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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술집 주인 줄리언의 아내 애비는 남편의 술집에서 일하는 바텐더 레이와 연애 중입니다. 이를 알아챈 줄리언은 그들의 불륜 현장을 잡아낸 사립탐정을 고용해 그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그가 고용한 사립탐정에게는 그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죠...

바텐더와 바람을 피우는 아내, 그들의 관계를 눈치채고 복수를 다짐하는 남편, 남편이 고용한 사립탐정... 코엔 형제는 제임스 M. 케인의 소설에서 <블러드 심플>의 기본 설정을 그대로 훔쳐와 80년대 중반으로 옮겨놓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블러드 심플>에는 케인의 소설을 특징짓는 끈끈한 감정 묘사는 없습니다. <블러드 심플>의 캐릭터들은 케인의 주인공들처럼 깊이있게 묘사된 존재들이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그들의 위치는 부차적입니다. 우린 그들이 빠진 난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종종 감정이입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상황의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블러드 심플>은 장르 게임이며 플롯 게임입니다. 첫 영화에서부터 코엔 형제는 그들이 얼마나 능수능란한 플롯의 장인인지 확실히 입증해주었습니다. 뻔하디 뻔한 캐릭터의 네 남녀가 뻔하디 뻔한 상황 속에 말려드는 이야기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방향은 새롭고 낯섭니다.

코엔 형제는 이 네 명의 운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어처구니없이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모든 정보를 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음모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사립 탐정도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지요. 마지막 생존자인 애비도 사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캐릭터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즐기는 새디스틱한 사악함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영화는 자연스럽게 블랙 코미디의 분위기를 풍기게 됩니다.

결과는 거의 거장답습니다. 관객들은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두 알고 있습니다(사립탐정의 동기가 분명히 드러나는 장면은 없지만 그 정도야 쉽게 추측해낼 수 있죠.) 하지만 주인공들에게 이 모든 사건들은 초자연적인 악몽과도 같아요. 이런 면에서 영화는 <디아볼릭>과 가깝기도 합니다. 특히 레이와 애비가 겪는 일들은 거의 공포 영화 같습니다. 죽은 남편이 전화를 걸어오고 멀쩡하게 살아있는 자기들의 시체를 찍은 사진이 발견되고... 어떻게 보면 <디아볼릭>보다 더 낫습니다. 의도적인 계획이 아니라 전혀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거든요.

보다 노골적인 공포 영화의 흔적도 발견됩니다. 아직도 자기를 죽이려는 남자를 생매장하려는 처절한 시도는 거의 에드가 앨런 포우 풍(고로 당연히 로저 코먼 풍)이고, 창문으로 들어오려는 손에 칼을 박는 장면은 그들이 함께 일했던 샘 레이미의 영화와 상당히 닮았습니다. 벽과 문에 총을 쏘아대는 마지막 장면은 마리오 바바의 <너무 많이 아는 여자>에서 빌려온 것 같기도 하군요. 물론 인용은 공포영화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제임스 M. 케인에서부터 에드가 G 울머에 이르는 수많은 하드보일드 소설들과 필름 느와르 영화들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 있으니까요. 아까도 말했지만 코엔 형제는 지금 장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80년대 풍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각적 스타일은 코엔 형제의 차가운 인용과 플롯 게임에 박진감을 부여합니다. 특히 배리 소넨필드가 스태디 캠으로 정신없이 돌려댄 카메라 덕택에 영화는 종종 현기증이 날 정도입니다. 하긴 이런 게 소넨필드 시절 코엔 형제 영화의 특징이기도 했지만요.

배우들은 캐릭터보다는 이미지와 틀을 연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원래부터 목적이었죠. 다들 상당히 좋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느끼한 사립탐정을 연기한 M. 에멧 월시입니다. 영화의 블랙 코미디에 가장 잘 봉사하는 배우이기도 하죠. 댄 헤다야도 자신의 불쾌한 분위기를 적절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프랜시스 맥도먼드(이 영화가 데뷔작입니다)의 캐릭터는 다소 투명하지만 기능적으로는 완벽합니다. 가장 약한 배우인 존 게츠도 잘 캐스팅된 배우입니다. 그 사람의 불안정함과 무개성이 오히려 레이라는 캐릭터에 잘 어울리거든요. 참, 영화 중간을 보면 당시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룸메이트였던 한 배우의 목소리가 전화 응답기에서 흘러나오는 걸 들을 수 있습니다. 홀리 헌터라고 하던가요.

<블러드 심플>은 '깊이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영화는 순전히 스타일과 장르에 대한 풍부한 지식, 영리한 플롯 꼬기로만 구성되어 있거든요. 어떻게 보면 완벽한 데뷔작입니다. 영화 만드는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도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넌지시 보여주기까지 했으니까요. (02/03/01)

기타등등

얼마 전에 코엔 형제는 <블러드 심플>의 감독판을 새로 개봉했습니다. 감독판이라지만 재편집으로 늘어지는 부분을 다듬은 정도이지, 새로 추가되거나 삭제된 장면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에 상영되기 전에 조금 괴상한 클립이 상영되었어요. '포에버 영'사의 모티머 영이라는 아저씨가 앞에 나와서 아주 수상쩍은 내용으로 <명작 극장>식 프롤로그를 했거든요.

그 뒤에 나온 DVD는 한술 더 떴습니다. 자칭 '포에버 영'사의 아트 디렉터인 케네스 로링이라는 영국 남자가 오디오 주석을 맡고 있는데, 로더릭 제인즈의 영국인 사촌임이 분명한 이 남자가 영화 내내 하는 말이라곤, 차내 장면은 차와 배우들을 거꾸로 매달고 찍었다느니, 영화에 나오는 개는 애니매트로닉스 로봇이라느니, 사립탐정 캐릭터는 원래 불가리아 독재자 지브코프의 아들이라느니 따위의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만 골라서 하고 있거든요. 아마도 코엔 형제는 감독판 개봉과 DVD 출시를 패러디와 농담의 기회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Posted by DJ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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