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가라, 서부는 여자가 접수한다
1950년 작이니까, <격노>는 안소니 만이 소위 '심리적 서부극'으로 분류되는 작품들을 막 만들기 시작할 무렵에 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분류되는 영화들 중 가장 노골적이고 뻔뻔스러운 영화이기도 하죠.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니븐 부시가 <백주의 결투>의 원작자라는 걸 생각하면 그렇게 놀랍지는 않지만요. 할리우드에선 다 이렇게 창작의 책임이 분산되기 마련입니다.
영화의 제목 'The Furies'는 사실 목장 이름입니다. 이 영화의 시대배경인 1870년대 뉴멕시코에서는 대목장주가 자기 목장을 중심으로 작은 왕처럼 행세하는 경우가 많았다죠. 월터 휴스턴이 연기한 T.C. 제포즈도 바로 그런 부류입니다. 자수성가한 괴팍한 노인으로, 오만하고 조금은 과대망상에 빠져 있지요. 그에겐 클레이라는 아들이 있지만 그가 진짜 후계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딸 밴스입니다.
T.C.와 밴스의 관계는 그리스 비극 냄새가 풀풀 납니다. 영화 제목 'The Furies'도 그리스/로마 신화적으로 이해해야 해요. '격노'가 아니라 복수의 여신들인 거죠. 둘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 애정은 그리 정상적이거나 편안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딸 모두 증오에 차서 서로를 짓밟고 때려 죽이려 하는데, 그게 나름 그들에겐 애정 표현인 거예요. 실제로 그들은 상대방에게 애인이나 예비 배우자가 나타나면 손톱을 세우고 밧줄을 휘두르며 그들을 쫓아냅니다. 그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타당한 핑계가 동원되긴 하지만, 진짜 문제는 역시 그들에게 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그리스적이기도 하지만 정신분석에 절은 4,50년대 할리우드 지식인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죠.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이 설정이 재미있는 건, 당시 할리우드 영화, 특히 서부극의 성역할이 파괴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무시하고 딸에게 목장을 물려주려 하는 것부터가 뭔가 다르잖아요. 과장된 엘렉트라 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있고 그밖에도 결점이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밴스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쉽게 굴복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포기와 좌절을 모르고, 누군가가 자신을 밟으려 하면 반드시 되갚아주지요. 그리고 밴스는 이 영화에서 남자들 위에 군림하는 유일한 여성도 아닙니다. 잠깐잠깐 등장하는 헤레라 부인이나 아나하임 부인처럼 밴스를 능가하거나 맞먹는 사람들이 그득하지요.
배우들에겐 정말 좋은 영화입니다. 바바라 스탠윅과 월터 휴스턴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 비극의 과장된 정서를 한 줌의 부끄러움 없이 화면 위에 옮기고 있어요. 다른 배우가 했다면 참으로 민망했을 부분이 한둘이 아닌데, 이들이 하니까 정말 자연스럽고 종종 섬뜩하기도 하군요. 모두 에너지와 에고가 넘쳐서 둘이 한 자리에 있기만 해도 뭔가 벌어질 것 같아요, 부녀가 직접 상대방에게 직접 육체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은 없지만 꼭 있는 것 같지요. 아, 대신 다른 사람들이 다치던가요.
기타등등
월터 휴스턴의 유작입니다. 영화 개봉되기 두 달 전에 심장마비로 죽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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