정치적 은유들을 잊고 본다면 영화는 살짝 미진하게 느껴집니다. 눈덮힌 산골마을이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제공해주고 완벽하게 캐스팅된 배우들이 멋진 연기들을 보여주며 영화 구석구석엔 자잘한 기적들이 가득 차 있으며 동화, 로맨스, 추리물이 괜찮은 조합을 이루고 있지만 마땅히 도달해야 할 클라이막스엔 오르지 못한 것 같단 말이죠. 역시 장르를 다루는 방식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장르를 다룬다고 해서 무조건 그 장르에 충실할 필요는 없지만 이 영화는 그 장르를 가볍게 놀려댈 기회조차 포기해버린 듯 해요. 그 때문에 후닥닥 진행되는 후반의 수사 장면은 충분한 위트와 에너지를 부여받지 못합니다. 산타 살인사건과 연결되어 있는 드라마도 충분히 꽃피지 못하고요.
그러나 이런 '미진함'은 상대적입니다. 관객들이 살짝 실망했다면 그건 근사한 설정과 흥미진진한 역사적 배경, 그리고 영화가 가지고 있는 좋은 재료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더 이상을 기대했기 때문이겠죠. <산타 클로스의 암살>은 여전히 많은 걸 성취한 영화입니다. (04/12/27)
기타등등
1. 이 영화에서 동네 산타 코르뉘스를 연기한 해리 바우어는 유태인이었습니다. 그는 1943년에 게쉬타포한테 고문받은 끝에 사망했습니다.
2. 카트린느를 연기한 르네 포레는 크리스티앙 자크의 아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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