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 포크스 데이는 제가 아는 유일한 테러리스트 기념일입니다. 물론 그 기념일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경고용이지만, 모닥불에 가이 포크스 허수아비를 태우고 불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중 그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세월이 흐르고 실제 사건이 역사 속에 묻히는 동안, 가이 포크스는 경고해야 할 위험한 반역자의 상징 대신 가치중립적이고 흥미로운 역사의 일부로 남는 것 같습니다.
앨런 무어의 그래픽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브이 포 벤데타>는 가이 포크스의 이미지를 역이용합니다. 이제 그는 국가의 탄압에 대항하는 혁명가의 상징입니다. 당연히 이 영화에서 국회의사당 폭파라는 행위는 거창하고 긍정적인 상징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저승에서 가이 포크스가 이걸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군요.
영화는 가까운 미래의 영국입니다. 미국은 자기네들이 일으킨 제3차 세계대전과 바이러스로 멸망했고 영국은 빅 브라더와 아돌프 히틀러를 반반씩 섞어놓은 듯한 독재자 애덤 서틀러의 철권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주인공 V가 등장합니다. 가이 포크스 마스크를 쓰고 칼을 휘두르는 정체불명의 괴한인 그는, 통금을 어기고 외출했다가 핑거맨이라는 비밀경찰들에게 강간당할 뻔한 방송국 직원 이비를 구해주고 법원 건물을 폭탄으로 날려버립니다. 다음날 이비가 일하는 방송국을 점거한 그는 1년 뒤인 11월 5일에 국회의사당 건물을 날려버리겠다고 선언하지요.
영화는 그 뒤 1년 동안 일어나는 일들을 다룹니다. 이비는 그날 이후 계속 V와 얽히게 되고, V는 그러는 동안에도 꾸준히 암살과 테러를 일삼고, 핀치와 도미닉이라는 두 형사는 V의 과거와 정부의 비리를 파헤치고... 그러는 동안 째각째각 운명의 11월 5일이 다가오는 거죠.
설정만 따진다면 V는 미국 수퍼영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위험한 과학실험으로 탄생한 초능력 인간이지요. 하지만 그의 문화적 뿌리는 조금 더 깊습니다. 그의 행동은 배트맨보다는 오페라의 유령이나 몬테 크리스토 백작에 더 가까워요. 특히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그가 이비랑 분위기를 잡을 때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음악이 뒤에서 들려올 것만 같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V가 부인할 수 없는 테러리스트라는 것입니다. 영화는 V에게 그가 분노하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만 그가 위험한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아요. 아무리 그가 행위의 상징성에 대해 떠들어대도 국회의사당을 폭파하는 행위는 관객들이 상식적으로 쉽게 용납할 수 있는 게 아니죠. 당연히 그들은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에 약간의 거리를 두게 됩니다.
그 결과, 이 영화는 파시즘과 테러리즘에 대한 시의적절한 은유가 됩니다. 앨런 무어는 89년에 이 책을 썼으니, 원작은 대처리즘에 대한 좌파 지식인의 분노에 바탕을 둔 것이겠죠. 하지만 영화는 9.11 이후 국제 사회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국이 주무대이기는 하지만 아들 부시와 미국에 더 그럴싸하게 맞아 떨어지고요. 사실 너무 그럴싸하게 맞아 떨어져서 조금 재미가 떨어질 지경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이야기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영어권 리버럴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디자인되었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여기서 정치적 선언보다 더 중요한 건 영화의 '쿨함'입니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워쇼스키 형제가 각색과 제작을 맡았다는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말이에요. 고색창연한 어조로 떠들어대는 미치광이 테러리스트 주인공과 국회의사당 폭파라는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은 우리의 기대나 희망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쿨한 무언가가 됩니다. 파시즘 치하의 미래 영국이라는 설정 역시 그런 쿨함에 기여할 거예요. 같은 압제 상황 묘사라고 해도 영국인들이 하는 거랑 미국인들이 하는 건 분위기가 다르잖아요.
그 '쿨함'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이 영화가 진짜로 근사한 작품이 되지 못했을 가능성도 큽니다. '쿨해 보이는' 것들은 모든 것들을 필요 이상으로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지요. 복잡한 현실을 그대로 보는 대신 그것들을 평면적인 '쿨한 상징'으로 변화시키니까요. (06/03/16)
기타등등
오래간만에 스티븐 프라이가 게이로 나오더군요. 몇 년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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