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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머리카락 (4)



부모님이 지병으로 돌아가신 후 나는 홍주로 이사했다. 국도에서 빠져서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차를 몰고 5분은 들어가야 하는 변두리였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집이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실 때만 해도 반은 한옥 식, 반은 양옥 식이었고 마당이 무척이나 넓었던 집이었으나, 그 집을 대대적으로 밀어버리고 꽤 이름난 인테리어 전문가를 고용해 그 자리에 현대식 집을 지었다. 저택 정도까지는 안 되어도 팬시점에서 파는 꽃 편지지에 등장할 정도는 되어 보이는 이층집이었다.

아내와 나 모두 부모가 물려준 돈이 넉넉했기에 생활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당시 나는 미대를 졸업하고 서양화가로 활동하고 있었고, 전국미술대전에서 두어 번 수상하기도 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아내는 여전히 되먹지도 않은 글 나부랭이를 쓰며 시간을 좀먹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더 이상 아내의 글에 대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내의 글은 어설픈 감상주의와 치기 어린 해피엔딩으로 점철된 연애담이 대부분이었고, 시간이 흘러도 그 수준이나 완성도에 전혀 진전이 없었다.

여하튼 둘 다 한적한 교외에서 살면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는 생활에는 동의했기에 그리로 이사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시골이라고는 하지만, 차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대형 마트가 있었기에 생활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바로 그 무렵, 작년 늦봄이었다.

봄비가 늙은이의 마른 눈물처럼 청승맞게 내리던 오후, 나는 시내 화방을 향해 차를 몰고 있었다. 바닥난 몇몇 유화물감과 새 붓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 때 국도변에서 손을 흔드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였다. 우산도 없이 그녀는 차를 잡고 있었다. 나는 어지간하면 국도변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을 내 차에 태우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은 예외였다. 묘한 이끌림이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게 했다.

“감사합니다. 휴, 가랑비에 옷 젖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네요.”

그녀는 차문을 닫으며 마치 노래를 부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맑아지는 목소리였다. 우산 없이 왜 도로변에 서 있었냐는 내 물음에 그녀는 대답했다.

“방금 6년째 사귀던 남자랑 헤어졌거든요. 차안에서 헤어지자는 얘길 꺼냈더니 여기에 떨궈주고 가네요. 매너 꽝이죠?”

그러고는 그녀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순정만화에나 나올 법한 웃음소리 ‘풋’을 실생활에 활용하는,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독특한 여자였다.

“감기 걸리실 것 같은데, 어디 따뜻한 데 가서 차라도 한 잔 대접해도 될까요?”

히터를 올리며 그녀에게 그런 제의를 한 것도 그 영문 모를 이끌림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백된 듯한 치아를 환하게 드러내며 내 제의를 승낙했다. ‘꽃섬’이라는 카페에서 마주한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녀를 만난 후에야 나는 아내를 만난 게 아내의 머리카락에 홀린 ‘콩깍지’였을 뿐이란 걸 깨달았다. 그녀는 내가 무의식중에 원하던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여자였다. 사실 모든 게 완벽했다. 단 하나. 머리카락만을 제외하면.

신은 공평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인 듯하면서도, 반대로 신은 불공평하다는 말이 더 들어맞는 상황인 듯도 했다. 어떻게 아내 같은 추물에게는 저렇게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선사하고서 아름다운 그녀에게는 저토록 푸석한 개털을 얹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머리카락은 정말 오래된 싱크대의 찌든 때를 닦고 버린 쇠수세미 같았다.

“근데…… 미혼이세요?”

그녀가 물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다고 대답해버렸다. 사실 정말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 후로 그녀와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만나는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거나, 그녀와 잠자리를 하고 돌아온 날에는 아내와 얼굴 마주치기도 싫었다.

게다가 아내는 점점 여위어가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진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체내의 수분이 일정량씩 증발하기라도 하는지 점점 말라비틀어졌다. 얼굴을 볼 때마다 썩어 들어가는 고목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아내의 그 머릿결만은 늘 풍성했고, 생기가 넘쳐흘렀다. 묘한 부조화였다. 마치 줄기를 달고 있는 뿌리는 완전히 썩어 쭈글쭈글 오그라들었는데, 그 뿌리에 달려 있는 줄기는 변함없이 푸르른 생기로 넘쳐나는 것과 같았다.

아내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집으로 걸어온 그녀의 전화를 아내가 받았던 날이었다.

“누구야.”

아내는 물었다. 물기 없는 말투였다. 나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내심 아내가 이혼하자는 얘기를 먼저 꺼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 말이 끝났을 때 아내가 말했다.

“헤어져.”

처음에 나는 그 말뜻을 이혼하자는 말로 알아듣고 내심 기뻐했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그 여자가 누군지, 어떤 여잔지, 알고 싶지 않아. 책임을 추궁할 생각도 없어.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이 그 여자한테 지금 당장 전화를 걸어서, 내가 보는 앞에서 헤어지자는 얘기를 하는 거야.”

그러나 그녀와 헤어지기에는 늦은 상태였다. 이미 나는 아내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래?”

아내는 기가 막히는 듯 눈을 치떴다. 아내의 머리카락이 형광등 불빛에 올올히 빛나며 귀기(鬼氣)를 뿜어내고 있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거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래. 당신이랑 이혼하는 한이 있어도 못 헤어져.”

결연한 내 대답에 아내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내는 연신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증오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저 여느 여자나 다름없이 평범하기만 했던 아내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감추어져 있었다니, 소름이 끼쳤다.

한동안 코웃음을 치던 아내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그 년을 죽여주지.”

아내의 입가가 씰룩였다.

