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아이>(2008)
얼마 전 팡 브러더스의 <디 아이>를 리메이크한 할리우드영화를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단순히 영화의 만듦새가 형편없기 때문에 실망한 것만은 아니다. 그동안 몇편의 할리우드 리메이크 공포영화들을 보면서 쌓여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진 까닭이다. <디 아이>의 리메이크는 단순히 못 만들었다는 문제를 넘어서, 할리우드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아시아 공포영화 리메이크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노출시킨다. 이것은 원작에 대한 모독에 가까운 행패로 보일 정도다. 마치 공포영화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는 이들이 대충 찍어서 내놓은 것처럼, 대부분의 할리우드 리메이크 공포영화들이 앞 다투어 졸작의 대열에 합류하는 상황이다.
그 어떤 나라보다 장르영화의 오랜 전통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할리우드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고어 버빈스키의 <더 링>을 필두로 <그루지> <다크 워터> <펄스> <원 미스드 콜>(착신아리) <셔터>와 같은 작품들이 관객과 만남을 가졌고, 그 뒤를 이어 <장화, 홍련>(The Uninvited) <여우령> <거울 속으로> 등이 리메이크 제작 열기를 당분간 이어갈 전망이다. 원작 영화와의 비교를 통해서 이들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들여다보자.
고어 버빈스키의 <더 링>이 성공한 까닭
할리우드의 아시아 공포영화 리메이크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작품은 고어 버빈스키의 <더 링>이다. 이 영화는 다른 리메이크 영화들과 언뜻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 것이 성공을 가져왔다. 버빈스키의 <더 링>은 단순히 흥행에 성공한 영화에 그치지 않고, 작품적으로도 매우 짜임새 있는 완성도를 갖추었다. 따라서 버빈스키의 <더 링>과 나머지 리메이크 영화들을 비교하는 것은 원작과의 비교 분석만큼이나 흥미로운 일이다.
<링>(1998) <더 링>(2002)
둘째, 원작과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는 사마라와 관련한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적인 설명이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초현실적 캐릭터를 구축했던 원작과 달리, 리메이크는 좀 더 자세하고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를 구성한다.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던 사마라와 저주받은 비디오, 우물의 발견에 이르는 과정들이 디테일하게 묘사된다. 비디오에 담긴 내용과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연결이 유연하게 이루어졌고, 우물을 발견하는 상황도 원작보다 자연스럽다.
셋째, 영화에 서스펜스를 불어넣는 7일 뒤에 죽게 된다는 설정에 담긴 의미다. 이 제한적인 시간은 원작과 리메이크 모두 동일하지만, 리메이크의 경우 사마라가 우물에 빠진 이후 7일 뒤에 죽었다는 것으로 저주의 시간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분명하게 밝힌다. 원작의 경우 그런 배려가 없다(엉뚱하게도 나카타 히데오의 <링 2>에서는 사다코가 우물 속에서 30년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것으로 설정해버리기도 했다). 저주받은 비디오에 얽힌 죽음과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원작과 동일하지만, 버빈스키의 <더 링>은 많은 손질을 가했다.
앞서 설명한 것들의 핵심은 리메이크에서 어떤 부분에 가장 공을 들였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즉 비주얼이 아닌 이야기에 비중을 실었음을 증명하는 요소들이다.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더 많은 변화들이 있지만, 리메이크는 원작에서 대충 넘어간 부분이나 관객에게 의문을 가지게 했던 설정(다카야마 류지가 갑작스레 초능력이 생긴 것처럼)들을 과감하게 날려버렸다. 뼈대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논리적인 이야기 구성으로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케이스다.
비주얼 활용에서도 고심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 버빈스키의 <더 링>의 도입부에서 드림웍스의 로고가 나올 때 화면에 슬쩍 끼어들던 디지털 노이즈를 기억하는가? 오리지널 <링>이 아날로그 방식의 공포를 묘사했다면, 할리우드 <더 링>은 이를 디지털로 변화시켰다. 사마라가 텔레비전에서 기어나오는 모습은 원작과 동일하지만, 여기서 디지털 노이즈 효과를 가미해 똑같지만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이 장면을 주의 깊게 보았다면 우물 속에서 나온 사다코는 전혀 물에 젖지 않은 모습이었던 반면, 사마라의 몸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똑같은 귀신을 다루고 있지만, 할리우드의 경우는 앞뒤의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짐을 추구한다.
