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감독이 창조한 새로운 영화
<엑스맨>과 <스파이더맨>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주류가 된 슈퍼히어로 영화의 고민은 리얼리티였다. 가장 만화적인 캐릭터인, 오로지 상상의 산물인 슈퍼히어로가 실사영화에 등장했을 때 관객은 어떻게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을까? 일단은 현실적인 고뇌를 부여함으로써 동질감을 얻는 것이 가능했다. 타인과 다른 나, 일과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춘 등 엑스맨과 스파이더맨의 고민은 관객이 일상에서 느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드라마 <스몰빌>과 <히어로즈>의 성공 원인도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고민을 공유한다 해도, 사건과 상황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면 일단 거리감이 생기게 된다. 과장과 왜곡이라는 만화적 특성을 한껏 살린 슈퍼히어로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기기 위해서는 신중한 변화가 필요했다. 일단 의상부터. 엑스맨이 입었던 원색 혹은 형광색의 타이즈는 무채색의 현실적인 슈트로 바뀌었다. 그리고 슈퍼히어로의 초월적인 능력도 가능한 현실적으로 표현해야만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데어데블이 귀로 물체를 인식하는 광경을, 관객은 눈으로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관객이, 적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만이라도 슈퍼히어로의 활약을 ‘사실’이라고 믿으며 빠져들 수 있기에.
하지만 워쇼스키 형제의 전략은 다르다. 21세기 영화의 트렌드를 바꿔놓은 <매트릭스>는 현실과 가상현실 혹은 판타지의 세계를 겹쳐놓는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살고 있는 곳은 사실 꿈이지만, 그들이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 역시 꿈이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버린 현실이 아니라, 네오가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있는 꿈의 현실인 것이다. <매트릭스>에서 현실을 강조하면 할수록 부각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 살아왔던, 그리고 여전히 스미스 요원과 싸우고 있는 ‘꿈’속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슈퍼히어로를 현실과 접합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슈퍼히어로만의 공간에서, 슈퍼히어로가 가장 돋보이고 활약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홍콩 무술영화와 사이버펑크를 뒤죽박죽으로 섞으면서 워쇼스키 형제는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현실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를 완벽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워쇼스키 형제의 목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세계가 아니라, 현실의 확장형으로서의 판타지다.
<스피드 레이서>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마하 고고고>는 미국으로 건너가 <스피드 레이서>가 되었다. 워쇼스키 형제는 일본 애니메이션 인기의 시발점이 되었던 <스피드 레이서>를, 그들이 느꼈던 흥분 그대로 스크린에 재현하기를 원한다. <스피드 레이서>에게 적당하게 리얼리티를 부여하여 현실적인 레이싱 영화로 만들어 내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않는다. <스피드 레이서>는 완벽한 판타지의 세계다. 오로지 가족과 레이싱을 위하여 헌신하는 부자가 있고, 그들을 완벽하게 내조하는 여인들이 있다. 일본적인 가정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 <스피드 레이서>의 가족관은 50년대의 미국 사회를 적절하게 은유한다.
자동차 레이싱 경기장은 아이들 장난감에서나 보았던 레이싱 트랙과 비슷하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트랙, 360도 회전하는 트랙, 공중으로 점프를 해야만 하는 트랙은 현실에서 절대 불가능한 풍경이지만 워쇼스키 형제는 그 모든 것들을 ‘환상’적인 현실로서 그려낸다. <스피드 레시어>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워쇼스키 형제는 <스피드 레이서>를 만들기 위해 ‘실사 아니메 영상(live-Action anime look)'이란 기술을 적용했다. 셀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에는 등장인물, 전경, 중경, 후경 등을 각각 그린 셀화를 겹쳐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내는 기법이 사용된다. 실사 아니메 영상은 이런 애니메이션의 기법을 도입한 것이다. 영화에 사용될 전경, 중경, 후경을 각각 완성한 후 세 개의 이미지를 겹겹이 쌓은 후 각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 기법으로 만들어진 화면은 고의적으로 원근법을 무시하고, 비사실적으로 화면이 왜곡된다. 이것은 만화적인 영상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 방향으로 간다. 더욱 더 ’만화, 애니메이션‘ 다운 영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실사와 아니메의 접목
워쇼스키 형제는 지금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이미 영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와 TV 드라마가 혼재된 새로운 볼거리.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한 그것을 영화라고 부르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던 혹은 알고 있는 영화와는 다른 외양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스크린에 옮기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워쇼스키 형제는 독자적인 그들만의 길을 가고 있다.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씬 시티>를 만들면서, 감독협회에서 탈퇴하면서까지 프랭크 밀러를 공동감독으로 내세웠다. 영화 <씬 시티>에 나오는 이미지의 거의 모든 것이 이미 만화에 들어 있던 것, 즉 프랭크 밀러가 창조한 것이기에 공동감독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만화의 세계를 스크린으로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 목표였다는 말이다. 잭 스나이더의 <300>의 세계나 프랭크 밀러가 연출하는 <스피릿>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코믹 북 나아가 그래픽 노블의 영상화다. 