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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귀사리(鬼思里)
도로로 나서자 요기를 품은 안개가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느낌으로 일행의 발목을 휘감아왔다. 용만이 차에서 들고 내린 사인검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났다. 수정이 그걸 보고 신기한 듯 물었다.
“검이 운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직접 울음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에요! 귀한 검인가 봐요?”
용만은 검을 뽑아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귀하다마다요. 제 분신이자 저희 집안의 가보인걸요. 제가 지금은 요 모양 요 꼴이지만 저희 18대조 할아버님이 조선시대에 내금위장(內禁衛將) 벼슬을 하셨다는 거 아닙니까.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경호실장 정도 될 겁니다. 이 사인검은 그 할아버님이 임금님한테 직접 하사받은 검이랍니다.”
용만의 말에 선일도 다가와 관심을 나타냈다. 검에는 빗물이 닿자마자 그대로 미끄러져 전혀 방울이 맺히지 않았다. 검의 날 한쪽에는 북두칠성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고 반대편에는 주문으로 보이는 진언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한번 잡아봐도 될까?”
“그럼요!”
용만이 선일에게 검을 넘겼다. 선일은 검을 잡는 순간 뜨겁고 차가운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그건 마치 검이 살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사인검은 음양의 원리를 통해 요마나 악귀를 물리치는 검으로도 유명하지!”
말을 마친 박 영감은 선일의 손에 있는 사인검을 들어올렸다. 그가 진언이 적힌 검의 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검의 날에 적힌 스물일곱 자의 진언이 이 검의 가치를 알려주고 있어!”
박 영감은 검에 적힌 진언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건강정(乾降精) 곤원영(坤援靈)! 하늘은 정(精)을 내리시고 땅은 영(靈)을 도우시니! 일월상(日月象) 강단형(岡澶形) 위뇌전(撝雷電)! 해와 달이 모양을 갖추고 산천이 형태를 이루어 번개가 몰아치는도다! 운현좌(運玄坐) 추산악(推山惡) 현참정(玄斬貞)! 현좌(玄坐)를 움직여 산천(山川)의 악한 것을 물리치고 현묘(玄妙)한 도리로써 베어 바르게 하라!”
단지 진언을 읽었을 뿐인데 요기를 품은 안개가 어느새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다. 비바람 속에서 박 영감이 소리를 질렀다.
“이 검은 주인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그 위력도 어마어마하게 커질 수 있는 검이야! 처음 용만이 이 녀석이 내 눈에 띈 것도 실은 이 사인검 때문이었지. 누가 사용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검은 이전에 이미 수많은 요마와 악귀들을 벤 적이 있는 신검이야!”
용만이 멋쩍게 말했다.
“그럼 이 검은 저보단 영감님이 가지시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은데요?”
박 영감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예끼, 이놈아! 나 같은 늙은이는 이 검의 검기(劍氣)조차도 감당하기 힘들어! 그리고 집안의 가보를 그렇게 쉽게 남한테 넘기려는 놈이 어딨어? 자, 이제 검 자랑은 그만 하고 어젯밤 일어났다는 사고의 흔적부터 찾자고! 이런 상황이라면 아직도 사고처리가 되지 않고 시신도 방치되어 사고자의 영이 악귀들에게 험한 일을 당하고 있을 거야! 뭐가 나타날지 모르니까 다들 조심하고!”
박 영감의 말에 따라 용만과 선일은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사고의 흔적과 영적인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용만은 사인검을 뽑아들고 검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을 도로에 비추며 영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수정은 소형녹음기를 꺼내 지금까지 겪은 일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소설 《귀신전》에 쓰기 위한 취재인 셈이었다.
한동안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용만이 소리를 질렀다.
“여기요!”
다들 달려가 보니 푸른 자국이 도로 위에 나타나 있었다. 사인검에서 뿜어져 나온 영적인 흔적이 반사되어 드러난 것이었다. 푸른 흔적은 마치 자동차 바퀴의 스키드 마크처럼 도로를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박 영감이 그걸 보고는 중얼거렸다.
“아마도 사고자의 차량과 악귀가 함께 움직인 모양이야!”
그때 수정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잠깐 볼게요.”
그녀가 눈을 감고 손바닥을 영의 흔적이 남은 곳에 갖다 댔다. 용만이 뭐 하는 거냐고 선일에게 묻자 그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이코메트리라는 거야!”
“사이코메트리요? 그게 뭔데요?”
박 영감이 설명했다.
“이런 아둔한 놈! 그럼 너, 잔류사념이란 건 아냐?”
용만이 자신 없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자 선일이 말했다.
