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길 위에서 구르는 악마들.
‘롤링 스톤즈’의 <Still Life>는 그들이 발표한 최악의 앨범으로 꼽히지만, 한편으론 밴드의 이전, 이후 역사를 구분 짓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앨범이기도 하다. <Tattoo You>(1981)로 소위 명반 리스트를 마감지은 뒤, 스톤즈는 주기적으로 대규모 공연을 몇 년간 펼친 다음에 그 성공의 현장을 라이브 앨범으로 발표하는 식의 활동을 반복해왔다. 물론 롤링 스톤즈는 데뷔 이래 무대 위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으며, <스틸 라이프> 이전에도 몇 장의 라이브 앨범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부터 밴드가 밟은 행보는 이전과 달랐다. 엄청난 규모의 공연은 관객 동원과 입장료 수입 면에서 기존의 모든 공연 기록을 거듭 깨뜨렸고, 밴드는 스튜디오에서 앨범을 만들기보다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기를 더 즐기곤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영화감독이 최고의 걸작을 만드는 게 40대 전후라면, 뮤지션에게 그런 시기는 대략 20대, 30대다. 1980년대와 함께 마흔 줄에 접어든 롤링 스톤즈의 멤버들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창조력의 정점에서 수많은 명반을 내놓았던 그들은 같이 활동한 동시대의 밴드들이 거의 사라진 자리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 갈등했음이 분명하다. 앞으로 창조력은 점점 고갈될 테고, 그렇다고 후배들의 음악을 흉내 내는 건 죽기보다 싫었을 그들은 용감하게도 길 위에서 굴러가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마흔, 쉰, 예순을 거치는 동안 무자비한 시간이 그들의 한계를 시험했지만, 그들은 무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더불어, 무대 위에서 연륜과 깊이를 더하는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관객의 수는 더욱 더 늘어만 갔다.
2005년, 롤링 스톤즈는 스튜디오 앨범 <A Bigger Bang>의 공개와 함께 ‘비거 뱅 투어’라 이름 붙인 공연을 시작했고, 이 공연은 기네스북에 의해 ‘최다 수익 공연’으로 기록된다(2위는 유투의 공연이며, 3위는 롤링 스톤즈의 또 다른 공연인 ‘부두 라운지 투어’다). <샤인 어 라이트>는 비거 뱅 투어 중 뉴욕의 비콘 극장에서 이틀 간 가진 공연을 기록한 것이다. 연출을 맡은 사람은 마틴 스콜세지. 이미 장 뤽 고다르, 메이즐스 형제 등이 만든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경험이 있는 롤링 스톤즈가 오랜만에 영화 만들기에 응한 건 오로지 연출자가 스콜세지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라스트 왈츠>와 <노 디렉션 홈>을 만든 스콜세지라면 진부한 록 다큐멘터리에 머물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스콜세지는 그들의 평가가 틀리지 않았음을 영화로 증명했다.
<샤인 어 라이트>를 본 관객은 이 영화가 일반적인 록 다큐멘터리와 완전히 다른 영화이며, 스콜세지가 기존에 만들었던 음악영화와도 딴판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스콜세지는 밴드의 역사, 밴드에 대한 평가, 밴드의 숨겨진 뒷이야기 같은 걸 파헤치거나 열광하는 관객의 모습을 담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분주한 준비 현장(공연 직전까지 곡목을 몰라 다급해진 스콜세지와 빌 클린턴 같은 유명인들을 볼 수 있다)을 제외한 모든 장면에서 카메라가 시선을 두는 건 롤링 스톤즈와 무대뿐이다. 그래서인지 무대 뒤에서 스콜세지가 내뱉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쉬지 않고 뛰어다니는 믹 재거, 거장의 여유가 배어 있는 키스 리처드, 기타 앞에선 여전히 악동인 론 우드, 이젠 도사가 다 된 찰리 와츠 외에 대체 뭘 보겠단 말인가.”
스콜세지가 선택한 방향은 옳았다. 비틀즈를 포함해 어떤 위대한 뮤지션도 40년이라는 세월을 견디지 못했으며, 정상에서 계속 머물지 못했다. 롤링 스톤즈는 그런 위업을 이룩한 뮤지션이다. 밴드는 유치한 아이들의 친구라고 믿는 자에게, 록은 젊은 시절에 잠시 거치는 음악이라고 말하는 자에게 펀치를 날리려면 ‘롤링 스톤즈’를 소개하는 것으로 족하다. 이에 더해, 롤링 스톤즈는 ‘록이 인생을 걸어볼 만한, 의미 있는 존재’임을 몸소 보여준 사람들이다. 그리고 스콜세지는 어떻게 하면 ‘그들의 역사와 그들의 가치와 그들의 음악’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예순 후반에 접어든(론 우드만 예순 초반이다) 네 명의 남자가 록을 연주하는 광경을 관객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하는 것이었다.
