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슨 웰즈가 몽고인으로?
고전 할리우드 모험 영화
'로빈 훗, 중국에 가다'. 패러디 영화 제목 같죠? 하지만 바로 이게 토머스 토스테인의 소설을 각색한 <흑장미>의 기본 아이디어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월터 오브 거니는 노르만 족에 치를 떠는 색슨인 청년입니다. 어쩌다가 스승인 로저 베이컨의 꼬드김에 넘어간 그는 궁수인 친구 트리스트람과 함께 머나먼 동쪽에 있다는 문명국 중국으로 가 한 몫 잡겠다고 결심하죠. 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로빈 훗이 되기 바로 직전이었던 젊은이가 은근슬쩍 마르코 폴로가 된 겁니다. 어이 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런 식의 엇갈리는 조합을 쉽게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 영화의 제목인 흑장미는 누구냐. 중간에 나옵니다. 월터와 트리스는 바얀이라는 몽고인 장군을 만나 그의 부하가 되는데, 바얀은 쿠빌라이 칸에게 바칠 공물을 운반하고 있었답니다. 그 중에는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 영국인 기사의 딸 매리엄이 있었는데, 흑장미는 그 여자의 별명이었던 거죠. 누가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모르겠어요. 매리엄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금발미녀거든요. 영국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난 매리엄은 시종 소년으로 변장해 텐트에서 탈출하고 결국 월터와 한 패가 되지요.
이런 영화에서 메인 스토리는 주인공 월터와 흑장미 매리엄의 로맨스겠죠. 그래야 제목이 먹힐 테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로맨스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매리엄의 캐릭터 설정일 거예요. 이 아가씨는 척 봐도 주인공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영화 내내 할리우드 세트장에 실수로 떨어진 타이론 파워 팬클럽 소녀처럼 행동하지요. 영화는 어떻게든 월터와 매리엄의 로맨스에 불을 붙이려 시도하지만 끝까지 성공하지 못합니다.
영화가 보다 성공하고 있고 처음부터 집중하고 있는 건 두 문화간의 교류입니다. 실제로 영화 내에선 상당히 재미있는 교류가 발생합니다. 월터가 영국에 인쇄술, 종이, 나침반, 폭약을 가지고 가는 건 예정된 순서죠. 하지만 궁수인 트리스가 몽고 기병들에게 영국 장궁을 가르친다는 설정은 꽤 재미있지 않나요?
그러나 이런 묘사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당시 할리우드는 동양에 대해 잘 몰랐고 제대로 그릴 수 있는 여건도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죠. 이 영화에서 가장 몽고인처럼 생긴 사람이 분장한 오슨 웰즈라니 말 다한 거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서남 아시아 어딘가에서 주워온 것 같아요. 무대가 중반으로 넘어가는 후반부에선 중국인 엑스트라와 단역들이 조금 등장하긴 하지만 그들이 묘사한 송나라는 홍콩 어딘가에 있는 국제 호텔처럼 보입니다. 화려하고 예쁘지만 진짜 중국 같지는 않아요.
이들은 제대로 된 동양인 캐릭터를 그리는 데에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오슨 웰즈의 카리스마를 업은 바얀은 꽤 재미있는 캐릭터이긴 합니다. 통찰력 있고 우아한 지성인이죠. 하지만 그는 몽고인 장군보다는 옥스포드에서 수학한 서양 철학자 같습니다. 말투나 사고방식 모두가요. 당시 중국을 서양을 능가하는 기술문명을 소유한 문명국가로 그리고 있으면서 정작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미신에 사로잡힌 야만인처럼 그리는 것도 심각한 문제.
이 영화에서 바얀 다음으로 흥미로운 인물은 월터의 친구 트리스트람입니다. 영화를 보면 종종 주인공을 잘못 잡은 것처럼 보여요. 월터는 타이론 파워의 깔끔한 이미지에 갇혀 아무 것도 못하지만 트리스트람은 다릅니다. 그는 몽고군대에 장궁의 테크닉을 전수하고, 몽고군대가 중국에서 저지르는 야만적인 학살을 목격하고 괴로워합니다. 하는 일이 많은 거나 고민이 많은 거나 딱 주인공 감이에요. 하지만 그래도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타이론 파워 캐릭터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으니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죠.
기타등등
세실 오브리의 유일한 할리우드 영화입니다. 이 프랑스 배우는 60년대 이후로 주로 작가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감독으로 활동했지요. 오브리의 대표작 소설 <벨과 세바스찬>을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는 <용감한 졸리>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죠. 세상은 이렇게 연결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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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도 재밌습니다.
필자님 책도. 영화 칼럼도, 소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