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라 없는 고지라 영화
10년 전 이맘때, 세계는 한 편의 영화를 고대하고 있었다. 1954년 이래 22편(당시 기준)이나 제작된 일본의 유명한 괴수영화 시리즈를 할리우드의 대자본과 기술로 리메이크한다는 야심적인 프로젝트. 2년 전인 1996년, <인디펜던스 데이>로 전 세계 흥행차트를 제패했던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과 딘 데블린 프로듀서라는 황금 콤비. 1억 3천 만 달러의 제작비. 어린 시절부터 시리즈를 보며 자랐던 팬들은 이 영화야말로 꿈의 실현이며 1998년 최대의 블록버스터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침내 그해 5월 19일, 전미 3천 3백여 개 극장을 필두로 베일을 벗었던 그 영화의 제목은 <고질라>였다.
결과는 시시했다. 꿈은 깨졌고 흥행 기록은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사실 <고질라>는 대중의 선입견만큼 나쁜 영화는 아니다. 괴수영화로서 <고질라>는 적어도 한 가지의 분명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카메라를 땅으로 내렸다는 것이다. <클로버필드>보다 10년이나 앞서 카메라의 시점을 인간의 눈높이에 맞춤으로써 괴수의 압도적인 거대함을 멋지게 표현했던 것이다. 괴수가 맨하탄에 처음으로 상륙하는 과정을 그린 시퀀스는 일본의 원조 고지라 시리즈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명장면이었다. 이러한 ‘눈높이 앵글’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고지라 모스라 킹기도라 대괴수총공격>과 같은 원조 작품에 응용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고질라>가 팬들을 분노하게 했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고지라의 부재’이다. 고지라 영화의 중심은 고지라.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게다가 고지라 시리즈에는 40여 년(당시 기준) 동안이나 축적된 시리즈 고유의 설정과 규칙이 있었다. ‘고지라는 불멸의 존재이며 사람이나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 라든가 ‘고지라는 방사능 열선으로 무엇이든 불태울 수 있다.’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지만 <고질라>는 그러한 ‘고지라다움’을 깡그리 무시했다. 영화 속의 거대한 이구아나는 유연한 몸놀림으로 뉴욕의 마천루 사이를 뛰어다녔고, 생선에 쉽게 유인되며 사람도 잡아먹었다. 방사능 열선을 발사할 줄도 몰랐고 결정적으로 미사일 몇 발을 맞고 죽어버렸다. 지극히 이질적인 디자인과 더불어 이러한 특성은 영화 속 괴수의 정체성을 고지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고지라가 아닌데 고지라라고 우기는 꼴이었던 것이다. 팬들은 이 돌연변이를 절대로 고지라로 인정할 수 없었다. 괴수를 수트메이션이 아닌 CG로 표현한 것도 비판 받았던 부분이기는 하지만, 할리우드 대작이라는 특성상 치명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관객과 평단이 지난 10년 동안 <고질라>를 그토록 싫어하고 무시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일본 괴수 스타의 험난한 할리우드 상륙
고지라 영화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다는 계획은 1980년대 초반부터 있었다. 1983년, 당시 <13일의 금요일> 2편과 3편을 연속 히트시키며 젊은 장르 감독으로 주목 받았던 스티브 마이너는 일본에 있는 토호 사를 직접 찾아가 리메이크 제작에 대한 허락을 받아냈다. 마이너의 계획은 그의 소박한 성(姓)과는 반대로 대단히 ‘메이저’한 것이었다. A급 배우를 캐스팅하고, ILM 같은 최고의 시각효과 회사를 끌어들여 <킹콩>을 능가하는 대작을 만드는 것이 그의 지상 목표였다. 게다가 전작인 <13일의 금요일 3>에서 3-D 입체영화를 시도했던 그는 가제를 <괴수왕 고지라 3-D(Godzilla: King of the Monsters in 3-D)>라고 정한 뒤 아예 전편을 3-D로 촬영하려고 했다.
<괴수왕 고지라 3-D> 버전 고지라 모형(왼쪽)과 함께 포즈를 취한 윌리엄 스타우트.
