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액션 영화의 오마주
수입사에서는 닐 마샬의 신작 <둠스데이>에 <지구 최후의 날>이라는 거창한 부제를 붙였지만, 많이 과장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지구는 망하지 않아요. 망한 게 있다면 스코틀랜드 정도? 사실 스코틀랜드도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취미를 즐기면서 살고 있지요.
영화는 스코틀랜드에서 치유불능의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시작됩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바이러스가 퍼지자 영국 정부는 감염된 지역에 거대한 강철벽을 치고 북부를 차단해버렸어요. 그러면서 몇 십 년을 살았는데, 멸종한 줄 알았던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위성에 찍힌 겁니다. 한편 런던에서도 바이러스가 퍼지자, 스코틀랜드 출신인 이든 싱클레어 소령과 부하들이 백신을 얻기 위해 파견됩니다. 알고 봤더니 마커스 케인이라는 의사가 병원을 요새화한 뒤 거기서 백신을 연구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케인을 찾으러 글래스고에 간 싱클레어 소령 일행은 거기서 식인 취미가 있는 사도 매저키스트들, 중세 마니아들 그리고 <매드 맥스> 팬클럽 회원들을 순서대로 만나며 피터지는 싸움을 벌입니다.
영화는 뻔뻔스러운 80년대 액션 장르의 오마주입니다. 특히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시리즈와 존 카펜터의 스네이크 플리스켄 시리즈의 영향은 노골적이죠. 마샬은 두 조연 캐릭터들에게 밀러와 카펜터라는 이름을 붙여주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밖에도 마샬이 훔친 영화들은 많아요.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들에서부터 제목도 기억이 잘 안 나는 싸구려 아포칼립스 영화들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만들면서 재미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영화에서 어떤 치밀함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이러스 때문에 브리튼 섬 북부를 고립시킨다는 설정부터 수상쩍은데, 말이 안 되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거든요. 직업상 마구 떠들고 싶긴 한데, 그만 하렵니다. 제가 떠들지 않아도 다들 눈치채셨을 거예요. 결말도 다소 약한 편이고 지능 플레이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죠.
대신 영화는 80년대 B급 액션 영화의 추잡함을 온 몸으로 즐기려 합니다. 단지 액션이 더 폼나게 그려졌고 특수분장이 더 잔인하지요. 우리편인 여자 주인공이 이 영화의 싱클레어처럼 무참하게 사람들을 학살하는 건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킬 빌>의 브라이드를 포함해도 그렇습니다. 이게 꼭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잔인무도함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주인공인 로나 미트라는 괜찮습니다. 특별히 배우로서 연기할 거리는 많지 않은 역이지만, 몸매 좋고 후리후리한 여자 주인공이 악당들을 두들겨 패는 광경은 언제나 좋은 구경거리잖아요. 마샬에 모방하려 했을 법한 제임스 카메론의 여자 주인공들 같은 인간적인 매력은 없지만, 원래부터 피도 눈물도 없는 캐릭터로 짜여졌으니 그런 걸 기대할 필요는 없겠죠. 밥 호스킨스와 말콤 맥도웰도 깔끔한 조연입니다. 캐릭터는 진부하지만 노련한 전문배우가 빈칸을 채워주는 거죠.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건 영화의 내용이나 배경이 우리 관객들에게 굉장히 낯익어 보인다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영화의 영국은 분단국입니다. 지도에 붉은 색으로 칠해진 격리된 북부 지역은 중세 영주 행세를 하는 미친 독재자가 지배하고 있지요. 남부는 사정이 좀 낫지만 막 바이러스가 몰아 닥쳐 하층민들이 죽어가고 있고, 덜 떨어진 최고통치자는 대운하를 터트려 그들을 격리시키고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합니다. 영국에서 만든 재난영화가 이렇게 친숙하게 보여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기타등등
수상을 연기한 알렉산더 사이딕은 말콤 맥도웰의 조카입니다.
2008/04/30 - [개봉작 / 예정작] - '디센트' 감독의 초박력 액션 '둠스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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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보니 영화도 그쪽으로 연관되어 생각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촛불시위 군중을 헐크에 비유한다던가 기타등등)
영화하고 한국의 실정이 비슷할 정도이니 하긴 나라가 국내외적으로 많이 어수선하죠.
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