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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함의 중요성

이언 매큐언은 소설 <속죄>(<어톤먼트>의 한국 번역판 제목)를 시작하기에 앞서 제인 오스틴이 쓴 <노생거 수도원>의 한 부분을 발췌해 보여줬다. 그 부분은 “몰란드 양, 당신이 품어온 의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생각해보세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겁니까?”라는 말로 시작해 ‘그녀는 수치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예고편이나 포스터만으로 <어톤먼트>를 접한 관객은 이 영화를 연인의 사랑과 비극 그리고 그들을 질투한 소녀의 음모에 관한 작품으로 착각할지 모른다. 원작 소설과 영화가 일정 부분 그런 내용과 주제를 담고 있는 게 사실이나, <어톤먼트>는 궁극적으로 한 여자의 60년에 걸친 후회와 속죄에 관한 영화다.

소설 <속죄>는 네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는 1935년의 비극적인 여름날을, 2부는 이차대전으로 이별하게 된 세실리아와 로비의 이야기를, 3부는 간호사로 살아가는 브라이오니와 그녀가 소설로 완성한 허구적 사실들을, 4부에 해당하는 ‘1999년 런던’은 77번째 생일을 맞은 브라이오니의 하루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그 구성을 거의 그대로 따왔으나 원작의 많은 부분이 심리적인 묘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소설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희생되는 부분이 어쩔 수 없이 발생한다. 대표적인 예가 1935년의 ‘꽃병 사건’이다. 소설과 영화에서 공히 그 사건이 두 번 다뤄지고 있지만, 소설이 전후 상황을 정확히 묘사한 것과 달리, 영화만 봐선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다. 그 결과 관객은 브라이오니가 사건의 중심에 놓이게 된 과정에 대해 오해를 범할 수도 있다. 소설 속 브라이오니는 자기의 방만큼이나 세상을 말끔하게 정돈하려는 열망을 가진 아이이며, 그런 성향으로 인해 사건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지하고 만다. 그런데 영화의 브라이오니는 자칫 사랑과 질투로 인해 눈이 먼 소녀로 취급될 여지가 다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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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해서 이야기해보자. 영화 <어톤먼트>는 사랑의 열정과 이별과 속죄에 관한 이야기다. 1935년과 1940년 전후를 주 배경으로 벌어지는 영화의 구성엔 특이한 데가 있다. <어톤먼트> 안에는 대략 3개의 가지 - 첫째, 1935년 어느 하루에 세실리아, 로비, 브라이오니에게 벌어진 사건. 둘째, 1940년 전후에 세실리아와 로비가 나누는 편지와 전쟁 상황, 그리고 브라이오니의 변화. 셋째, 1999년, 소설 속의 소설가인 브라이오니의 현재 - 가 존재하는데, 소설과 영화는 결말에 이를 때까지 그 구조 사이에 놓인 비밀을 밝히지 않는다.

<어톤먼트>라는 전체 허구 속에는 실재했던(어폐가 있음을 인정한다) 허구가 있고, 소설 속의 소설가 브라이오니가 만든 허구 속의 허구가 따로 그러나 조화를 이루며 존재한다. 게다가 많은 부분 ‘의식의 흐름’에 의존하는 원작소설처럼, 영화도 따라잡기 쉬운 나열식 전개를 취하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고 종종 점프하는 탓에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에 당도하면 그 모든 순간의 의미가 하나씩 드러나 자리를 잡는다. 당연히 주의와 집중이 요구되며, 그랬을 때에야 깊은 묘미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위에서 언급한 ‘허구 속의 허구’를 대표한다. 바람이 부는 해변(세실리아가 로비에게 보낸 편지에서 같이 가자고 했던 바로 그 해변일 것이다)에서 두 주인공은 환한 웃음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 장면은 영화 속 작가 브라이오니의 바람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영화가 원작소설에서 직접 따오지 않은 몇 개 중 하나다. 원작소설에서 브라이오니는 60년 전에 죽은 두 남녀를 살려낸 이유에 대해 ‘연인들을 살려두고 다시 만나게 한 것은 나약함이나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베푼 친절이었고, 망각과 절망에 맞서는 투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행복을 주었지만, 그들이 나를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라고 써놓았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 해변 장면은, 주인공의 죽음을 접하고 슬픈 감정에 빠진 관객을 향한 위로에 해당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행복감과 희망을 전하고 싶은 감독의 배려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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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톤먼트>는 영국영화의 전통과 영광을 이을 새로운 세력들을 확인하는 장이다. 할머니 브라이오니를 연기하는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와 로비의 어머니 역의 브렌다 블레신, 각색을 맡은 크리스토퍼 햄튼이 영화에 무게를 싣는 것과 별개로, 주연을 맡은 키라 나이틀리, 제임스 매카보이, 시어샤 로넌, 그리고 감독 조 라이트는 앞으로의 성과가 분명 더 기대되는 인물들이다.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인 됭케르크 해변의 롱쇼트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실제 장소가 아닌 영국에서 찍었다). 영국군들이 해변에 어지러이 집결해 있는 모습이 한 번의 커트도 없이 원 쇼트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시머스 맥거비의 촬영과 다리오 마리아넬리의 애절한 음악이 기막힌 조화를 이룬 장면이다(어느 정도 CG의 혐의가 없진 않다). 5분 가까이 이어지는 이 장면은 프랑스 북부에 배치되었다 퇴각용 함선을 기다리고 있는 영국군의 모습을 빌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의 안타까움과 전쟁이 남긴 상처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이것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아버지의 깃발>에서 해안으로 침투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뒤집어놓은 것으로서, 그들의 대책 없는 상황과 멀리 덩그러니 서 있는 놀이기구, 정신없이 돌아가는 회전목마의 대비가 현실의 막막함을 전한다.