유감스럽게도 <괴수왕 고지라 3-D>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마이너는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몇 달 동안 헛되이 발품만 팔았다.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너무 비싸다’는 점이었다. 마이너의 비전을 그대로 현실화하려면 3천 만 달러가량의 예산이 필요했다. 요즘은 블록버스터도 아닌 고만고만한 영화를 만들 정도의 액수이지만, 1983년 당시 이것은 까무러칠만큼 엄청난 비용이었다. 그 해 개봉된 <스타 워즈 에피소드 VI: 제다이의 귀환>의 제작비가 3천 250만 달러였음을 떠올리면 대략 그 규모가 짐작이 갈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마이너가 노련한 영화사 경영진을 설득할 수 있을만한 거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조지 루카스가 아니라 경력이라고는 저예산 공포영화 두 편에 불과한 새파란 신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막판에 예산을 절반으로 깎아 제시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할리우드판 고지라를 만들려는 첫 시도는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딘 데블린(왼쪽)과 롤랜드 에머리히
바로 그때, 롤랜드 에머리히와 딘 데블린 콤비가 등장했다.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SF <스타게이트>에 이어 1996년 여름을 온통 휩쓸었던 <인디펜던스 데이>를 함께 만든 그들은 세계 시장을 노리는 대작이 될 할리우드판 고지라와 궁합이 가장 잘 맞아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엘리엇과 로시오의 각본을 대폭 뜯어고치고 고지라의 디자인을 날렵하게 바꾸어 민첩한 생물로 바꾸는 등 거리낌 없는 파격을 시도했다. 토호는 이렇게 과격한 변화를 내심 불안하게 여겼으나 이미 몇 년의 시간을 낭비한 뒤였기에 마침내 에머리히-데블린 안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주연으로는 블록버스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고 여겨졌던(영화가 개봉되자 실제로 그랬음이 확인되었다) 매튜 브로데릭이 기용되었다. 트라이스타는 1998년 여름을 목표로 개봉 1년 전부터 티저 예고편을 내보내며 대대적인 홍보에 들어갔다. 관객들은 티저 예고편에서 박물관에 전시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골격을 종잇장처럼 납작하게 짓밟고 지나가는 거대한 괴수의 발과 ‘Size Does Matter’라는 홍보 문구에 열광했다. 괴수의 모습은 발과 꼬리, 눈동자만 노출하도록 해 디자인에 대한 궁금증도 고조시켰다. 여기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실패, 그리고 그 후...
시간이 갈수록 <고질라>에 대한 불길한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반 대중에게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개봉일까지 꽁꽁 숨기겠다던 ‘새로운 고지라’의 디자인이 캐릭터 상품의 시제품을 통해 유출되었다. 이 디자인은 고지라 시리즈의 골수팬들 사이에서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고지라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제작진은 실제 디자인과는 다르다고 해명했지만, 영화를 통해 공개된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영화의 완성도에 대해서도 개봉 전부터 부정적인 이야기가 돌았다. 길어진 후반작업으로 테스트 시사회조차 하지 못했던 빡빡한 일정 때문에 에머리히는 미처 영화를 다듬을 틈조차 갖지 못했고, 개봉 3주 전에야 완성본을 볼 수 있었던 극장주들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라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영화사는 개봉 초기에 집객을 극대화하기 위해 뻥튀기 홍보에 더욱 열을 올렸다.
메모리얼 데이 휴일까지 합친 개봉 첫 주 성적은 7천 4백 만 달러. 충분히 위력적인 출발이기는 했지만, 개봉 2주차에 59%나 흥행 수입이 하락했고 최종 수입은 제작비에 겨우 맞먹는 1억 3천 만 달러에 그쳤다. 전형적인 용두사미였던 셈이다. 혹평이 사방에서 미사일처럼 날아들었다. 영화의 공식 웹사이트 게시판은 폭주하는 비난으로 개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폐쇄되었다. 디자인 유출을 막아야 한다는 규정 탓에 개봉일이 되어서야 캐릭터 상품을 팔 수 있었던 업자들은 영화가 기대 이하의 반응을 보이자 악성 재고 처리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고질라>는 이후 홈 비디오 시장에서 꾸준한 수입을 올리기는 했으나 작품 자체의 평가가 워낙 나빠 성공작이라는 의견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국에서는 <여고괴담> 등 한국영화를 내리고 <고질라>를 상영하도록 한 직배사의 횡포가 반발을 사기도 했다.
