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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KO에서 연달아 히트 호러물을 내던 발 루튼은 슬슬 주류로 진입하고 싶었습니다. 재능도 있고 실력도 있는데, 언제까지 남의 세트를 빌어 B급 영화나 만들고 있으라는 법도 없죠. 그래서 그는 이번엔 야심을 조금 크게 잡았습니다. 윌리엄 호가스의 판화들을 원안으로 삼아 광기와 이성, 선과 악을 주제로 한 거창한 시대극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한 거죠. 유감스럽게도 그가 만든 미니 대작인 <베들램>은 흥행에 실패했고 그 결과 그는 RKO에서 떨려나고 말았습니다. 그 뒤, 그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저예산 영화 세 편을 더 만들고 죽어버렸습니다. 너무 하죠? 루튼이 RKO를 위해 벌어 준 돈이 얼만데. <베들램>이 루튼의 기존 영화들에 비해 약간 비싼 영화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A급 영화들에 비하면 저예산이었다고요. 스타도 보리스 칼로프 하나밖에 안 나왔고요.

영화 제목인 'Bedlam'은 무대가 되는 'The Hospital of St. Mary of Bethlehem'의 별명입니다. 이 정신병원은 실제로 있었던 곳인데 환자들에 대한 학대가 엄청났고, 부패한 병원 관리자들이 부유한 사람들의 오락거리로 삼기 위해 환자들을 이용하기까지 했다는군요. 이런 부패와 학대를 목격한 우리의 주인공 넬 보웬은 주범인 병원 원장 조지 심즈와 맞서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넬이 채 손을 쓰기도 전에 심즈는 넬을 정신병자로 몰아 그의 병원에 감금하죠.

영화의 세계는 둘로 나뉩니다. 이성과 안락함에 의해 지배되는 바깥 세계와 그것들이 무참하게 박살나는 베들램의 세계죠. 영화는 이 두 세계 모두를 공들여 담고 있습니다. 발 루튼과 마크 롭슨이 18세기 영문학의 날카로운 위트를 담아 쓴 대사들은 지적이고 우아하며 흥미진진합니다. 이런 대사들은 정신병원 내부에 들어가서도 형태는 그대로 유지되는데, 단지 이성과 논리의 구조가 살짝 깨어집니다. 거기에 발 루튼식 황량한 드라마와 비주얼이 결합되면 근사한 광기의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노골적으로 폭력적인 장면은 없지만 이번에도 루튼은 포우의 힘을 빌어 상당히 사디스틱한 결말을 하나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영화의 전체적인 인상은 그의 이전 걸작들에 비해 살짝 약한 편인데, 그건 루튼 자신의 야심과 관계 있습니다. <베들램>을 A급 영화처럼 만들려고 했던 그는, 그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주류의 감각을 따랐던 거예요. 한마디로 교훈이 지나칩니다. 특히 넬의 정신적 지주 겸 미래의 남자친구 쯤으로 설정된 퀘이커 교도 해니가 나올 때마다 하품이 나옵니다. 이런 식의 결백함은 필요가 없었어요. 넬이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인 이유도 착하기만 한 순둥이가 아니기 때문인 걸요. " My heart is a flint, sir -- it may strike sparks, but they are not warm enough to burn. I have no time to make a show of loving kindness before my fellow men -- not in this life. I've too much laughing to do."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사람이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 정신병자들을 위해 몸과 정신을 바친다는 설정이 재미있는 영화인데, 설교는 그 재미를 망쳐버리죠.

그래도 <베들램>은 루튼식 어둠이 근사한 명암을 만들어내는 멋진 루튼 영화입니다. 사악한 유머와 사디즘이 적절하게 결합된 보리스 칼로프의 악역도 멋들어지고요. 주인공을 연기한 안나 리도 예상 외로 좋습니다. 칼로프와 대적하는 장면에서도 밀리는 구석이 전혀 없고 무척 아름답기도 해요. 인류애와 비폭력에 대한 생기없는 설교를 지워버리고 이 두 사람의 대결에 증오와 혐오의 에너지를 조금 더 담았다면 영화가 얼마나 근사해졌겠어요. (05/11/23)

Posted by DJ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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