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 <기사 윌리엄>의 원제인 <A Knight's Tale>은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의 첫 번째 에피소드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 영화는 그 에피소드를 각색한 것이라고 하죠. 원작에서 빌려온 것이라고는 중세 마상 시합이 등장하는 것 뿐이지만 말입니다.
파프리카 제프리 초서 자신도 이 영화의 중요한 조역으로 등장하죠? 영화 끝에 가면 초서가 이 모든 이야기를 책으로 쓰겠다고 떠벌리잖아요.
듀나 만약 이 사건이 '정말로' 일어났다고 해도 <A Knight's Tale>의 원래 모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걸요. <A Knight's Tale>은 <캔터베리 이야기> 중 가장 구식 기사담에 가까운 작품인 걸요.
파프리카 <기사 윌리엄>은 1356년의 프랑스에서 시작합니다. 이렇게 정확한 연도를 어떻게 뽑을 수 있냐고요? 프와티에 전투가 일어난 해니까요. 1356년이면 백년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지요. 프랑스 사람들과 영국 사람들 사이의 감정도 꽤 나빴을 겁니다.
그렇다고 마상 창시합에만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게까지 비현실적이지는 않답니다. 중세 전쟁은 현대전과는 달랐으니까요. 요새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전쟁의 이미지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중세 전쟁은 스포츠 시합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피튀기는 살육인 건 마찬가지지만 정작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을 거예요.
듀나 잔 다르크가 현대전을 발명하기 이전이니, 그 피튀기는 정도도 약했을 걸요. 대부분 국가를 위해 대규모 살육을 하는 대신 상대방 기사를 잡아 몸값을 뜯어내려 했을테니까요.
파프리카 하여간 우리의 주인공 윌리엄의 이야기는 그런 역사적 대사건과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는 단지 마상 시합을 하고 싶어하는 시종에 불과합니다. 주인이 죽자 잠시 대타로 나선 그는 그 뒤로 울리히 폰 리히텐슈타인이라는 가짜 귀족으로 행세하며 마상 시합의 스타가 됩니다. 그러다 조슬린이라는 귀족 처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요.
갑옷 입은 기사들이 나오지만, 이 영화는 스포츠 영화입니다. 그것도 아주 뻔한 할리우드식 스포츠 영화죠.
듀나 많은 비평가들이 이 영화의 뻔한 스토리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단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영화에서 공식적인 뻔한 줄거리는 어느 정도 필수적이에요. 그래야지만 중세를 배경으로 한 미국식 스포츠 영화라는 어처구니 없는 설정이 더 튈 수 있거든요. 진부한 설정이 하나라면 문제가 되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진부한 설정이 하나로 결합하면 사정이 다릅니다.
파프리카 영화는 은근히 시대착오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단 이 영화의 마상 시합 팬들은 현대 축구 팬들과 똑같이 행동합니다. 얼굴에 스타의 문장을 그려넣은 사람들이 파도 응원을 하는 광경을 한 번 보세요.
그 뿐만 아니에요. 비싼 자리에 앉아 있는 귀부인들은 에스콧에라도 온 것처럼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고, 사방에는 퀸과 데이빗 보위의 음악이 울려 퍼집니다. 품위있게 시작된 무도회는 어느 순간 거의 디스코텍처럼 변해가고요.
시대 착오를 극으로 밀어붙이는 사람은 대장장이인 케이트입니다. 여자 대장장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중세라는 배경에 어울리지 않는데다, 그 사람이 초경량 합금으로 만든 갑옷에는 나이키 상표까지 붙어 있으니까요. 물론 나이키 회사가 나오기 전이니 케이트 상표라고 불러야 하겠지만요.
듀나 보통 과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둘 중 하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과거는 현대와는 다른 시대였다. 2) 옛날이나 요새나 사람 사는 건 똑같다. 첫번째 이야기를 하려는 작품은 과장된 의상과 대사를 통해 차별성을 강조하고, 두번째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들은 그 다른 디테일 속에서 우리와 공통점을 뽑아냅니다.
<기사 윌리엄>은 당연히 후자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그렇게까지 심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폭력적인 스포츠에 대한 열광은 중세에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더 심했을지도 몰라요. 당시 축구 경기에선 사람들이 막 죽어나가곤 했으니까요.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에요.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이나 젊은이들의 사랑 같은 건 크게 바뀌지도 않았고 또 한 동안 바뀔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중세 사람들에서부터 그렇게까지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현대적인' 사극이라는 것들이 대부분 수없이 되풀이된 오래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파프리카 브라이언 헬겔런드의 각본은 비교적 평이합니다. 스토리는 밋밋하며 예측가능한 일만 일어납니다. 특별히 개성있는 인물이나 찬란한 악당도 등장하지 않고요. 아까 '두 뻔한 공식의 충돌' 운운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런 걸 고려한다고 생각해도 아주 흥미진진한 각본은 아니죠. 밋밋한 내용에 비해 너무 길기도 하고요.
듀나 그래도 이 밋밋한 이야기에는 싱거운 재미가 있습니다. 분명 저도 영화를 보면서 '참, 밋밋한 이야기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저에게도 2시간 15분이 훌렁훌렁 꽤 쉽게 넘어갔는 걸요.
배우들이나 캐릭터들도 비슷합니다. 특별히 대단한 개성은 없지만 그럭저럭 쓸만하지요. 히스 레저가 연기하는 윌리엄은 적당히 귀엽고 적당히 섹시하며 단순하기는 벽돌같은 스포츠맨입니다. 루퍼스 슈얼은 적당히 야비하고 밥맛없는 악당이고, 섀닌 소사몬은 적당히 로맨틱한 여자 주인공이고요.
파프리카 섀닌 소사몬도 예쁘기는 했지만 케이트 역으로 로라 프레이저가 나왔으니...
듀나 잊고 있었군요. 그 사람 좋아하죠?
파프리카 네, 녹화해둔 <사이버 체인지>나 다시 볼까봐요. 대장장이 케이트도 맘에 들었지만 너무 조금 나왔어요.
듀나 그 맹한 영화를 녹화까지 했어요?
파프리카 그럼 로라 프레이저 때문에 그 묵직한 영화 <타이터스>를 모조리 다시 봐야 할까요?
듀나 지금 <캔터베리 이야기> 뒤에 실린 초서의 연보를 확인하고 있는데, 프와티에 전투가 일어나던 당시 초서는 틴에이저였네요. 이 사람의 젊은 시절이 잘 알려져있지 않기는 하지만 몇 년 쯤 뒤로 당겨도 되었을 걸 그랬어요. 어차피 프와티에 전투 없이도 이야기 구성엔 큰 문제 없는 걸요. 핑계야 만들면 생기는 것 아니겠어요?
파프리카 몇 년 정도야 용서해줄 수 있죠. 그리고 이 영화의 초서도 꽤 귀여운 캐릭터예요. 윌리엄 친구들은 다들 귀여워요.
듀나 그 사람들 꼭 <A 특공대> 같은 텔레비전 액션 영화 시리즈의 팀 같았어요. 초서는 문서 위조 전문, 케이트는 첨단 무기 전문, 와트는 협박 전문... 뭐 이런 식 있잖아요.
파프리카 그런데 조슬린은 어떤 집안에서 살길래 그렇게 맘편하게 마상 경기 챔피언 쉽이 열리는 곳마다 따라가는 걸까요? 당시는 여행도 쉽지 않았을텐데? (01/08/08)
기타등등
IMDb에 따르면 영화 끝에 쿠키가 있다더군요. 하지만 이번 시사회 때는 끝을 그냥 자르더라고요. 보신 분 있으면 확인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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