일전에 타이즈를 입고 무대를 누비는 오십 대의 믹 재거를 보며 혀를 내두른 적이 있지만, 칠순을 앞둔 그들의 생생한 공연 모습은 숫제 경이로움을 넘어선다. 솔직히 말해 롤링 스톤즈의 멤버들은 록의 역사에서 첫째가는 뮤지션들이 아니다. 나는 재거를 가장 뛰어난 싱어로 꼽지 않으며, 리처드와 우드를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하나의 이름 아래 똘똘 뭉치면 누구도 그들을 당해내지 못한다. 최상의 무대 분위기를 연출하는 법과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도록 만드는 법을 그들은 안다. 그러므로 <샤인 어 라이트>를 극장 좌석에 앉아 다소곳이 보는 건 고역이다. 나는 큰 소리로 따라 부르고 싶었고, 괴성을 지르며 스크린에 뛰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폰캠으로 사진 찍기에 바쁜 젊은이부터 흰머리에 모자를 뒤집어쓴 중년아저씨까지) 무대의 열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비콘극장의 관객에 비해, 내 주변에 앉은 인간들은 어찌 그리도 무덤덤한 표정들인지. 영화관이라고 해서 꼭 그렇게 무표정할 필요는 없잖아.
롤링 스톤즈의 거친 음악과 꾸밈없는 무대처럼 <샤인 어 라이트>는 소박하면서 알차다. 공연의 첫 곡인 <Jumping Jack Flash> 연주 도중 시스템 문제로 소리가 끊겼어도 별다른 사후보정 작업을 하지 않았으며, 박자가 조금씩 맞지 않는 연주들을 그대로 실어놓았고, 믹 재거가 작곡자의 이름을 잘못 언급해도 그냥 넘어간다. 그 대신, 젊은이에 못지않은 몸매와 깔끔한 패션 감각을 뽐내는 믹 재거의 얼굴에 빽빽이 자리한 주름, 무대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이 형님이란 호칭을 절로 불러내는 리처드의 얼굴 위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수천가지의 미소 등, 스콜세지는 가능한 한 그들의 가장 깊고 세밀한 부분까지 도달하고 표현하려고 애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건 찰리 와츠의 ‘한숨’이었다. 암에 걸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를 투어에 오른 와츠는 <All down the Line>(이 곡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의 연주를 마친 직후 기력이 부치는지 큰 한숨을 내쉰다. 그 얼굴에서 오랜 시간 동안 그룹의 중심을 묵묵히 지켜온 와츠의 노고가 느껴졌다.
<샤인 어 라이트>는 두 날에 걸친 공연 중 대략 스무 곡 내외의 연주 장면을 발췌해 담았는데, 영화의 초반과 중반에 배치된 대부분의 곡이 한국 관객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겠다. 특히 <Some Girls> 앨범에서 유별나게 4곡이나 포함된 게 눈에 띄는 반면, 그들의 히트곡인 <Time is on My Side>, <Paint It, Black>, <Ruby Tuesday>, <Angie>,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 <Miss You> 같은 노래는 아쉽게도 들어있지 않다(하긴 롤링 스톤즈의 라이브 앨범에 유명한 노래들만 줄줄이 수록된 경우는 거의 없다).
공연의 백미는 옷을 갈아입은 믹 재거가 무대 뒤로부터 등장하면서 부르는 <Sympathy for the Devil>이다. 믹 재거가 드물게 하이톤 보이스로 시작하는 이 곡은 ‘열광의 도가니’란 과연 이런 것임을 실감하게 만든다. 어쿠스틱으로 연주돼 감동을 배가하는 <As Tears Go By>는 한국 관객에게 가장 감동적인 노래일 것이며(믹 재거는 유일한 발라드를 소개하면서 쑥스럽다고 말하지만, 노래를 마친 뒤엔 “사랑스럽지 않나요?”라고 반문한다), 마지막 노래인 <Start Me Up>과 앵콜송인 <Brown Sugar>, <(I can't Get no) Satisfaction>에 이르러서도 공연의 에너지는 식을 줄 모른다.
