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멍하고 섬뜩하다
한국 공포문학의 빛나는 성취
이혼을 하고 연하의 소설가 세준과 재혼한 홍지인은, 악몽을 꿀 때마다 하나씩 손톱이 빠져버리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처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손톱을 먹어치워 버리는 존재가 무엇인가, 다. 수수께끼의 행려병자가, 죽어버린 전 남편이, 손톱을 먹어버린 존재는 라만고라고 알려준다. 라만고는 뉴질랜드 원주민 부족에서 왕족의 손톱과 발톱을 먹는 직책인 동시에 죄악을 저지른 자를 심판하는 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라만고가 왜?
홍지인은 악몽을 꿀 때마다 다른 누군가가 되어, 사신에게 죽는 경험을 한다. 그 누군가는 연쇄살인마, 고문수사관, 전문 킬러 등 누군가를 죽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고, 그 죄의 결과로 사신에게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사신의 얼굴은 악몽마다 바뀌고, 변하지 않는 것은 손톱뿐이다. 누군가가 된 홍지인은 항상 길고 강한 손톱으로 죽임을 당하고, 깨어난 홍지인의 손톱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 악몽이 말하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김종일의 장편 <손톱>은 섬뜩한 악몽의 정체를 찾아가는 치밀한 구성이 탁월한 공포 스릴러다. 홍지인이 찾아야 하는 것은 악몽과 라만고의 정체다. 꿈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나는 과연 실제 인물일까? 꿈속에서 기억나는 사건들이 실제로 벌어진 사건인 것을 확인하고, 꿈속의 나를 현실에서 만나면서, 홍지인은 자신의 꿈이 허튼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왜 그들이 나의 꿈에 나타나는 것일까? 게다가 악몽을 꾼 후 손톱이 뽑힌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꿈들을 잇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악몽과 손톱 그리고 홍지인과 라만고를 연결하는 고리들은 무척 정교하고, 확실하게 인과관계가 맺어져 있다. 리얼리티와 세밀함이라는 측면에서 <손톱>은 탁월한 성취를 이루어낸다.
또한 무엇보다 <손톱>에서 돋보이는 것은, 공포를 끌어내는 상징이다. 김종일 작가의 전작은 <몸>이었고, 이번에는 <손톱>이다. <몸>에서는 우리들 모두 가지고 있는 육체의 모든 부위를 헤집고 갈라놓더니, 이번에는 손톱을 하나씩 뽑아버린다. 과거 일제와 독재정권의 경찰이 용의자의 손톱 아래에 바늘 등 뾰족한 것을 찔러 넣는 고문을 흔히 일삼았던 것처럼. 손톱을 뽑아버리거나 아래의 속살을 헤집어 놓는 것은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다. <손톱>은 손톱만이 아니라 갖가지 육체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것이 고통이지만, 또한 고통은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가장 구체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삶이고, 살아 있기 위해서는 육체의 고통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라만고가 꿈에서 지옥을 보여준 다음 손톱을 뽑아가는 것은, 아직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징표일 수도 있다. ‘타락한 자아의 재생이 현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라만고라면, 필연적으로 육체의 고통을 수반해야만 하는 것이다.
김종일 작가는 <손톱>에서 전작과 마찬가지로 육체에 천착한다. 가장 끔찍한 육체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정신적 타락을 질타한다. 또한 육체가 존재해야만, 현실의 구원이 가능해진다. 홍지인의 악몽은,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졌던 실제의 사건들이다. 홍지인이 악몽들을 꾸고 손톱이 뽑혀야 하는 이유는, 홍지인이 실제로 저지른 죄악 때문이다. 악몽의 근원은, 결국 현실의 죄 때문인 것이다. 원죄 같은 추상적인 죄가 아니라, 그가 저지른 가장 구체적이고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 그 죄를 인식하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가장 끔찍한 육체적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십자가에 매달리던, 불구덩이에 던져지건, 심각한 육체적 고통을 겪어야만 그는 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인간에게는 라만고라고 불리는 이 존재가 심판자가 되어 그 인간 본연의 영혼을 지옥으로 내몰고 그 육신에 깃들어 원소유자로 살아간다고 한다. 그 재생의 과정에서 당사자는 손톱이 뽑히는 육체적 고통과 함께 자신이 죽는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고 한다.’
독창적인 설정, 긴박하면서도 아귀가 맞는 플롯과 에피소드, 의미심장한 주제까지 <손톱>이 한국 공포문학의 빛나는 성취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기발한 설정과 정밀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거울 속의 나’라는 상징이 유독 한국 공포영화나 소설에서 반복해서 다루어진 주제라는 점이다. 내 안의 나, 숨겨지거나 잊혀진 나를 끌어내 심판하는 이야기는 솔직히 좀 식상하다. <손톱>은 손톱을 뜯어내는 라만고에 대한 호기심과 빠른 구성 덕에 긴장감이 사라지진 않지만, 결말이 익숙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중반이 넘어서면서 홍지인의 비밀이 무엇인지, 저절로 떠올랐다. 그럼에도 그 점 때문에 <손톱>이 탁월한 공포소설이라는 점을 훼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손톱>은 무엇보다 빠르고 즐겁게 읽히고, 한번쯤 모든 것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가슴이 멍하면서도, 섬뜩한 공포소설이다.
총 페이지 수: 383, 권수: 1권
꼭 읽어야 할 사람들: 완성도 있는 한국 공포소설을 손꼽아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
읽으면 재미있을 사람들: 공포소설이 그저 무서운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읽지 말아야 할 사람들: 현실은 아름답고 우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족은 신성불가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작품의 끓는 점: 200쪽 - 행려병자의 입에서 라만고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듣고, 그가 죽는 것을 홍지인이 보았을 때
관련 링크 - 김종일 작가의 <몸>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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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점에 들렀다가 우연히 집어들었던 책입니다. 시작이 굉장히 흥미진진해서 사왔는데 그날 밤늦게까지 잠도 안 자고 독파해 버렸다죠. 잠시도 책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몰입도 최강이었던 소설인데, 여기서 리뷰를 읽으니 반갑네요. 솔직히 저는 저렇게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는지는 몰랐지만요. ^^;
소설도, 리뷰도 초강추~
어..국내에서도 호러소설들이 꾸준히 나오는 모양이네요
이 작가분 몸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강추를 하시니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ㅎㅎㅎ
앗, 저도 <몸>을 잼있게 읽었습니다.
특히 '입'이라는 제목의 스토리는 정말 섬뜩했습니다.
이종일 작가의 <이프>도 아주 잼있더군요.
<몸>이 영화로 제작된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꼭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손톱>도 기대가 되는군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반드시 읽어라고 메인에 제목까지 다셨서 호기심에 클릭을 ^^
근데 전 여기와서 이 책이 나왔다는걸 처음 알았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이런 책은 별로 홍보를 안하는것 같네요
호러소설을 좋아해도 독자들이 애를 써서 찾아야만 알 수 있다면
출판사에서 홍보를 하는데 문제가 있는거 같습니다.
잘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참.. 저도 몸을 재미있게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