“어떻게 죽일지 알아? 면도날로 죽죽 그어서 살을 채 썰 거야. 당신이 보는 앞에서. 당신이 품었던 그 년의 얼굴, 입술, 가슴, 엉덩이, 허벅지, 모두 가늘게 썰어버릴 꺼야. 그리고 당신이 보는 앞에서 먹어치우겠어.

아내의 말투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글을 쓴다지만, 그런 섬뜩한 얘기를 나에게 하는 것부터가 정신 상태를 의심할 만큼 엽기적이었다.

“내가 장난하는 것 같아? 장난인지 아닌지, 보여주지.”

아내는 실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때 나는 보았다. 한 올 한 올이 살아 움직이는 환형동물처럼 허공으로 쭈뼛 일어서는 아내의 머리카락을.

마치 사방에서 강한 정전기가 아내의 머리카락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나는 놀라 뒤로 자빠졌다. 내 어깨에 부딪힌 화초가 바닥에 떨어지며 박살났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내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죽을 것이란 사실을.

사방으로 뻗은 아내의 머리카락들은 심해의 해초처럼 너울거리며 살기(殺氣)를 뿜어냈다. 나는 버르적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내는 서서히 나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니들 인간들이란……. 다 그 따위밖에 안 돼. 모든 게 순간이지. 그 찰나의 쾌락 때문에 자신을 망치는 거야. 그게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아? 순간이야. 수컷이 사정하면서 느끼는 오르가즘은 고작해야 30초야. 그 30초를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하지.”

낮게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노기로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 머리카락들과 얼굴과 목소리에 이르기까지, 내 앞에 선 아내에게서 평범했던 아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연관성이 없는 무수한 단어들이 무질서하게 떠올랐다가 바스러지기를 반복했다. 다중인격. 염력. 정신분열. 물신숭배. 연쇄살인. 카니발리즘. 면도날. 아귀(餓鬼). 메두사. 존속살해…….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듯 뛰었다. 뭔가 변명을 해야 했다. 일단은 아내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변명으로 아내의 비정상적 상태를 진정시켜야 했다. 하지만 입만 달싹거려질 뿐 내 입에서는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죽는 건 순간일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렇지? 하지만 아냐. 내가 아주 천천히 죽음을 음미할 수 있게 죽여 줄 수 있어. 이 여자의 가족도 그랬지. 4년을 사귀어오다 이 여자를 걷어찬 자식도 그랬고, 이 여자의 뱃속에 두 번이나 아기를 들어앉히고도 수술비만 내밀었던 자식도 그랬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면서……. 설마 전에 내가 했던 거짓말들을 다 믿은 건 아니겠지? 아니 믿었을 수도 있어. 인간은 복잡하면서도 사실 단순하니까……. 이성이니 뭐니 하는 게 인간의 전부일 것 같아? 고통을 맛보게 되면 이성 따윈 안중에도 없게 돼. 한 순간이라도 고통을 멈출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어지지. 그 느낌을 알아? 신체가 도막도막 나면서 자신이 서서히 죽어 가는 느낌 말야. 그걸 한번 느껴봐.”

아내는 미쳤다. 어쩌면 아내는 인간이 아닌지도 몰랐다. 여하튼 나는 아내가 나를 죽이려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아침에만 해도 된장찌개를 끓여 주고, 인기 있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악녀가 너무 한다고 그 인물이 실존 인물이라도 되는 듯 험담을 늘어놓았고, 내 간이 안 좋아진 것 같다며 간장약을 챙기던 아내였다. 그런 아내가 머리카락을 사방으로 하늘거리며, 귀기 어린 표정으로 끔찍한 대사를 읊으며 다가서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이지 치가 떨리는 공포였다.

주변을 휘둘러보았지만, 내 몸을 방어할만한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 집을 중심으로 반경 1km 이내에 사람이라고는 아내와 나 뿐이었다. 낮이라면 주변의 과수원에 배 봉지를 싸러 오는 아낙들이나 과실수에 농약을 뿌리러 오는 농부들이라도 있을 테지만, 지금은 그 모두가 돌아간 시간이었다.

“여……여보. 자, 잠깐만…… 잠깐만 진정해봐. 내, 내가 경솔했던 거 같애. 잠깐 진정하고 다시 얘기해 보자구, 응?”

나는 겨우 더듬거리며 아내에게 말을 꺼냈다.

“여……여보. 자, 잠깐만……? 진정? 경솔? 얘기? 니가 그렇게 수습하면 이 모든 게 다 없었던 게 되고 전처럼 다시 돌아갈 것 같애?”

아내는 내 말투를 흉내 내며 냉소를 흘렸다. 그 때 다시금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의 눈이 전화로 쏠렸다. 그 틈을 타 나는 현관으로 내달려 현관문을 부수다시피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현관 입구에 놓인 대여섯 개의 계단을 한 번에 뛰어내렸다. 그러나 운이 좋지 않았다. 땅에 착지하면서 발이 접질려 나는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오른쪽 발목 관절이 어긋난 모양이었다. 아내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죽는다. 죽는다.

나는 볼썽사납게 다리를 절룩이면서도 필사적으로 뛰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내는 이미 계단에서 땅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침착하면서도 신속한 동작이었다. 사방으로 뻗힌 시커먼 머리카락들이 연신 너울거리고 있었다. 먹이를 찾아 너울거리는 히드라의 촉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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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의 공포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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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이자정)

Posted by Jong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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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옥인간 2008/05/11 14:02

    갈수록 흥미진진..!! 역시나 다음편을 기대하며..

  2. 어서..바리깡을!!

  3. 김명순 2008/05/13 00:35

    잘 잃었습니다.

  4. 아~ 저번에 읽고 나서 궁금하여 혹시나 하고 들렀는데...
    기쁘군요. 담편이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