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적이고 심오한 고품격 스릴러
이 세상이 잔인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면,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 8개 부문의 후보에 오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코엔 형제가 연출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잔혹하고도 무도한 지옥도라고 말한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헤어날 수 없는 정글에서, 연약한 인간들은 상처 받고 때로는 목숨을 잃으면서도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다. 그 법칙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 구체적인 악의나 이해관계에 따른 차별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공평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처럼 절대적인 잔인함이다.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사막에서 사냥을 하던 모스(조쉬 브롤린)는 갱단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져 시체가 널브러진 현장을 발견한다. 모스는 망설임 없이 2백만 달러가 든 가방을 가지고 오지만, 바로 갱단이 보낸 킬러의 추격이 시작된다. 킬러인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는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살육하는 살인마다. 퇴직을 앞둔 보안관 벨(토미 리 존스)은 모스가 정체불명의 킬러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저 두 사람의 공방을 뒤쫓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쉽고도 어려운 영화다.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모스나 시거 등 주인공들은 결코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다. 총격전의 현장에서 모스는 죽어가는 남자를 본다. 그는 물 한 모금만 달라고 사정하지만 모스는 매정하게 돌아선다. 그리고는 문득 밤에 일어나 물을 가지고 돌아갔다가 킬러에게 쫓기게 된다. 작은 선의가, 그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위험한 상황임을 알면서도, 보안관 벨이 도와주겠다고 말해도, 모스의 목적은 단 하나 돈을 지키는 것뿐이다. 그건 집착이고, 허튼 욕망일 뿐이지만 그가 살아야 하는 유일한 목적이기도 하다.
킬러인 시거는 규칙이나 상식 같은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조직의 청부를 받는 킬러이긴 하지만, 시거는 자신의 원칙대로만 행동한다. 거기에 부합하지 않으면 의뢰인도 서슴없이 죽여 버린다. 선과 악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완벽한 세계 안에서 자유롭게 존재하는 시거는 일종의 잔인한 신이다.
보안관인 벨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인 존재다. 하지만 벨은 모스와 시거 모두를 이해할 수 없다. 목숨을 버릴 것이 분명한데 모스는 왜 돈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왜 킬러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토록 잔인하게 죽여 버리는지, 알 수가 없다. 모스와 시거를 쫓으면서 벨은 무력감을 느낀다. 이 세상이 어디론가 훌쩍 달려가 버리고, 자신만이 뒤처져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벨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시거가 저지른 살인의 현장을 뒤늦게 찾아가는 것뿐이다. 살인을 막을 수도 없고, 정의를 회복할 수도 없다. 거대한 허리케인이 지나간 후의 잔해들만을 망년자실하게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거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다. 제목의 ‘노인’은 벨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 잔인한 세상의 법칙 앞에 무력한 우리 모두를 말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막막하고 섬뜩한 범죄극이다. 코엔 형제는 깊은 의미를 깔아두고 이야기를 진행시키지만, 결코 느슨하게 관객을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코엔 형제의 장기는 <파고>(1997)와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2001) 같은 독특한 리듬의 범죄극이었다.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스릴러의 톡 쏘는 맛을 보여준다. 모스는 킬러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갖가지 계략을 쓰지만 최상급 킬러인 시거에게는 별다른 소용이 없다. 게다가 시거는 악착같이 모스를 쫓아다니면서 방해가 되는 사람은 차갑게 죽여 버린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화끈한 액션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숨이 막힐 듯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기이한 추격전이, 탁월하게 완급을 조절하면서 능숙하게 펼쳐진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코엔 형제의 탁월한 영상 테크닉과 심오한 주제가 잘 어우러진 예술영화다. 하지만 일반 관객에게 익숙하지는 않다. 추격전의 경쾌한 리듬에 빨려들었다가도, 상업영화의 화끈한 클라이맥스와는 전혀 다른 낯선 끝맺음에 당황스러워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예술영화가 결코 소수만을 위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89년부터 91년까지 미국 인디펜던트 영화가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3연패 한 적이 있었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데이비드 린치의 <광란의 사랑>,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가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독식한 후 미국 인디영화의 재능 있는 감독들은 속속 할리우드 메이저로 진출했다. 자신의 작품 스타일을 고수한 데이비드 린치와 코엔 형제는 다시 인디영화로 돌아왔지만, 스티븐 소더버그는 <에린 브로코비치> <오션스 일레븐> 등을 만들며 메이저 감독으로 안착했다. 역시 인디영화 출신인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맨>, 브라이언 싱어는 <엑스맨> 등으로 흥행감독이 되었다. 할리우드가 늘 식상한 오락영화만 만든다는 편견이 있지만, 실제로는 해외에서 감독을 영입한다거나 인디영화에서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는 식으로, 끊임없이 할리우드 영화는 조금씩 진화해 왔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예술영화가 다양하게 존재해야만, 할리우드 영화도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할리우드 외곽에서 만들어진 혁신적이고 심오한 영화이지만,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지겨운 반복에 지친 관객에게는 새로운 보석을 발견한 느낌을 줄 것이다. 관객의 눈이 높아져야, 영화의 질도 높아지는 것이다.