그래픽 노블의 둔중하면서도 화려한 이미지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던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스크린으로 그대로 모사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만화와 애니메이션과 홍콩무술영화와 온갖 대중문화의 요소들을 섞어 새로운 ‘리얼리티’를 만드는 데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스피드 레이서>는 일상적인 리얼리티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마음대로 장면들을 이어 붙인다. 영화적으로는 어색하지만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컷들이 난무한다. 소년과 원숭이가 장난을 치면 바로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무대가 바뀌고, 느린 화면과 정지 화면도 수시로 등장한다. 전혀 쓸데없는 농담들도 난데없이 등장한다. 워쇼스키 형제는 그들이 빠져들었던 애니메이션의 세계를, 영화라는 틀 안에서 자유롭게 재구성하는 데 여념이 없다. 가끔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지만, <스피드 레이서>는 오로지 자신의 세계에만 빠져 앞으로 나아가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스피드 레이서>는 <매트릭스>로 정상에 오른 오타쿠의 자아도취라고 불러야 할까? 어느 정도 그런 혐의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스피드 레이서>의 첫 번째 관객은 워쇼스키 형제 자신들일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쿠엔틴 타란티노나 안노 히데아키처럼, 자신이 보고 싶은 영화를 스스로 만드는 오타쿠 감독에 속한다. 그들의 영화는 수많은 인용으로 가득하다. 그 인용들을 몰라도 즐길 수는 있지만, 알아챈다면 즐거움은 배가된다. <스피드 레이서> 역시 마찬가지다. <스피드 레이서>에는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마니아들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인용들이 수두룩하고, 일반 관객에게는 다소 불친절하게 자신들의 판타지만을 화려하게 창조해냈다.
그럼에도 <스피드 레이서>는 블록버스터로서의 역할을 방기하지 않는다. <스피드 레이서>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스피드’다. 레이싱 경기의 짜릿한 흥분을 워쇼스키 형제는 유감없이 보여준다. <드리븐>의 속도감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스피드 레이서>는 쏜살같이 달려가는 자동차의 속도감과 자동차의 충돌에서 느껴지는 쾌감을 극단적으로 과시한다.
분명하게 워쇼스키 형제는 오타쿠다. 자신들 입으로 그렇게 말해 왔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베끼거나 재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다. 마지막 그랑프리에서 스피드 레이서가 모는 차의 이름은 마하 5호가 아니라 마하 6호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마하 5호가 아니라, 워쇼스키 형제가 창조한 것은 새로운 레이싱 카 마하 6호인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그들이 보고 열광했던 것들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새로운 ‘영화’로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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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스피드 레이서 - 워쇼스키 형제의 첫번째 가족영화
Tracked from 페니웨이™의 In This Film 2008/05/09 17:54 삭제여러분들은 '레이싱 애니메이션' 하면 어떤 작품이 떠오르는가? [이니셜 D]라던가 [사이버 포뮬러]가 먼저 생각나는가? 그렇다면 아마도 당신은 비교적 신세대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달려라 번개호]가 생각나는가? 그렇다면 아마도 필자와 같은 (구)세대일 가능성이 높다. [달려라 번개호 (원제: 마하 Go Go Go)]는 1976년 TBC방송을 통해 한국팬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내일의 희망안고 번개호는 간다~"로 끝나는 주제가를 기억하는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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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스피드 레이서 (speed racer) - 잃어버린 중력을 찾아서
Tracked from *cookbook of sound* 2008/05/09 21:23 삭제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스피드레이서 DVD Vol.4의 이미지. 행운의 빨간 양말이 도드라져 보인다. 왜 우리는 롤러코스터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왜 우리는 롤러코스터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를 느끼는 걸까. 그것은 지구인이라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힘, 중력 때문이다. 이미 매트릭스를 통해 사이버세계와 현실세계를 능수능란하게 오고갔던 워쇼스키 형제는 이 영화를 통해 근본적인 힘의 한계가 존재하는 지구를 벗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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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trashformation 2008/05/16 11:26 삭제영상혁명(映像革命)!! 이런 표현은 좀 오바스럽긴 하다. 그래도 영화 스피드 레이서를 한 두 단어 정도로 압축하기에 이만한 표현이 많진 않을 것 같다. 매트릭스부터, 워쇼스키 형제는 새로운 형태의 영상 연출을 만들어 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매트릭스가 공각기동대를 비롯한 여러 재패니메이션을 포함, 기창작된 많은 소스들에게 빚을 지고 있긴 하다만, 그 영화 한 편을 통해 워쇼스키 형제가 창조해 낸 것은 말 그대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 이후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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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영화를 보고싶게끔 만드는 영화평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영화도 잘 봐야겠어요
재밌는 영화입니다. 독특하고 새로운 장면들도 많고요.
극장용 영화니 놓치지 마시길...^^
시사회가 당첨되어서 봤는데 정말 볼만하네요..
이건 뭐 영화라기보단 애니메이션에 더 가깝다는.. ㅋㅋ
나름 복고풍의 위트도 있고요~ ㅎㅎ
재밌습니다. 간만에 볼만한 영화가 나온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