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런의 <배트맨 비긴즈>는 90년대에 만들어졌던 <배트맨> 시리즈의 프리퀄이 아닙니다. 조엘 슈마처가 프리퀄 아이디어를 굴렸을 땐 그랬을지 모르죠. 하지만 놀런이 완성한 <배트맨 비긴즈>는 이전 영화들의 프리퀄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새 시리즈의 프롤로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앞뒤가 맞지 않아요. 일단 이 영화에서 브루스 웨인의 부모를 살해한 건 조커가 아닌 걸요.
데이빗 S. 고여가 초안을 잡은 영화의 각본은 브루스 웨인이라는 평범한 청년이 어떻게 박쥐 가면을 뒤집어 쓴 정의의 용사가 되었는지 보여줍니다. 강도에게 부모를 잃고 고민하던 브루스 웨인은 정처없이 전세계를 떠돌며 방황하다 듀카드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에 이끌려 히말라야에 위치한 수상쩍은 비밀결사의 아지트인 성에서 훈련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 결사의 목표가 자신과 어긋난다는 걸 알아차린 그는 성을 불지르고 고담시로 돌아오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배트맨이라는 가면을 뒤집어 쓰고 썩어 빠진 고담시를 청소합니다.
고여의 각본이 특별히 신선하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수퍼 영웅 이야기의 첫 회를 쓴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썩 재미있습니다. 언제나 '영웅의 탄생'부터 장엄하게 시작된 <수퍼맨> 이야기들과는 달리 <배트맨> 이야기의 도입부는 거의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죠. 고여는 브루스 웨인이 어떻게 수퍼 영웅 흉내를 낼 수 있을만큼 육체적으로 단련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배트 케이브와 배트모빌을 얻을 수 있었는지, 왜 가면으로 박쥐를 골랐는지, 왜 그런 식으로 악당들을 처치할 생각을 품었는지 차분하게 그려냅니다. 물론 아직 경사였던 지미 고든이나 그나마 정상적이었던 마피아 두목인 카르미네 팔코네와 같은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것도 잊지 않아요.
그러나 이 영화에서 정말로 재미있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이야기를 다루는 태도입니다. 놀런의 이야기는 어처구니없이 진지합니다. 애덤 웨스트가 나온 <배트맨> 시리즈는 캠프 천국이었고 90년대에 나온 네 편의 영화들도 자신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지 꾸준히 관객들에게 힌트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놀런은 이 이야기를 마치 실존인물의 전기라도 되는 것처럼 엄숙하고 심각하게 다룹니다. 이 영화에는 자조적 농담이 거의 없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기 짝이 없고요. 이런 태도가 너무나 일관성 있어서 오히려 영화 전체가 시치미를 뚝 뗀 농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농담은 심각하고 디테일이 충만된 농담입니다. 영화는 브루스 웨인을 2차원적인 만화 주인공 대신 고담 버전 햄릿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햄릿처럼 그는 생각많은 복수자입니다. 하지만 죽여야 할 숙부가 새 아빠가 되어 맨날 눈 앞에 얼쩡거려 미칠 것 같던 덴마크 왕자님의 경우와는 달리 브루스 웨인에겐 분명한 복수의 대상도 없습니다. 살인이 일어난 날 밤에 체포된 그 시시한 악당은 십 여년 동안 감옥에서 썩다가 결국 남의 손에 살해되었거든요. 그는 고민하고 고통받다가 결국 다소 정신나간 방식이지만 자기만의 해결책을 찾습니다. 영화는 그러는 동안 웨인이 겪는 내면의 갈등을 엄청 심각하고 진지하게 그려내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이런 이야기에서 당연히 중심이어야 할 육체적 액션이 그에 눌려버리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이 영화에서는 배트맨도 브루스 웨인에게 눌립니다. 가면을 벗은 평범한 청년 브루스 웨인이 가면 쓴 수퍼 영웅 배트맨 보다 훨씬 재미있거든요.
놀런이 그리는 고담시는 팀 버튼과 조엘 슈마처가 그린 화려한 장르 세계와는 다른 곳입니다. 가끔 <블레이드 런너>처럼 살짝 근미래의 분위기를 풍기긴 하지만 가짜 필름 느와르나 캠프 판타지의 무대가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진짜 미국 도시에 가깝죠(미국 도시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미국 억양으로 말하는 영국인들이 많긴 하지만). 놀런은 일부러 호사스러운 특수 효과들을 자제하고 액션 대부분을 구식 스턴트로 일관하고 있는데, 그 때문에 이 영화는 이전 영화들보다 훨씬 '사실적'으로 보입니다.
놀런의 영화는 '사실적이고 진지하기 때문에' 이전 버전보다 우월할까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치미 뚝 뗀 심각함이 지금까지 나왔던 배트맨 영화들이 도달하지 못했던 새로운 스타일을 부여해주는 건 사실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조커와 같은 가면 쓴 악당들이 등장하고 본격적인 배트맨 액션의 문이 열리는 다음 작품에서 이 스타일이 어떻게 꽃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입니다. (05/06/21)
기타등등
고든이 겨우 경사라니, 이 사람이 국장이 되고 바바라가 배트걸이 될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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