관련 리뷰
2008/01/31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No Country for Old Men (2007) by DJUNA
'리뷰 > 미스터리 / 스릴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어웨이크 - Awake (2007) (1) | 2008/03/19 |
|---|---|
| 밴티지 포인트 - Vantage Point (2008) (4) | 2008/03/15 |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No Country for Old Men (2007) (26) | 2008/03/09 |
| 데스 노트 L: 새로운 시작 - L change the WorLd (2008) (3) | 2008/03/08 |
| 크라이 울프 - Cry_Wolf (2005) (7) | 2008/03/07 |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No Country for Old Men (2007) (5) | 2008/02/21 |
| 밴티지 포인트 - Vantage Point (2008) (1) | 2008/02/21 |
| 밴티지 포인트 - Vantage Point (2008) (5) | 2008/02/19 |
| 데스 노트 L: 새로운 시작 - L change the WorLd (2008) (2) | 2008/02/18 |
| 추격자 (2007) (15) | 2008/02/04 |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No Country for Old Men (2007) (9) | 2008/02/01 |
|
익스트림무비 추천 도서 |
|
| 세 번의 영화, 다섯 번의 드라마로 만들어져 기록적인 흥행을 올린 일본 추리소설 사상 불후의 걸작.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의 대활약을 그린 요코미조 세이시의 <이누가미 일족>은 막대한 유산 상속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연쇄 살인의 음모를 박진감 넘치게 그린 작품으로, 추리 소설 팬이라면 필견의 소설이다. |
|
트랙백 주소 :: http://extmovie.com/trackback/4659
-
Subject: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no country for Old Men 2007
Tracked from 독단과 편견이 가득한 블로그 2008/02/21 17:26 삭제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no country for Old Men 2007 평점 : 7.5/10 추천인 : 코엔 형제의 영화를 아는 사람 소설 원작을 읽은 사람 헐리우드 주목작이 궁금한 사람 영화를 혼자 봐야 한다면... 영화평을 즐기는 사람들과 같이 보는 기회를 누린다면 비추천인 : 노인들의 가슴 따뜻한 영화인 줄 안다면.. 어려운 영화는 딱 질색인 사람 로맨틱 코미디가 좋은 여성분들 제목만 보고 반한 노인 분들.. <독단과 편견이 가득한 영화..
-
Subject: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양들의 침묵의 안소니 홉킨즈와 대등한 악마가 탄생했다!
Tracked from Chandler's 영화&피아노 이야기 2008/02/21 20:31 삭제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2007) 범죄.스릴러.드라마 / 미국 / 122분 개봉 2008.02.21 감독 에단 코엘, 조엔 코엘 배우 토미 리존스,하비에르 바르뎀, 조쉬 브롤린.... 코맥 맥카시가 미국과 텍사스 국경을 배경으로 쓴 '국경 3부작’중 가장 최근작인 2005년산 동명 소설을스크린으로 재현한 스릴러. 미국 개봉에선 소규모 개봉된 이후 개봉 2주차에 극장수를 28개에서 148개로 늘였는데, 여..
-
Subject: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2007)
Tracked from Brand named WMINO 2008/02/22 09:15 삭제전 세계 총 110개 부문에서의 노미네이트, 이 중에서 73개의 부문에서 수상. 거기다 2008 골든 글로브 2개 부문 수상에 2008 아카데미 어워드에서 8개 부문 최다 노미네이트까지, 미국에선 지난 11월 개봉 이후 17주간이나 20위권 밖으로 밀리지 않으며 장기 흥행에 성공했으며 영화 연출자인 코엔 형제는 총 15개의 감독상 수상.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하 <노인>)의 성적표이다. -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사로잡을 것인가? 앞선..
-
Subject: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와 소설이 뭐가 달라?
Tracked from 길에서 영화를 만나다 2008/03/04 13:35 삭제(*온통 스포일러만으로 구성된 글입니다) 최근 제80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4개의 상을 받은 영화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받은 4개의 오스카중엔 원작 소설을 뛰어나게 각색했다고 해서 받은 각본상도 있는데... 이 영화는 이번에 각색에 관련해서만 아카데미외에도 골든 글로브와 미국작가조합상은 물론 뉴욕과 시카고를 거쳐 런던,토론토, 그리고 피닉스까지 각도시 비평가협회의 각본상이란 각본상을 깨끗히..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트랙백 살짝 걸고 갈께요 ^^
초기대중인 영화
CGV 인디영화관에서 상영중이던데 이번 주말에 꼭 관람을 해야겠네요.
저도 낯선 결말에서 상당히 당혹스럽긴 했지만...-_-;;;
좋은 작품이라는 건 부인하기가 힘드네요.
살인마 연기한 하비에르 바르뎀의 카리스마도
최고였고...
코엔형제 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설레이는 영화입니다.
토미리존스의 캐스팅도 마음에 들구요, 살인마로 나온 저 배우 연기도 좋다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