* 영화를 처음 공개하는 자리이다 보니 시사회에선 간혹 해프닝이 벌어진다. <어톤먼트>의 시사회에선 몬테 헬먼의 <자유의 이차선>의 끝장면을 방불케 하는 일이 있었다. 필름에 진짜 불이 난 건지 그렇게 보이기만 한 건지 알 수 없으나, 필름이 지글지글 타는 모습을 거대한 스크린으로 보는 느낌이 대단했다. 덕분에 마지막 장면의 감흥이 확 사라지긴 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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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ibu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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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잘 읽고 갑니다 :>
    최근에 본 영화중 하나인데.
    저 또한 착각에 빠진 사람중 하나가 된거 같네요^^;
    종종 찾아 올꼐요.

    • ibuti 2008/02/26 11:25

      그런데 그 착각이 영화를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긴 해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2. ㄴㅇㅇㅈ 2008/02/26 12:59

    영화보는 후반까지만 해도 브라이오니xx년 하고 속으로 욕했는데 끝나니까 제일 불쌍하다고 생각되는게 브라이오니...

    • ibuti 2008/02/26 18:05

      ㅎㅎ 그러셨군요. 처음엔 그 소녀가 참 미워요. 그녀의 마지막을 보면 오래 사는 게 꼭 좋은 건 아니예요, 그죠.

  3. 영화좋았어요 2008/02/26 13:30

    영화 정말 좋았습니다. 여운도 길고요..
    저도 제일 불쌍하다는 생각이... ㅠ.ㅠ

    익스트림무비인데 이런 영화 평도 자주 올라와서 좋네요 ^^
    전 피 튀기는 영화들이 아직은 무서워서
    호기심은 있어서 꾸준히 읽고는 있어요 ^^;
    언젠가는 도전을 해서 익스트림의 세계로.. 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ibuti 2008/02/26 18:06

      제 글이 '익스트림'이란 타이틀엔 어울리지 않긴 해요.^^ 그래도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열심히 쓰겠습니다.

  4. 아 정말 좋았던 영화입니다.^^

  5. 그네타는남자 2008/02/26 18:42

    저도 이 영화 강추입니다. 위에 댓글 보고 한마디 하자면 운영하시는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관객에게 큰 감동과 여운을 주면 그게 익스트림무비가 아닐까란 주장을 살짝 해봅니다. 오버일까요? 여하튼 여기 글쓰시는 분들.. 워낙 개성들이 있어서 읽는 재미가 좋습니다
    업데이트가 많아서 브라우저 메인 화면으로 정한지 꽤 되었습니다. 다른 곳으로 바뀌지 않도록 운영 잘 해주세요. 글쓰신 분 새로운 스탭분이시군요. 영화도 훌륭하지만, 진정성이 느껴지는 글도 감동입니다

  6. 꽃을든 여자 2008/02/27 14:56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 멍하니 다시 줄거리를
    되짚어봤습니다.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가슴이 아팠어요
    소설을 보려고 결심했죠.
    영화구성중에 일어난 일을 브라이오니의 시각과 실제 일어난일
    이렇게 두번 보여줬었잔아요
    너무 인상깊었어요 .
    무엇보다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가 맘에 들었어요 ^^

    • ibuti 2008/02/28 00:10

      소설에서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맛도 좋을 거예요.

      제임스 매카보이는 크게 될 인물 같죠?

  7. 알고보면.. 2008/03/02 20:57

    초콜릿공장사장이젤나쁜놈이죠...ㅎ

    • '어톤먼트' 아직 못봤는데 점점 궁금해지네요.
      초콜릿 공장 사장이라셔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 말씀하신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