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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본 아이덴티티>가 그랬던 것처럼, <본 슈프리머시> 역시 로버트 러들럼의 원작 소설에서 기초적인 설정만 빌려오고 있습니다. 예의상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만 빌린 독자적인 영화죠. 그 때문에 손해를 본 캐릭터들도 있습니다. 초반에 잠시 등장했다 퇴장하는 마리가 그렇죠. 중간중간에 가족이 위기에 빠져서 문제지,원작에서 본은 마리와 결혼해서 3편까지 애까지 낳으며 잘 산다고 하니까요. 10여년 전에 나온 시리즈 번역본이 아직 절판되지 않은 모양이니 한 번 구해서 느긋하게 읽어봐야겠군요.

영화 <본 슈프리머시>는 전편인 영화 <본 아이덴티티>에서 이어집니다. 제이슨 본은 인도에서 여자 친구 마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수께끼의 암살범이 그를 살해하러 찾아오고 본은 다시 CIA와 첩보전의 한가운데 던져집니다. 한편, CIA의 감찰관인 파멜라 랜디는 CIA 요원과 정보제공자가 살해된 현장에서 제이슨 본의 지문을 발견하고 CIA내의 비밀 부서 '트레드스톤'에 대해 알게 됩니다.

영화의 스토리나 설정은 그렇게까지 치밀하지는 않습니다. 스파이 스릴러라는 장르를 고려해보면 단순하고 서툴기까지 하죠. 노련한 전문가라면 역시 그만큼이나 노련한 전문가가 현장에 실수로 지문을 남길 거라고 단순하게 믿어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고 해도 가장 범인일 가능성이 높은 상사를 외진 곳으로 불러들인 뒤 자기가 발견한 걸 설명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거고요. 아무리 현장이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자살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자기 할 일을 다하는 경찰이 그 사실을 정말로 믿어버릴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이 영화의 설정은 빠른 스토리 전개를 위해 사실성을 잘라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설정들이 드라마와 효율적으로 융합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본 슈프리머시>의 줄거리는 자연스럽게 흐르지 못합니다. 주인공의 절박한 심정과 드라마의 박진감이 따로 노는 느낌도 강하고요. 예를 들어 아무리 주인공이 위기 상황에 빠져 있다고 해도 관객들이 가장 얼굴을 확실하게 익힌 악당이 죽은 뒤라면 흥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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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본 슈프리머시>는 여전히 흥미로운 스릴러입니다. CIA나 베를린 경찰들이 이상할 정도로 서툴러도, 본 자신은 날렵한 프로페셔널입니다. 이전에 뭘 배웠는지는 아직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일단 위기상황이 닥치면 감탄할 정도로 지형지물을 잘 활용하며 빠져 나오지요. 이 영화의 재미 대부분은 본의 전문가다운 유려한 솜씨에서 나옵니다. 여기엔 꽤 괜찮은 사실주의가 가미되어 있어서 (그도 높은 데에서 떨어지면 다리를 절고 총에 맞으면 피를 흘립니다) 그의 액션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카메라를 휘둘러대는 폴 그린그래스의 스타일은 이 영화의 액션에 독특한 느낌을 부여합니다. 특히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카체이스 장면에서는 효과적으로 쓰이지요. 핸드헬드 카메라의 사용 자체는 낯선 게 아니지만 이 영화의 카체이스에는 분명 이전 영화들의 자동차 발레에서 느낄 수 없었던 날 것의 분위기가 녹아 있어요.

영화는 이런 식의 기존 스릴러 영화들과는 달리 주인공에게 상당히 어두운 음영을 넣어주기도 합니다. 후반 스토리 자체가 그렇잖아요. 본은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 때문에 쫓기는 게 아니라 감추어도 될 자신의 옛 범죄를 고백하기 위해 달아납니다. 여기에 이 영화의 모럴이 있습니다. 감추고 잊어버리는 것만으로 과거의 죄가 해결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누군가가 앞에 나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 당사자가 심지어 살인 자체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말단 현장 요원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이런 모럴은 분명한 정치적인 메시지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설정에 비해 결말이 지나치게 깔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죠. 본의 살인 뒤에는 진짜로 책임을 져야 할 CIA 중간 보스와 러시아 재벌이 버티고 있지요. 편리하게도 그들은 정부나 체제가 아니라 타락한 중간 관리나 개인이고요. 영화가 끝날 무렵 이 도덕적 붕괴는 본과 같은 고독한 영웅과 청렴결백한 감찰관 파멜라 랜디 같은 사람들에 의해 완벽하게 정화됩니다. 아마 다들 그 이상의 모호함은 원치 않았나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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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데이먼은 점점 그럴싸한 액션 영웅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의 액션은 과시적이지 않으면서도 힘과 설득력이 있습니다. 비교적 제한된 표정 연기에도 불구하고 감정 역시 진실되어 보이고요. 그가 정공법으로 관객들을 찌르는 동안 브라이언 콕스와 조운 앨런이라는 멋진 선배들은 캐릭터를 넘어선 근사한 연기를 선보이며 그를 보좌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줄리아 스타일즈는 이번에도 하찮은 단역에 낭비되었지만 스토리상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2편이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으니 3편인 <The Bourne Ultimatum>도 곧 나오겠지요. 하지만 본 시리즈가 제임스 본드 시리즈처럼 배우들을 갈아치우며 장수하는 시리즈가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그래서도 안될 거고요. 제이슨 본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은 설정의 불안함과 성장의 가능성에 있는 게 아닌가요? (04/08/26)

기타등등

후반부에 네스키 의원의 딸 이레나로 등장하는 아리따운 처자는 <Lilja 4-ever>의 옥사나 아킨시나입니다.

Posted by DJ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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