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아이들
남자 집의 열쇠를 그가 종종 찾던 카페에 맡겨버린 여자, 엘리자베스는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녀는 열쇠를 핑계로 카페 주인 제레미에게 말동무가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제레미는 그녀에게 팔리지 않는 블루베리 한 조각과 아이스크림을 제공하고, 둘은 과거의 상처를 위로하며 늦은 밤을 보내곤 한다. 어느 날 그녀는 훌쩍 떠난다.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하는 여정은 멤피스와 아리조나와 네바다로 이어지고, 그 동안 엘리자베스는 헤어진 남자와 여자, 그리고 도박사의 딸을 만난다.
오티스 레딩의 'Try a Little Tenderness'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 더없이 어울리는 노래다. 상처 입은 사람, 힘들어하는 사람 곁에서 조금의 애정을 베풀면 어떻겠냐는 충고, 왕가위가 말하고 싶은 건 별 게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상처에 민감하기 마련이고 세상에 자기의 상처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엘리자베스처럼. 그러나 미국을 횡단하던 엘리자베스는 다른 사람들도 그녀만큼 아파하며 산다는 걸 알게 된다(말이 쉽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들의 고통은 사랑을 버린 자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그 집착의 끝에서 그들은 사랑했던 사람을 잊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타인의 삶도 존중하게 되리란 걸 의미한다.
지상으로 달리는 전철과 그 옆에 위치한 건물, 카페,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 왕가위의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가 그의 작품임을 금방 알아차릴 게다. 다리우스 콘쥐가 카메라를 잡았으나 그는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기보다 왕가위의 전작들에 적응하는 길을 택했다. 독특한 컬러와 거친 입자와 왜곡된 구도는 여전하고, 영화의 리듬에 맞춰 카메라의 속도를 고속과 저속으로 조절하고 있으니.
그것은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주드 로와 데이비드 스트라던은 실속을 차리지 않는 왕가위표 남자를 연기하고, 레이첼 와이즈와 나탈리 포트먼은 왕가위표 팜므파탈로 변신한다. 여느 때의 모습과 달리, 겉으로 과장되고 텅 빈, 그러나 안으로는 부글거리는 인물을 연기하는 그들은 왕가위식 연기를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주인공으로 분한 노라 존스의 연기만이 그들과 다르다. 그녀의 연기와 다른 배우들의 그것에선 가수와 프로 연기자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일례로, 노라 존스와 나탈리 포트먼이 투샷으로 잡힌 장면을 보자. 몇 초 사이에 변화무쌍한 표정 변화를 보여주는 포트먼과 밋밋한 얼굴의 존스는 대조적이다. 진짜 연기자의 표정이란 얼마나 풍부한 것인지 새삼 실감했다.
포스터에 쓰인 키스 장면이 영화엔 두 번 나온다. 두 번째 장면의 행복감도 좋지만, 키스의 여운을 살린 첫 번째 것이 나는 좋았다. 클로즈업 된 노라 존스의 입가에 머무는 미소는 오래 전 <아비정전>에서 장만옥을 기억하게 한다. 매점에서 낮잠을 자던 장만옥의 얼굴에 살짝 스쳐가던 미소. 그녀는 장국영의 꿈을 꾸고 있었을까. 그러나 영화는 대답하지 않았고, 장국영의 물음에도 장만옥은 대답을 거부했다. 그 상황은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도 반복된다. 여자들이란...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왕가위의 걸작으로 볼 수는 없다. 이 영화는 왕가위의 전작보다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와 더 비교될 운명을 타고났다. 미국 밖에서 평가를 먼저 받은 작가가 미국 땅에 와서 영어권 배우들과 찍은 로드무비에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길 위에 선 주인공들의 이야기라는 설정도 비슷하다. 게다가 어쩌려고 왕가위는 <파리 텍사스>의 음악을 맡았던 라이 쿠더까지 데려왔다. 고독한 인간이 통과하는 실존의 문제, 비극적인 운명을 넘어서는 실낱같은 희망을 다룬 <파리 텍사스>에 비해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표피적인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나풀거리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몇몇 대사는 지금 당장 편지에 써먹어도 될 만큼 감각적이며, 내레이션이 돋보였던 왕가위의 영화에서 대화와 편지와 일기가 전면에 나선 점도 주목할 만하다. 사람들은 이제 혼자 중얼거리지 않고 마주보거나 문자를 빌려 상대방의 존재와 온기를 확인한다. 그래서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왕가위의 어떤 영화보다 따뜻하다. 왕가위의 전작들이 단지 땅만 바꿔 똑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한다고 판단한 사람에겐 시원찮은 작품이겠지만, 어느 정도의 감성만 뒷받침된다면 마음을 촉촉이 적시기에 충분한 영화다.
★★★☆
2008/02/27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 My Blueberry Nights (2007) by DJ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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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보면서...
중경삼림,타락천사 계속 떠올랐어요 (지극히 개인적)
중경삼림 금성무,타락천사 양채니, 이런 캐릭터가 겹치기도 하구요~^^;;
왕가위 영환 어쟀던 도시의 냄새 연인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주 소재이자 당골 이네요~ㅋ
리뷰 재밌게 봤습니다.
왕가위의 이전 영화를 떠올리지 않고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보기란 힘들 거예요. 관객의 머릿속에 그의 스타일이 그만큼 강하게 박혀 있다는 말이겠지요.
그의 감성이 서양에 가서도 고스란히 묻어있는 이 작품을 보고 역시 왕가위답다라는 말이 나오더군요-
좋게말하면 언제나와같은 왕가위의 감성적인 필름이겠지만
반대로 보자면 이제는 너무 진부한 냄새가 나는 영화이겠죠
첫 서양배우들과 함께한 작업에서 아마도 실험적인 방향보다는 안정적인 쪽으로 간 듯 합니다
물론 다리우스 콘지의 촬영도 일품이지만은 역시나 그의 작품을 맛깔나게 보여주는건 크리스토퍼 도일이죠
맞는 말씀입니다. 안정적인 쪽. 그가 그걸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만 보면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