심령공포영화의 핵심은 깜짝 비주얼이 아니다. 그에 앞서 탄탄한 이야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버빈스키의 <더 링>은 이를 충실하게 이행한 케이스다. 이 영화에선 아시아와 미국이라는 전혀 다른 지역의 문화적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 간극을 좁히는 작업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지가 리메이크 영화들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끈적끈적 들러붙는 귀신 대신 정체불명의 괴물만이
이제 또 다른 리메이크 영화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다크 워터> <펄스> <디 아이> <원 미스드 콜>은 공통적인 문제점들을(아쉽게도 <셔터>의 리메이크는 보지 못했다) 가지고 있다. 이 영화들은 소재는 각각 다르지만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다. 바로 귀신에 대한 묘사다. 이 영화들 모두 귀신을 만들기 위해서 선택한 것은 CG와 특수분장의 도움인데, 그 정도가 지나치다.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을 그대로 가져올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리메이크 영화들은 귀신을 마치 괴물처럼 전혀 다른 존재로 바꿔놓았다. 이 변화에 딴죽을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귀신보다는 괴물에 가까운 모습이 그들에게는 더 친숙할 것이다.
<펄스>(2006)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귀신을 다루는 방식에서다. 리메이크 영화들은 처음부터 그 존재를 까발려놓고(아시아 공포영화에서도 흔한 일이긴 하다) 진행한다. 관객이 귀신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질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 장르는 다르지만 <죠스> <에이리언>과 같은 영화들은 전신을 드러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링>의 경우만 해도 사다코의 모습을(아사카와 레이코가 TV 브라운관을 통해서 짧은 시간 사다코를 보지만)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라스트 단 한 번에 불과하다. 그러나 관객은 영화 내내 사다코의 존재를 의식한다. 마지막 한방의 충격이 큰 것은 절제의 미덕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링>(1998)의 사다코
공포를 느끼지 않는 강한 서양 여성들
여주인공들에게 감정이 이입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리메이크 속 그녀들은 지나칠 정도로 건강해 보인다.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특별히 무서워하는 것 같지도 않다. 깜짝 놀라면서 잠깐 긴장된 모습을 보이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에 그친다. 아시아 공포영화에서 묘사되는 여성과는 큰 차이가 있다. 아시아 공포영화 속 그녀들은 감히 어떻게 대적할 수 없는 존재와 맞닥뜨리고, 거기서 오는 불안과 초조, 그리고 긴장과 공포의 감정들을 생생히 보여준다. 걸작이거나 졸작이거나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 정서적으로 느끼는 것은 동일하다. 리메이크 영화 속 여성들에게서는 이런 정서적 느낌을 공유할 수 없다. 주인공이 크게 무서워하지 않는데 스크린 밖에서 멍하니 지켜보는 관객이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있겠는가.
오리지널 <디 아이>의 유명한 엘리베이터 장면을 보자. 좁은 공간에서 벽을 보고 뒤돌아 서 있는 귀신의 모습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발산했다. 리메이크 영화는 이 장면을 똑같이 구성했지만, 공포는 온데간데없이 따분해서 하품이 나올 정도로 밋밋하게 연출되었다. 제시카 알바의 표정에서 등 뒤로 무시무시한 존재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기 힘들다. 장면 구성의 연출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여주인공이 그 정도로 두려움을 느낄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반복되는 귀신의 등장에 면역이 된 그녀는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놀랍도록 차분하게 행동을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관객에게 무엇을 보고 공포를 느끼란 것인지 모르겠다.