“잔류사념이란 살인사건이나 사고현장 같은 곳에 남아 있는 기운 같은 거야. 일테면 살인의 도구로 칼이 사용되었다면 그 칼에는 피해자가 죽는 순간 보았던 장면이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거지. 즉, 강렬한 사념의 기억이라고 할까? 그런 생각이나 기억을 잔류사념이라 하는데, 그 잔류사념을 읽는 능력을 사이코메트리라고 하는 거야. 수정 씨는 그런 사이코메트리 능력자고.”
그제야 용만이 놀란 얼굴로 수정을 돌아보았다. 도로에 손바닥을 대고 잔류사념을 읽던 수정은 양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움찔 하고 몸을 움츠렸다. 손바닥에서 강렬한 영의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은 이전에 수정이 느꼈던 그 어떤 것보다 생생하고 강력한 기운이 담겨 있는 사념이었다.
마침내 수정의 머릿속에 몇 시간 전 조영일이 겪었던 일들이 필름처럼 재생되어 그대로 떠올랐다. 수정은 조영일이 조금 전 그들이 겪었던 것과 같은 일을 당했다는 걸 알았다. 수정은 달려드는 악귀에 놀란 영일의 차가 가드레일을 들이박고 저수지에 추락하는 장면에서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몸서리를 치더니 갑자기 앞쪽의 안개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놀란 선일이 소리를 질렀다.
“수정 씨, 뭐 하는 거야? 돌아와!”
일행들도 그제야 허겁지겁 수정의 뒤를 쫓았다. 어둠 속에서 여러 개의 랜턴 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안개 속을 달리던 수정은 어느 지점에서 우뚝 멈춰 섰다. 일행들도 바로 달려와 멈췄다. 선일이 화난 음성으로 수정의 팔을 붙들고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말도 하지 않고 혼자 그렇게…….”
하지만 선일은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박 영감과 용만이 랜턴으로 도로를 살피는데 불빛에 드러난 도로에 차량의 파편들이 그대로 흩어져 있었고 도로 한쪽 가드레일이 완전히 부서져 있었던 것이다. 이곳이 바로 조영일이 사고를 당한 지점이었다. 박 영감이 랜턴 불빛을 시커먼 저수지로 향하곤 말했다.
“차가 저 밑으로 추락한 것 같은데!”
박 영감의 말에 용만과 선일은 저수지 근처로 내려가 근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용만이 소리쳤다.
“여기 차량 끝부분이 보여요!”
용만이 사인검을 선일에게 맡기며 말했다.
“제가 시신을 건져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잠깐 기다려봐. 영감님한테 물어보고…….”
“물도 깊지 않은데요, 뭘.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신이 저 속에서 악귀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용만은 선일이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랜턴만 들고 물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선일이 용만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머리는 곧 물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박 영감도 뒤늦게 용만을 발견하고 도로 위에서 소리를 질렀지만 폭우에 묻혀버렸다. 용만이 물속으로 사라진 걸 보고는 박 영감이 허겁지겁 비탈을 내려가려 하자 수정이 그를 부축하며 말렸다.
“경사가 급해서 위험해요. 장 법사님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러나 박 영감은 수정의 손길을 뿌리치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런 미련한 놈이 있나! 저 물이 보통 물인 줄 아는 모양이지? 저건 악귀들의 소굴이라고! 본래 악귀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곳이 바로 저런 고여 있는 물속이란 말야! 게다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저 저수지에서 목숨을 잃은데다 이런 날씨라면 음기가 어마어마하게 강해졌을 거야! 자칫하면 악귀들한테 목숨을 빼앗길 수도 있단 말야!”
그때 어디선가 트럭의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안개 속에서 불빛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조금 전에 그들을 지나쳤던 그 트럭의 불빛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박 영감이 불빛을 노려보더니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낭패가 있나! 놈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어!”
박 영감은 저수지 아래 선일과 수정을 번갈아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쪽도 만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박 영감이 아래의 선일을 보고 비장하게 소리쳤다.
“장 법사!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용만이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곳을 떠나선 안 돼! 알았어?”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박 영감이 다가오는 불빛을 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잔말 말고 그렇게만 알아!”
그가 이번에는 수정을 돌아보고 말했다.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소리를 내거나 이 자리에서 움직이면 안 돼. 지금 내가 자네까지 챙길 여유가 없기 때문에 은형법(隱形法)으로 악귀들이 자네를 보지 못하게 눈속임을 할 테니까!”
“못 보게 한다구요? 그럼 절 투명인간으로 만든다는 말씀인가요?”
“그런 재주가 있으면 내가 여기 있지도 않지. 이 주술은 사람이 아닌 악귀들에게만 효과가 있는 거야. 당연히 나나 보통사람의 눈에는 자네 모습이 보여. 중요한 건 자네가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거야!”