알려진 바로는 시리즈를 염두에 두었다고 하지만, 저조한 결과 탓에 속편 이야기는 구체화되지 못했다. 1998년 9월부터 속편격인 애니메이션 시리즈 <고질라 더 시리즈>(한국에서는 <고질라>라는 제목으로 SBS에서 방영)가 방영되어 좋은 반응을 얻기는 했지만, 쓰러진 영화판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에머리히-데블린의 무모한 파격과 작품에 대한 가혹한 반응에 자존심 상한 토호가 이듬해인 1999년 <고지라 2000>을 시작으로 소위 ‘밀레니엄 시리즈’라고 불리는 새로운 고지라 시리즈를 제작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리메이크 권리와 이구아나 괴수 캐릭터의 저작권은 토호로 되돌아갔다. 이후 토호는 고지라 시리즈의 (당분간은) 최종작인 <고지라: 파이널 워즈>에서 이구아나 괴수를 ‘지라’로 공식 명명했으며, 지라가 극 중 진짜 고지라의 방사능 열선을 맞아 제대로 힘도 못 써보고 불타 죽는 장면을 삽입하기도 했다. <고지라: 파이널 워즈>의 감독인 키타무라 류헤이는 DVD 음성해설에서 X성인 통제관이 지라에 대해 "역시 참치나 처먹는 놈은 안 된다니까!"라고 일갈하는 대목에서 ‘(이는) 에머리히에 대한 메시지’라며 조롱 섞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고질라>의 실패와 원조 고지라 시리즈의 휴면으로 가까운 미래에 할리우드 리메이크를 볼 수 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우선 일본에서의 성공적인 부활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역으로 할리우드에서 화려한 부활을 도모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괴수영화 자체가 예전만큼의 각광을 받지 못하는 현재로서는 어쩌면 시간만이 약이 될 수도 있다. 언젠가 괴수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다시 고조되었을 때, 고지라는 돌아올 지도 모른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10년 전 <고질라>가 정반대의 평가를 받았더라면 고지라 시리즈를 비롯한 괴수영화 장르는 조금 다른 길을 걸어오지 않았을까. 괴수영화 팬으로서 항상 아쉬움을 느끼는 대목이다. 언젠가는 제대로 된 할리우드판 고지라 영화를 보고 싶다는 소망 역시 아직 버리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고질라>는 계륵 같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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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래도 10년전에 이 영화를 보고는, 헐리우드에서 이런 영화를 찍어줬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기뻐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오랜만에 나온 본격 거대괴수영화였지요. 그런 면에서도 의미는 있습니다.
기대보단 못했지만 재미있게 본 영화였어요
광고에 많이 나와서 친숙하기도 하고..
괴물 디자인은 정말 왕실망이에요..
일본 영화 고지라는 못봤지만요 ㅎㅎㅎ
디자인에 오리지널 고지라의 요소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건 아니지만, 팬들에게 받아들여지지는 못했지요.
킹기드라와 고지라의 화끈한 대결...이거 헐리우드에서 특수효과 멋지게 해서 만들면 좋겠는데...고지라도 좋아하지만 킹기드라도 멋지고 만들어 주삼..^ ^
킹기도라는 올 여름 <미이라 3>에 특별출연한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관객이 좋아할만한 요소가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것이 매우 안타까움,
에머리히의 연출력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작품이었지요.
꽤 괜찮은 영화였는데 말이죠..그만큼 기대치가 컸단말인가요..정말 클로버필드보면서 고질라와 비슷한 감흥을 받았다는..
괴수영화로서 나쁜 작품은 아닙니다. 과장된 홍보가 관객의 기대감을 지나치게 키우긴 했습니다만.
좋아하는영화다...
전체적으로 보면 좀 그렇긴 해도
장면 장면들이 너무 멋있었던 영화!
괴수 디자인은 용서 안됨 -_-+
도입부의 맨하탄 상륙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지요.
고질라라고 이름을 짖지말고 다른이름으로 했으면 더 흥행했을텐데..
2편에서 진짜 고질라와 싸우는 스토리로 했어도 좋았을꺼고...
바로 그게 문제였지요. 아무리 봐도 고지라 영화가 아니었으니. 본문에도 언급이 되었지만, 진짜 고지라와의 싸움은 <고지라: 파이널 워즈>에서 현실화가 되었습니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밑천이 드러났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작품...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한 번 속지 두 번은 안 속지요 :-)
<인디펜던스 데이> 때의 방식으로, 그것도 출력을 높여서 그대로 밀어 붙였으니...
그래도 <고질라> 이후 크게 실패한 작품이 거의 없다는 게 에머리히의 놀라운 점입니다.
Loomis // 이번에 또 크게 한 건 말아먹지 않았나요, 만비씨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네요!
감사드리며 제 블로그로 담아갈게요~
문제는 그렇게 토호가 열받아서 '이것이 진짜 고지라다!'라고 들고나온 밀레니엄 시리즈도 그다지 볼만한 물건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지만 그건 딴 얘기고... (GMK는 워낙 별종이니 예외로 칩시다 OTL)

갓질라 더 시리즈의 전편 DVD출시나 어떻게 좀 안되려나요...(미국에서도 걸작선 형식으로 일부만 나오고 땡인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