<디 아이>(2008)
더 나아가서 절친한 친구의 죽음과 귀신의 존재를 동시에 목격한 여주인공의 얼굴에서는 어떤 공포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죽은 친구의 시신을 조사하는 경찰관을 사람들 속에 섞여서 지켜보는 표정을 보면 믿을 수가 없다. 그 얼굴에는 슬픔도 공포도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표정은 “왜 이렇게 따분하고 재미가 없지”에 가깝다. 더욱이 외형적으로 그녀는 너무 강해 보인다. 그래서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공포를 느낄 때 그 상황에 조금도 동의를 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귀신이 그녀를 더 무섭게 보진 않을까 우려가 될 정도로 그녀의 표정 연기는 너무 딱딱하다.
낡은 아파트에서 모녀를 위협하는 축축한 물의 공포를 탁월하게 그려냈던 나카타 히데오의 <검은 물 밑에서>는 할리우드로 이식되면서, 영화가 가지고 있던 특유의 분위기를 상당 부분 상실했다. 기술 업그레이드로 비주얼은 좋아졌지만, 하나의 캐릭터처럼 물을 묘사했던 원작의 내공을 따를 수 없었다. <다크 워터>에서 제니퍼 코넬리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녀는 원작에서 보여준 구로키 히토미가 보여준 열연엔 미치지 못했다. 제니퍼 코넬리의 표정에는 근심은 서려 있지만, 결코 절망적인 불안을 표현하진 못했다.
<펄스>(2006)
이것들은 영화 시작 3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모습을 보이고, 7분을 넘기기도 전에 실체를 모두 드러낸다. 더 이상 영화를 보지 않아도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지 그려질 정도다. 이왕 망친 거 끝까지 가보자는 심산인지, <펄스>의 라스트는 CG로 도배된다. 공포영화를 보고 있는 것인지, <매트릭스>의 한 장면인지 이해할 수 없는 연출의 세계다.
원작에 대한 할리우드식 재해석이 필요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같은 소재로 출발했지만, 원작과 리메이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 리메이크 영화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감독의 연출력과 작품의 스타일에 어울리지 않는 배우의 비중이 물론 크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원작에 대한 재해석의 노력이나 시도가 전혀 수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 실패작들은 하나같이 비주얼에만 신경을 쏟았지, 할리우드에 어울리는 이야기로 손질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영화들이다. 속알맹이는 빼먹고 사다코와 가야코의 짝퉁들을 경쟁적으로 쏟아낸 충무로 공포영화들처럼 개성과 색깔이 없다.
로이 리
그가 참여하고 있는 신작 공포영화들에 <장화, 홍련> <더 링3> <그루지3>가 대기하고 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작품들에 관여하는 것도 능력이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불안감이 앞선다. <더 링>은 완성도와 흥행 모두를 잡은 특별한 작품이 되었고, <그루지>는 평범했지만 대박을 쳤다. 그리고 재빠르게 내놓은 그 속편 영화들의 완성도는 쓰레기에 가깝다.
나는 로이 리가 신중하게 리메이크 작업에 임하기를 바란다. 두텁게 형성된 공포영화 팬들이 “Fuck”과 “18”을 연발하면서 돈을 쓰는 것이 언제까지고 지속되진 않을 것이다. 바라건대 아시아 공포영화들이 한때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기보다는, 좀 더 생산적인 결과물로 남기를 원한다. 오리지널에 근접 또는 능가하는 수준의 영화를 꿈꾸진 않는다. 단지 팬들이 돈을 지불한 만큼의 재미있는 공포영화를 보고 싶은 것이다. 부디 로이 리가 제작한 리메이크 공포영화는 절대로 보지 않는다는 때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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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9 - [리뷰/귀신 / 심령] - 그루지 2 - The Grudge 2 (2006)
2007/03/19 - [리뷰/귀신 / 심령] - 펄스 - Pulse (2006)
2008/02/29 - [기획 / 특집/칼럼] - 공포의 정수를 놓친 '디 아이' 리메이크
2008/05/29 - [개봉작 / 예정작] - 디 아이 - The Eye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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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좋은 글에 댓글이 하나도 없다니.. 신기해요 ㅋㅋ
잘읽었어요
그러게요... 와우님께서 댓글 다셨으니 이제 주루륵 달리지 않을까요..^^;
간만에 좀 시원한 비평이었습니다.
씨네 21에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