그제야 수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 영감은 급하게 수인을 맺고는 은형법을 쓰기 위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자봉승천거 자난강지도 자생남녀귀 축생남녀귀 호아신변 화개일월 엄형불견 속지옴 급급여율령 훔!”
박 영감이 주문을 외자 수정의 주변으로 얇고 투명한 막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박 영감이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었다.
“움직여서도, 소리를 내서도 안 돼!”
“알았어요!”
수정이 대답하자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투명한 공기층이 불안정하게 출렁였다.
“대답도 하지 마! 고개도 끄덕이지 말고!”
수정은 굳은 것처럼 더 이상 소리도 내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트럭은 비바람을 몰고 곧장 박 영감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트럭 그 자체가 사악한 기운의 덩어리였다.
박 영감은 지체 없이 도로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퇴마부적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에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부적의 뒤에 서서 정통밀교 성불수련법인 1)구자인법(九字印法: 九字結界法)의 수인 중에서 부동2)검인(檢印)의 수인을 맺었다.
희끗한 머리를 휘날리며 도로를 막아선 그의 주름진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감돌았다. 박 영감은 양손을 들어 올려 바둑판무늬의 선을 허공에 그으며 아홉 자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3)임. 병. 투. 자. 개. 진. 열. 재. 전!”
그는 글자소리에 따라 자세를 달리하며 수인을 맺어나갔다. 이윽고 박 영감의 앞쪽 허공에 뭔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박 영감이 허공에 그은, 바로 그 바둑판 모양을 닮은 격자무늬의 영적인 기운이었다. 기운은 붉은 선으로 이루어진 격자무늬의 장벽을 만들어냈다.
트럭은 박 영감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수정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박 영감이 주문을 외우자 붉은 선으로 이루어진 격자무늬의 벽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은 마치 박 영감의 기운에 의해 밀려나가는 것처럼 곧장 트럭을 향해 전진했다.
이윽고 영적인 장벽과 트럭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굉음과 함께 비명과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장벽에 부딪힌 트럭은 파도가 부서지는 것처럼 그 형체가 부스러지며 흩어졌다. 트럭에 타고 있던 악귀들의 기운 또한 흩어지거나 부서졌다. 거의 동시에 격자무늬의 벽도 그 형체가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허공에서 사그라졌다. 벽도 트럭도 악귀도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숨을 죽이고 있던 수정이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이제 다 끝난 건가요?”
박 영감이 대답 대신 조용하라는 손짓을 했다. 폭우소리만 제외하면 주변은 폭풍전야처럼 적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폭우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희끗한 존재들이 사방에서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마치 불완전한 화면처럼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하며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내는 이상한 소리도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건 마치 이를 악물고 흐느끼는 소리 같았다. 점점 커진 소리는 마침내 폭우소리마저 집어삼켰다. 엄청난 수의 영들과 악귀들이 도로를 가득 메우며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형체를 드러낸 그들의 모습은 죽음을 맞았던 당시의 참혹한 몰골 그대로였다. 그들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백 년을 이곳에서 악귀로 떠돈 지박령들이었다.
웬만한 일은 다 겪은 박 영감조차도 어마어마한 영의 집단 앞에서 완전히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이건 퇴마사 몇 명으로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목숨을 건지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귀사리는 단순한 악귀의 소굴이 아니었다. 박 영감은 이곳에 거대한 악이 둥지를 틀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박 영감은 수인을 맺은 후 투시를 통해 영들의 마음을 읽어내려 애썼다. 소통할 수만 있다면 이곳의 정체를 밝힐 수도 있고 나아가 그간의 악행에 대한 업장도 풀어줘 이 무용한 싸움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투시를 시도하던 박 영감은 영들과 전혀 소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모두 최면에 걸린 것처럼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들을 지배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 존재는 이렇게 명령하고 있었다.
‘복수하라…… 죽여라…… 복수하라…… 죽여라…….’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저주파의 소리가 영들을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이야기
제1장 귀사리 (5)
주2) 검(劍)의 모양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힘, 파동으로 영(靈)을 압도하는 수인. 주문은 ‘암 크링크링’이며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주3) 임병투자개진열재전(臨兵鬪者皆陣列在煎): 요마를 속박하고 물리칠 수 있다는 아홉 자의 주문. 한 글자를 외칠 때마다 거기에 맞는 수인과 자세를 취해야 하며 조합을 바꿀 때마다 힘과 효과가 달라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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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재미있을때 끝나는군요...다음편도 역시 기대..
아침부터 몇번이나 들락거리다가 새로 올라온 것 보고 완전 기뻤어요ㅋㅋ
지루한 사무실의 활력소가 됩니다ㅎㅎ
뒤의 이야기도 계속 기대되네요
장면 장면이 눈에 보이는해요..ㅠㅠ 감질맛 백만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