게스트로 나온 뮤지션 - (‘화이트 스트라이프스’의) ‘잭 화이트’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그리고 버디 가이 - 중에선 버디 가이가 단연 압권이다. <Champagne & Reefer>을 연주하는 칠순의 블루스 기타리스트는 머디 워터스가 연상될 정도로 뛰어난 연주와 노래 실력을 자랑하는데, 그에게 얼마나 압도되었던지 키스 리처드는 연주하던 기타를 즉석에서 헌정하고야 만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질러대는 목소리는 믹 재거의 그것과 별로 어울리지 않지만, 두 사람이 어울려 추는 춤 덕분에 장내 온도가 후끈 달아오른다. 잭 화이트의 수줍은 듯 잘난 척하는 스타일은 <Loving Cup>에서도 마찬가지다.
스콜세지는 공연 사이로 몇몇 기록영상을 삽입했는데, 옛 영상들도 대게 밴드의 생명력과 관련된 것들이다. 1960년대 중반에 가진 인터뷰에서 재거는 “2년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앞으로 얼마나 계속 공연할지는 모르겠다.”라고 대답하고 있으며, 중년의 키스 리처드는 “언제까지 밴드를 계속할 거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 대답은 ‘모른다.’다.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음악과 연주에 임한다.”고 말한다. 평범한 대답 속에 깃든 지혜의 말씀이란 이런 것이다. 스콜세지와 롤링 스톤즈의 멤버들은 비슷한 연배인데다 각자의 영역에서 40년 넘게 활동하면서 최고의 자리를 지켜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들이 한 편의 영화에서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행복했다. 그리고 ‘평생 쉬지 않고 좋아하는 일에 몸 바친 위대한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 롤링 스톤즈와 전설적인 다큐멘터리 <기미 쉘터>를 만든 앨버트 메이즐스의 이름이 엔드 크레딧에 들어 있다. 언뜻 보기엔 ‘Camera on Hand'라고 써진 것 같은데, 그것이 삽입된 기록영상의 촬영에 해당하는 건지 <샤인 어 라이트>의 일부 촬영을 말하는 건지 확인하지 못했다. IMDb에 안 나오는 것으로 봐선 기록영상의 촬영이지 싶다.
* 창피한 이야기 한 가지. 롤링 스톤즈의 신보를 계속 사면서도 빌 와이먼이 이미 10년 전에 탈퇴했다는 걸 몰랐다. 이번 무대에서 대릴 존스가 베이스를 치는 걸 보고 뒤늦게 안 사실이다. 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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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Shine A Light, 구르는 돌엔 이끼가 끼지 않는다.
Tracked from 소년의 눈, 소녀의 귀 2008/09/06 04:25 삭제그날은 방송사 서류 전형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이가 취직 적령기를 넘어서고 있었기에 많이 불안했다. 아주 많이. 소문에 의하면 40%정도만 통과한다고 했다. 두달 전 있었던 다른 방송사 시험에서 낙방했었기에 불안감은 더 컸다.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기 전에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며, 제출하기 전에 읽고 또 읽으며 가다듬었지만, 막상 발표날이 되니 다리는 120BPM의 속도로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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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2all's me2DAY 2008/09/06 20:45 삭제Shine A Light (가사) - 영화 본 기념으로 음악도 링크해봅니다. 나온 곡들이 많은데, 제목으로 선정된 이 곡이 귀에 많이 남네요. 관련된 ibuti님의 글로 가면 영화에 나온 곡 목록이 나옵니다. 클린턴이랑 아길레라가 나와서 신기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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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콜세지의 음악 다큐는 보증수표나 다름없습니다.
정말 쓸데없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하지요. The Blues (1부) 보신 분들은 다 아실듯.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하다 -> 가슴으로 확 오는 말씀입니다. 음, 이런 표현을 했으면 좋았을 것을...^^
빌 와이먼의 탈퇴 이유가 재미나더군요.
"이제는 너무 나이가 들어서 체력이 딸려서 도저히 투어를 쫓아다니지 못하겠다"는 이유였다고...^^;;;;
하긴 40여년을 활동했으니...^^;;;
사실 빌 와이먼이 정상이죠? 밴드 투어 몇 년 하면 몸과 마음이 완전히 탈진한다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수십 년을 달렸으니. 이번 영화에서 믹 재거의 허리돌리기를 보며 저 자신의 반성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ㅠㅠ
씨네21에 나온대로 이분들이 우리나라에 올 가능성은 전혀없으니 꼭 보러가야죠 ㅋㅋ
글에는 쓰지 않았지만, 이 영화를 꼭 봐야하는 이유 중엔 그런 것도 있었어요. 이 양반들이 한국에는 안 오잖아요. 그러니 큰 스크린으로나마 대신 만족해야 할밖에요. 슬퍼도 어쩔 수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